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민 / 서울수집 운영자(instagrm@seoul_soozip)
상계동에서 포천 천보마을까지, 뿌리 뽑힌 삶의 기록
급격한 도시화가 남긴 아픈 흔적, 실질적 대안 마련 시급
올림픽공원 부지에 살던 몽촌마을 사람들의 흔적은 비석으로나마 남았고, 철거 과정에서 제안과 논의도 있었다. 하지만 여기, 철거 이후 이주대책도 없이 일방적으로 쫓겨난, 흔적조차 남길 수 없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1988년 올림픽을 대비하여 서울 동북부 지역이 재개발될 당시 정부에 의해 경기도 포천으로 강제로 이주당한 세입자들이다. 당시 상계동은 1960년대 중반부터 서울시가 추진한 불량 주거지 정비 사업에 의해 청계천, 한남동, 명동 등 서울 도심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흩어져서 모여 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상계동 173번지는 1985년 지하철 4호선이 개통되고, 재개발 사업예정지구로 지정되면서 철거 작업이 시작되었다. 1986년 철거 계고장이 나오면서 집주인들은 빠른 철거를 지지했고, 지속적인 내몰림으로 갈 곳이 없었던 세입자들은 주거 대책 마련 요구와 함께 철거 반대 농성을 했다. 그럼에도 행정대집행으로 상계5동은 완전히 철거되었다. 철거민들은 갈 곳을 잃고 명동성당에 잠시 머물렀다가, 1988년 경기도 남양주와 경기도 부천시 고강동에 정착했으나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 해당내용은 한국도시연구소 제공한 1998년 발행한 "철거민이 본 철거" 단행본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일지’로 정리된 내용은 1986년 3월 21일부터 11월 30일까지이고, 양계장으로 이주하게 된 시점인 5월 30일까지만 해당 글에서 인용합니다.)
이러한 험난한 과정에서 초기 이주한 일부 주민들이 경기도 포천에 자리 잡은 것이다. 당시 경기도 포천 동교동은 돼지나 닭을 사육하는 곳이었다. 돈사와 계사로 사용하던 곳을 개축해 가구당 4.7평씩 주거 공간을 마련해주었다고 한다. 처음엔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돼지와 닭을 기르던 공간을 사람에게 제공해 줬다고?’ 믿기지 않았지만 현실이었다. 정부는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와 기자·관계자들에게는 최적의 공간을 마련해주었지만, 철거민들에게는 강압적이고, 강경한 태도로 내쫓았을 뿐 최소한의 주거 대책조차 마련해 주지 않았다.
물론, 국가 이벤트가 진행되면서 일시적으로 제공되는 공간과 개인이 거주할 집을 제공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다만, 정부가 철거민을 대했던 태도나 대처 방식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는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상황은 지나간 한때의 이야기 같지만, 미디어를 통해 현재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음을 접하고 있지 않은가? 이 부분은 상계동에서 경기도 포천으로 강제 이주한 이들의 현재를 살피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직접 찾아가 보기로 했다.
‘경기도 포천시 동교동’
위치를 지도에서 발견했을 때 참으로 난감했다. 돼지나 닭을 사육하는 곳이라고 했으니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가려니 쉽지 않아 보였다.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지하철과 버스 간 연결성은 괜찮았는데, 문제는 배차간격이었다.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버스와 지하철 대기시간만 얼추 1시간이었다. 가는데 1시간, 대기 예상 시간 1시간, 총 2시간이 걸린다. 촘촘하게 연결된 교통망과 선택지가 많은 상황에서의 2시간과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는, 자칫하면 무한 대기시간이 길어지는 상황에서의 2시간은 엄연히 달랐다. 지금도 찾아가려니 쉽지 않은데, 1980년대에 이곳에 정착하여 살아가던 사람들은 오죽했을까. 이곳에 정착해 살아갔던 사람들의 상황이 어땠을지 말을 굳이 전해 듣지 않았어도 실감이 났다.
1호선 전철은 창동역을 출발한 지 40분 후 서울을 벗어나 경기도를 달렸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전철을 타고 내렸다. 종점역에 가까워질수록 이용객이 줄어들 거라는 생각은 나만의 착각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지루할 것만 같은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고, 어느 새 목적지인 덕정역에 도착했다. 버스로 환승한 뒤 25분을 더 가야 한다. 역에서 거리가 멀어지니 인적이 드물어진다. 급기야 버스는 산을 탔다. 길은 굽이굽이 휘어지고, 휘청대는 버스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니 거대한 도시의 풍경이 펼쳐진다. 내리막길 초입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관리되고 있는 묘원(墓園)이 보였다. 근데, 한 군데도 아니고 두, 세 군데다. 어린 시절 명절 때 작은할아버지 묘를 찾아간 적 있는데, 그때 본 풍경과 닮아 있었다. 그렇게 묘원에 정신 팔려 뚫어지게 보다가 하차 정류장을 지나칠 뻔했다. 급히 버스에서 내렸다.
이런 곳에 마을이 있다고?
잘못 찾아왔나 싶어 위치를 한 번 더 확인했다. 주변에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각자 제 할 일을 할 뿐이었다. ‘OO 레미콘’, ‘OO 연구소’, ‘OO 소프랜드’, ‘OO 공업’. 평소 공장이 모여 있는 지역 답사를 자주 하는 편이라 낯설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이곳은 또 다른 낯섦으로 다가왔다. 그때 천보마을 비석이 보였다. 금방 도착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한참을 걸어도 마을이 보이지 않아 불안해졌다. 지도 앱을 켜고 위치를 확인하면서 걷는데도 이상하게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고민하며 걷기를 반복했다. 그때 눈앞에 천보마을이 가까워졌음을 알리는 알림판이 나타났다.
!!!!!!!!!!! 어디로 가라는 것일까?
갈팡질팡 마음을 졸이다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는데, 천보마을이 보였다. 마을이 가까워짐과 동시에 인근에 있는 군부대와 버스 안에서 봤던 묘원 입구가 보였다. 또 한 번 생각했다.
사람들은 이곳에 마을이 있다는 것을 알까?
마을 입구에는 마을버스 종점이자 버스정류장이 있었지만, 역시나 배차간격은 30분이었고, 기다리는 사람조차 보이지 않았다.
천보마을의 원래 이름은 상계마을 처음 동교동 4통을 상계마을로 명명하였고, 이후 주민들의 요청으로 천보마을로 바뀌었다. 길게 생긴 하나의 건물에 여러 개의 출입문이 있었고, 이름패와 우편함이 설치되어 있었다. 지붕은 슬레이트였다. 건물 곳곳에 페인트가 칠해져 있긴 했지만, 사람이 살기에는 열악한 조건임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군데군데 비어있는 건물도 보였다. 길과 하천 주변은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경제적 자립을 위해 설치되었다는 작업장 겸 센터와 노인정도 보였다. 이는 2012년 '희망마을 만들기 공모전'과 2015년 '취약지역 생활 여건 개조 프로젝트' 대상지로 천보마을이 선정되면서 나타난 변화들이다. 도시가스 공급관 설치와 소방도로 개설도 이때 함께 추진되었다.
꽤 오랫동안 이런 부분들을 주민들이 관계기관에 여러 차례 지원 요청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의견이 반영되어 실행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다 생활 여건을 ‘개조’한다는 식으로 사업이 진행된 이유는 무엇일까? 건물에 그려진 벽화는 주거환경이 개선되는 차원에서 주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지원은 아니었을 것 같다. 벽화를 그리는 대신 추위를 막고, 통풍이 잘되도록 자재를 변경해 주거나 주민이 나가서 비어 있는 공간들은 함께 무언가를 할 수 있도록 공간을 조성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의 외적인 변화보다는 직접 주민들과 만나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떠한 변화를 맞이하였는지, 현재 삶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등 여러 가지를 묻고 싶었지만, 상계마을에서 천보마을로 이름이 바뀐 연유에는 ‘주민들의 의견이 반영되었다.’는 점을 떠올려봤을 때 말을 건네는 것이 망설여졌다.
2015년 인터뷰 자료에 의하면, 이주할 당시 160여 가구였지만 열악한 환경과 불편한 교통 조건 때문에 많은 주민들이 떠나고 80여 가구만 남았다고 했다. 기억 속에 남은 상계동에 대한 기억을 영영 꺼낼 수 없다는 것이 아쉬웠으나 이곳에 다다르는 동안 이동의 불편함을 몸소 느껴 보았다. 열악한 환경의 집을 보면서 이곳 주민들의 과거 삶을 상상해 보고, 앞으로는 이런 부분에 대해 어떤 실질적 대안이 있을지 고민해 보기도 했다. 무엇보다 현재 상황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 지켜볼 수 있는 시작점을 만들었다는 점에 의의를 두었다.
잠실토지구획과 잠실 체육 조성. 몽촌마을의 해체와 올림픽공원 조성, 도시빈민의 이주와 신시가지 조성(목동, 상계동). 1988년 올림픽이라는 동일한 이벤트로 시작된 새로운 도시공간의 형성과 소멸 과정에서 서로 다른 상황에 놓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들의 상황과 삶을 단순하게 ‘빈과 부’라는 측면으로만 나눠서 해석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국가정책이나 상황에 의해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동해야 하고, 때론 집안 대대로 뿌리를 내리고 살았던 터를 내주고, 잘 형성되어 있던 공동체가 파괴되기도 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정부가 각 상황에 따라 어떻게 대처하고 대안을 마련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선택이 아닌 의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측면에서 변화나 개선이 없다면 어느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현재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의 생(生)이 철거 이주민의 삶과 무엇이 다를까? 미래를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한 현대사회에서 누구나 철거 이주민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 그저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어느 날 갑자기 내 일로 맞이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집’이라는 다소 한정된 공간이 아니라 삶이 펼쳐지는 공간 어디든지, 자신의 발길 닿는 곳에 존재하던 모든 것들이 소멸할 가능성이 있는 세상이다. 닿지 않을 어딘가에 내비치던 그들의 목소리를 발판 삼아 현재를 살아가는 철거민들에게 제공되어야 하는 실질적 대안이 무엇일지 지금이라도 고민하고, 현실에 적용되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길 바란다.
철거민이 본 철거.
“이 자료집은 철거민의 입장에서 철거를 보기 위한 것이다. 무허가정착지가 사실상 사라질 처지에 이른 요즘, 학계에서도 철거민 문제는 이미 과거의 일로 치부되고 있다. 한때 격렬히 철거에 저항했던 사람들의 기억도 점점 흐려 져가고 있다. 그러나 분명 서울의 역사에서 빠져서는 안 되고, 또 서울의 지금이 있게 한 이들의 행적을 통해 우리나라 서민주택정책의 방향을 짚어 보는 것은 중요하다. 특히 철거과정의 애환, 내분의 고통과 연대의 기쁨을 함께 이해하는 것은 ‘집’과 ‘이웃’의 중요성을 깨닫는 길이다.”
“사실 ‘철거’만큼 집단 간에 극단적인 의견차를 보이는 사안도 없다. 누가 잘했고 잘못했고를 따지기에 앞서, 동일한 사실에 대한 해석자체가 다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자료집은 ‘철거민이 본’ 철거다. 정부, 조합, 공권력 등 다양한 집단이 각각의 시각에서 어떻게 보고 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정부는 도시빈민에 대하여 몇 가지 전향적인 정책시도에도 불구하고 대체적으로 이들을 다른 곳으로 내쫓고 철거하는 데 치중했다. 그 결과 독특하게도 우리나라 사회구성에서 노동자, 농민과 더불어 <철거민>이 계층화되었다. 이 현상은 서울을 중심으로 수도권 전역에서 뚜렷이 나타났다. 빠른 산업화와 도시화의 자연적 결과이다. 아무튼 철거민들은 강제철거를 주종으로 하는 폭력성과 전면성 때문에 심각한 주거고통에 시달려 왔다. 대책이 없거나 미진한 상태에서 밀어내기식 철거방식으로 재개발사업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철거민들의 저항과 투쟁은 1960년대 후반 이후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근본적으로 각종 개발 사업을 되짚어 보고 정책전환을 시도하지 않는 한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철거민들의 저항과 투쟁이 이어질 것이다. 철거민은 보는 주체에 따라서 서로 상반된 견해와 입장을 가질 수 있겠다. 그러나 인간의 생존과 직결된 집이 철거되어 주거고통을 당한다면 이것은 정책차원을 넘어서서, 삶의 자리가 뿌리 채 뽑히는 생사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 집은 상품이기 이전에 삶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사)한국도시연구소 발행, <철거민이 본 철거> 내용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