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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민 Oct 03. 2024

올림픽의 그늘, 반복되는 철거민의 삶

* 해당글은 저널서울에 기고된 글입니다. 



이경민 / 서울수집 운영자(instagrm@seoul_soozip)

1980년대 상계동과 목동에서 시흥까지
현재까지 이어져오는 주거권의 문제
그들은 왜 사라져야만 했을까?


옛 한독마을 인근 풍경(2020년 촬영) ©서울수집


비행기가 지나는 자리, 목동

1988년 올림픽 개최로 인해 강제 철거되어 쫓겨나야 했던 상계동 사람들에 이어 비행기가 지나는 길목에 있다는 이유로 쫓겨나야 했던 목동 사람들이 있었다. 과거 목동은 1962년 말까지 김포군 소속이었다가 1963년 1월 1일 서울에 편입되지만 20년 동안 서울시의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었다. 목동 인근을 흐르던 안양천 둑은 온통 갈대밭이었고, 진흙투성이었다. 사람이 살기에 좋지 않은 터였지만, 갈 곳을 잃은 사람들에겐 더할 나위 없었다. 1964년에 여의도·영등포·회현 등에서 살던 사람들 집이 철거되었고 이들은 안양천 인근에 이주하여 살았다. 서울시장은 이곳에서 영원히 살아도 좋다고 말했다. 하지만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김포공항과 가까워 서울로 진입하는 비행기가 착륙하기 전에 마주하는 동네가 바로 목동이었기 때문이다. 1983년 서울시는 목동과 신정동 지역에 신시가지 조성 계획을 발표했고, '영원히 살아도 좋다.'는 말을 '당신들이 사는 집은 무허가 건물이고, 지금까지 살게 해 준 것만으로 감사해라. 가옥당 이주비 50만 원과 아파트 입주권을 주되, 이주비는 철거 확인 후 지급하겠다.'로 말을 바꾸었다. 열악한 환경과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20년 동안 각종 세금을 납부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이곳에서 나가라.'는 말뿐이었다. 

"우리들은 그 자리에 서민형 임대 아파트를 지어달라고 했어요. 우리는 이대로 떠날 수 없었어요. 거기가 우리의 생존 터전이었거든요. 전부 다 ‘판잣집’식으로 뚝방촌인 거지. 우리가 보증금 20만 원에 3만 원 내고 살았어요. 가옥주들은 그 작은 집을 몇 개로 쪼개서 세를 놓고 세입자들은 작은 방에 식구가 여섯, 일곱 명씩 살았어요. 찢어지게 가난했던 거지. 대부분 막노동, 공장 일을 했고 종이를 줍거나 비닐하우스에서 일해주거나 하면서 근근이 살았거든요."_<내용 출처: 민주화 운동 기념 사업회>

목동의 철거 대상 건물은 총 2,359동, 허가 건물 580동과 무허가 1,779동. 세입자 2,846가구와 가옥주 2,359가구를 합한 5,205가구. 철거를 강요받은 세입자만 1만여 명에 달했다. 가옥주들에게는 연고권을 인정하여 부분적으로 대책이 마련되었으나 세입자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아 1984년 8월 27일에는 양화대교 점거 농성을 시작으로 100여 회가 넘는 크고 작은 투쟁으로 이어졌다.  


서울의 관문 목동에서 경기도 시흥으로

(좌)복음 주택 부지의 모습, (우)한독마을 ©디지털시흥문화대전

주민들은 3년간 철거민이 할 수 있는 조건들을 지속해서 요구하며 끈질기게 투쟁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함께 살던 사람들은 각기 다른 곳으로 흩어졌고 그중 일부는 경기도 시흥시에서 양평동, 시흥동, 당산동, 사당동 등 철거민들의 정착지로서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던 복음자리와 한독 마을 인근으로 이주했다. 정부가 이주할 집과 지역을 정해주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불법적으로 형성된 판자촌 세입자에게 집을 제공할 의무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목동 철거민 중 대부분은 여러 지역으로 흩어지고 입주권을 끝까지 거부하고 생활 터전을 요구하던 105세대는 복음자리와 한독 마을 인근으로 이주해서 제정구의 영원한 벗 정일우 신부가 독일에 가서 얻은 지원금과 10%의 이자를 내는 정부의 ‘융자금’으로 목화 연립을 건설했다. 목화연립이란 ‘목’동 출신들이 잘 ‘화’합해서 살라는 의미라고한다. 당시 민중 건축가에 의해 지어졌다는 목화연립 세 개동은 35년 세월이 지난 지금에 봐도 매우 독특한 구조의건물이다. ‘ㄷ’ 자 모형의 연립은 모든 세대가 외부 복도를 통해 다 연결되어 있고 야외극장으로도 활용 가능한 ‘중앙 광장’을 향해 문이 나 있다. 언뜻 보기에도 공동체적 삶을 지향하려 한 건축가의 의도를 읽어낼 수 있다. 건물자체도 무척 튼튼해 못이 안 들어갈 정도라고 한다. 현재도 65%가 초기 이주 세대와 2세대가 살고 있고 나머지는 그 후 새로 들어온 입주자들이다. 목화연립이 완공되고 주민들이 입주했는데 ‘데모꾼’들이란 이유로 취직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강한 단결력과 생명력을 가진 이주민들은 이곳에 뿌리내리는 데 성공했다."_<내용 출처: 민주화운동 기념 사업회>

40년이 지난 뒤, 어떻게 되었을까?

복음자리마을의 흔적 '복음자리 어린이공원' ©서울수집

지난 세월 속 철거민들이 자리 잡은 터에 대한 가장 큰 이슈는 아마도 현재의 존재 여부일 것이다. 사라졌을까? 아니면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을까? 아니면 조금이라도 변했을까?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옛말이 여전히 유효하고, 10년도 채 안 된 1~2년 사이에도 모습을 바꾸는 요즘, 당연히 떠오르는 질문일지도 모른다. 상계동 사람들이 이주 후 정착한 천보마을을 확인했던 것처럼 목동 사람들이 이주하여 정착한 마을이 사라지기 전, 혹여나 사라졌다면 남은 흔적이라도 찾고 싶어 경기도 시흥으로 향했다. 시흥에는 1970년대 후반부터 목동 철거민들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복음자리 마을, 한독마을이라는 이름을 붙여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목화연립과 함께 총 3개의 마을이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형성되어 있어서 3곳 모두 살펴보기로 했다. 

복음자리 마을 
현) 시흥 신천 휴먼시아 (2010년 준공)
지명으로만 남아 있음 : 복음 어린이 공원, 복음자리 어린이 공원, 사회복지법인 복음자리, 복음자리 입구 등
옛) 복음자리 마을 터 현) 시흥신천휴먼시아 아파트. ©서울수집

양평동 철거민들이 가장 먼저 터를 잡고 집을 지었던 복음자리 마을. 서울이 아닌 왜 경기도 시흥이었을까? 라는 의구심이 있었는데 다름 아닌 현실적인 문제였었다. 당시 땅을 직접 매입했었는데, 싼 땅을 구하려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한다. 지하철역에서 복음자리 마을 터까지 가는 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현재는 2010년 준공된 아파트가 있고, 앞쪽에 조성된 공원 이름을 통해 마을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복음 어린이공원과 복음자리 어린이공원이다. 이름만이라도 남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때로는 이름만으론 복음자리 마을이 어떤 곳이었는지 전혀 알 수 없다는 사실에 ‘남기는 것’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이름에 담긴 의미와 뜻을 알고, 지역의 변화를 인식하게 하는 단서가 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알아가고 이해하려고 할지는 전혀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존재를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의 하나인 ‘물리적 형태’로써의 남김에 대해서도 고민했지만, 확실한 답은 내릴 수 없었다. 의도했던 바와 다른 의미가 부여되기도 하고, 때론 형태가 변형되어, 전혀 다른 맥락에서 해석되는 경우를 많이 목격했기 때문이다. 어떠한 형태로든 남겨진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고,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할 것인지에 대한 태도가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고층 건물 하나 없는 곳에 우뚝 솟아 오른 아파트는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유독 눈에 띄었다. 애써 남겨놓은 이름이 잊히지 않고 널리 퍼져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온 시간과 쫓겨났지만 마을을 이루고 살면서 정착한 곳에 뿌리내리려고 했던 과정이 헛걸음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단서가 되어 주길 바라본다.

작은자리 사회복지관. ©서울수집
작은자리 사회복지관. ©서울수집

옛) 복음자리 마을에서 몇 걸음을 옮기면 한독 마을과 목화연립이 있는데, 가는 길목에는 <작은 자리 종합사회복지관>이 자리하고 있다. 현재는 사회복지관으로서 운영이 되고 있지만, 과거에는 복음자리, 한독 마을, 목화연립 주민들이 모여 교류하면서 다양한 활동을 하는, 지역공동체 구성을 위한 커뮤니티 공간인 <작은 자리 회관>이었다. 복음 신협, 복음 장학회 등의 주민조직 운영 공간, 환갑 잔치, 결혼식, 경로잔치, 돌잔치 등 마을 주민들의 행사 장소, 한글 교실, 풍물, 서예, 독서 모임 등의 교육과 문화 활동, 인근 공장 노동자들을 위한 야학, 노동 상담과 노조 설립 지원 등 공동체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펼쳐내는 장소였다.

古제정구 의원을 기리는 비석. ©서울수집

1989년 시흥의 시 승격과 도시화로 새로운 인구가 유입되면서 3개의 마을만이 아닌 좀 더 큰 범위에서의 공동체를 위한 역할이 필요해짐에 따라 작은 자리 회관은 1996년 사회복지관으로 기능을 전환한다. 복지관 건물 한편에는 이주 후 정착하기까지 누구와 함께했고,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사진과 함께 古제정구 의원을 그리워하는 비석도 세워 두었다. 복음자리, 한독, 목화마을을 형성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古정일우 신부님과 古제정구 의원. 두 사람은 도시빈민(혹은 철거민)들과 지속 가능한 공동체 마을을 만들고자 노력했던 사람들이다.

작은자리복지관 홈페이지에 나와있는 설립 배경.
“제정구와 정일우는 '주민들을 위해서 무엇을 만들거나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살고자 하였다. 판자촌 삶에서 그들의 두 가지 약속은 "가난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의존토록 하는 일은 절대 하지 말자." "주민들을 위한프로그램을 절대 하지 않고 그냥 산다." "그냥 이웃으로 함께 살면서 주민들이 스스로 움직일 때 끝까지 함께 하고 누구보다도 앞장서자!"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가난한 이웃이 바로 하느님'이라고 생각하였고 늘 그들 안에서 그들과 함께하고자 하였다. 주민은 단지 수혜자나 대상자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삶과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당당한 주인이며 존엄성과 가능성을 지닌 능동적 주체이며 권리자이다. 작은 자리 종합사회복지관의 핵심 가치는 창립 주체의 사람 중심, 주민 중심의 정신과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작은 자리 복지관은 이러한 정신과 철학을 기초로 가난한 이웃을 섬기고 주민과 함께 동행(同行)하며, 주민 스스로의 힘으로 마을을 변화시키고 더불어 행복한 공동체를 누리는 '주민의 지역사회'를 이루기 위해 실천해오고 있다."<내용 출처: 작은 자리 사회복지관 사이트 설립 배경과 연혁, http://www.jakunjari.or.kr/wpage/05/05_03.php>   

복지관을 지나 목화연립으로 향하는 길, 공사 중인 건물이 시야에 들어온다. 온 동네에 공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인근 도로는 공사관계자 차로 가득했다. 공사 펜스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끄트머리에 우뚝 솟은 터파기 기계가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겁에 질린 채로 공사 현장과 50m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 있는 목화연립에 도착했다.

목화연립 
처음 정착했던 위치와 모습 전부 동일
맞은편에 2027년 준공예정인 아파트 공사현장이 있음.  
목화연립(2000년 촬영) ©서울수집
목화연립(2020년 촬영) ©서울수집
목화마을 기공식. ©디지털시흥문화대전


목동 철거민 투쟁 당시 입주권을 끝까지 거부하고 생활 터전을 요구했던 105세대의 목동 철거민들이 거주할 수 있도록 당시 정부 융자금으로 건설된 목화연립 'ㄷ' 형태로 구부러진 복도와 모서리 부분이 둥글둥글한 형태가 인상적이었다. 때마침 색이 바래 옅어진 페인트를 다시 칠하는 중이었다. 목화연립이 위치한 경기도 시흥시는 1980년대에 시흥군에서 시흥시로 승격되면서 한 차례 변화를 맞이했다. 이후 도시화가 본격 진행되었고, 40년이 지난 현재, 또 한 번 변화 물결 위에 서 있다. 이전의 시흥과 그때의 시흥은 다르며, 그때의 시흥과 현재의 시흥은 다르다. 이곳에서 오랫동안 머물며 시흥의 변화를 지켜본 사람들은 어떤 기분이 들까? 목화연립 건물 복도에서 공사장을 바라보고 있는 주민 몇몇을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시끄러운 공사 소음만큼이나 상념에 잠긴 듯 보였다. 

목화연립(2020년 촬영) ©서울수집


우연히 이곳에 머물고 계신 어르신과 짧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당시에 정착했던 사람이 아직도 살고 있다고 했다. 대화를 계속 이어가진 못했지만,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사람과 공간이 남아있다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맞은편에 공사가 진행 중인 만큼 목화연립의 재건축·재개발 논의가 없었을지 의문의 들었다. 복음자리와 한독마을은 진작 재건축이 되었는데, 목화연립만 남아 있는 게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궁금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소규모 아파트와 연립주택이 많은 주거지였다. 비슷한 시기에 형성된 거라면 묶어서 재개발·재건축에 대한 논의가 한번은 있지 않았을까? 준공일을 살펴보니 대부분 목화연립 사용 승인이 난 1986년, 같은 해에 지어졌다. 1986년부터 1990년대까지 동시다발적으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기사를 찾아보니 2014년 9월 27일 자 시흥신문에 30년 이상 아파트, 연립 4곳에 대한 재개발, 재건축 추진 기사가 실렸는데 <은행동 목화연립>이 언급이 되어 있다. 10년이나 지났는데 아직 그대로인 것 보면 다행인가 싶다가도 한 순간에라도 언제, 어떤 방식으로 재건축이 될지는 모르는 상황에 놓여 있으니 앞날을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건축이 추진되는 곳은 ▲대야동 영남아파트 1·2단지(1,25가구) 3만 6,182㎡, ▲은행동 목화연립(568가구) 3만 974㎡, ▲거모동 일우 아파트·아주아파트(561가구) 1만 9,407㎡다... 시는 재정비 촉진지구 해제 지역 내 공동주택의 안전 등을 우려하여 지난 2012년 8월 도시주거환경정비 기본계획을 착수, 2013년 약 1년간 정비예정구역 주민들과  함께 정비 기본계획을 구상하였다... (중략) 시는 경기도 승인 신청을 토대로 지속적인 협의를 통해 금년 12월까지 도시주거환경정비 기본계획(변경)을 고시를 할 수 있도록 행정절차를 진행하고 내년도에는 후속 절차인 정비계획을 민·관과 전문가가 함께하여 정비 사업을 적극 지원할 예정이다.
<내용출처:시흥신문, http://www.sh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15790 >

그 시기가 오면,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또 어디론가 이동해야 할 것 이다. 2016년 은행동 통장협의회 부회장과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 재건축 D등급판정을 받았지만 역사성이 있는 건물이라 지속하기로 했다는 말이 언급되어 있다. 

“목화마을을 전체로 본다면 안정된 것이 약 10년 정도 되었다. 이제는 먹고사는 문제는 다 해결됐다. 30년이라는시간을 지나면서 돌아가신 분도 있고 다른 곳으로 이사하신 분도 있지만 여전히 60%의 정착률을 보이며 2대, 3대까지 살고 있다. 뉴타운에 휩쓸렸고 재건축 D등급판정까지 받은 목화마을이지만 역사성이 있는 건물이니 지속하기로 했다. 집단 이주되어 형성되었던 마을 중 시흥시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목화마을은,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안은 채 새롭게 형성된 시흥의 뿌리가 되려 한다.“
<내용 출처 : 시흥 옛이야기 | 은행동 목화마을 글 사진 허정임 시민리포터, https://m.blog.naver.com/beausiheung/220726904810 >

그럼에도 알 수 없는 것이 터전이자 집의 운명이다. 향후, 목화연립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한독 마을
현재: 은행마을 녹원아파트 (1997년 11월)
인근에 지식산업센터가 들어섰고, 검바위초등학교 뒤쪽으로 2018년~2020년 준공된 신축아파트가 들어섬. 
1979년 한독마을. ©디지털 시흥문화대전
한독마을 건설 사진. ©디지털시흥문화대전
시흥시를 통과하는 수인로

목화연립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한독 마을은 복음자리 마을처럼 사라지고 아파트로 변했다. 서울시 시흥동, 당산동, 사당동 등지의 철거민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다. 이주민들과 생활을 함께하기 위해 古 정일우 신부와 수녀들이 건물에 입주해 정착을 도왔다. 당시에는 구멍가게마저 귀하여 복음자리 마을 주민들까지 한독 마을의 구멍가게를 이용하였다고 한다. 주민들이 단합하여 이뤄낸 인상적인 에피소드도 있다. 수인 산업도로를 건너다니며 소래초등학교에 등·하교하는 학생들을 위하여 신호등 설치를 원하는 탄원서를 제출했고, 설치되지 않자 시위를 통하여 첫 신호등 설치를 이루어냈다고 한다.

녹원아파트 인근 풍경. ©서울수집
녹원아파트 머릿돌. ©서울수집

마을이 아닌 아파트로 변해버린 곳에서 이들의 생활상을 떠올리고 되새기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주변이 온통 논·밭·과수원이던 동네였다. 녹원아파트를 둘러싸고 동쪽으로 넓게 농경지가 펼쳐져 있었으나, 은계지구 택지개발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검바위초등학교 인근에는 지식산업센터와 신축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새롭게 연결된 길과 로터리가 생겼다. 마치 또 하나의 신도시가 생겨난 것만 같다. 시흥시 은행동 자연마을이었던 찬우물 북쪽에 조성되었던 한독 마을과 도시빈민의 공동체로서 처음 발 내디뎠던 복음자리 마을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목화연립까지. 같은 처지에 놓였던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공동체를 형성하며 생활했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되묻는 시간이었다.

옛 한독마을 인근 풍경(2020년 촬영). ©서울수집
옛 한독마을 인근 풍경(2020년 촬영). ©서울수집

또한, 이들의 행보에는 항상 古 정일우 신부와 古 제정구 의원이 있었다.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주거권을 해결하기 위해 시도 했던 것들, 마을로써 공동체를 만들어 삶을 이어가기 위해 행했던 실천들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복음자리에서 나고 자란 이들에 의하면 처음 1~2년 동안에는 마을 사람들끼리 엄청나게 싸우고 난리였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협화음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포기하기보다는 이해하려 애쓰고 기다린 덕분에 올바른 방향의 공동체로 거듭날 수 있었을 테다. 다만, 이들이 힘겹게 제 손으로 한 땀 한 땀 쌓아 올린 집은 다시 철거되어 아파트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살아온 의미와 정신은 작은자리회관에 남아 또 다른 가치와 의미를 쌓아 올리고 있다. 

1988 서울 올림픽 기록물. ©서울기록원

이들 사례와는 다르게 과거에서 끝나지 않고 무한 반복되는 철거민들의 힘겨운 상황을, 뉴스를 통해 접하곤 한다. 과하다 싶을 정도의 장면들을 보면서 예전보다는 나아졌을 거라 판단했던 것이 어쩌면 잘못된 생각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물론, 재개발 현장마다 상황이 달라서 모두 그렇다고 말할 순 없지만, 쫓겨나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1980년대 대한민국의 발전을 상징하는 국가적인 이벤트인 ‘서울올림픽’은 누군가의 삶을 지우기도 하고, 누군가의 삶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현재의 우리는 풍요로운 한 가지의 삶만 기억한다. 1980년 서울의 어느 날과 크게 다르지 않은 2024년의 어느 날. 기억 속에 사라져간 사람들의 삶을 다시금 꺼내어 우리도 모르는 사이 외면당하고 배제되어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와 최소한의 주거권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다하지 않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지 되짚어 보는 시간이었다. 적어도 우리의 미래는, 지금보단 나아진 환경과 조건 속에서 더 이상 망망대해를 떠돌며 사라지는 대신 살아지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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