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 글은 저널서울에 기고된 글입니다.
이경민 / 서울수집 운영자(instagrm@seoul_soozip)
다시서점 김경현 대표의 문화와 삶을 잇는 이야기 (1)
책을 읽지 않고 보기만 해도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다. 책장 넘기는 소리, 종이의 향, 손에 느껴지는 종이의 질감이 좋았다. 정제된 문장에서 부드러운 문장으로 넘나드는 책 저자들의 다양한 문장 스타일을 보면서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골라내는 재미가 있었다. 완결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탓에 한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읽다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을 잊기도 했다. 집과 학교를 오가는 길에는 도서관과 서점이 있었기에 책을 읽지 않아도 꼭 들렸다. 그에 비해 연극·공연·전시를 보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극장은 있었지만, 멀티플랙스로 바뀐 이후였고, 뮤지컬, 연극, 콘서트 같은 공연이나 전시를 보려면 다른 도시로 가야 했다. 그래서 책과 서점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각 도시에서 ‘어떤 경험하는가?’에 따라 개인의 생활방식에 영향을 받는다. 개개인의 취향이나 가치관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에서 ‘얼마나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고 누릴 수 있는지’에 따라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결정되며 그 선택의 폭과 기준은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방향성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다 보니 문화적인 측면에서 풍부한 경험을 안겨주지 못하면 자신이 살던 도시를 떠나 다른 도시로 이동하기도 한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도 해당 부분에서 변화가 없다면, 떠난 사람들은 다시 돌아오기가 쉽지 않다. 이런 상황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각자가 살고 있는 도시(혹은 지역·동네)에서 부족한 것들을 채우고, 서로에게 의미 있는 일을 만들며 살아갈 방법은 없을까? 강서구 공항동에서 가수 윤선애가 부른 노래, '다시 만날 날이 있겠죠.'를 동기로 앞 단어 '다시'를 따와 '다시서점'이라는 이름의 짓고 10년 동안 서점을 운영해 온 김경현 대표의 이야기를 들으며 힌트를 얻어 보고자 한다.
Q. 어떤 분이신가요?
강서구 공항동에서 독립서점 다시서점을 운영하는 김경현입니다.
Q. ‘다시서점’을 시작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별생각 없이 시작한 것 같으면서도 여러 가지가 함축되었던 것 같아요. 첫 직장은 김포공항 이마트에 있던 음반점이었고, 1년 일하고 군대에 갔어요. 대학 졸업하고 나서 회사 다니다가 그만두고, 독립 출판을 시작하게 되었죠. 음악 듣는 것,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런 것들의 총합이 서점이나 음반점이었어요. 서울 외곽이 다 비슷하겠지만, 특히 여기는 논밖에 없으니까 어렸을 때 놀 게 없는 거예요. 하지만 작은외삼촌이 동네에서 서점을 한 10년~15년 정도 하신 덕분에 책 읽는 게 자연스러웠거든요. 유년 시절 ‘서점’이라는 공간과 친숙했던 영향이 컸고요. 지금은 독립서점이 많지만, 제가 다시서점을 시작할 때는 별로 없었어요. 전국에 10개가 안 됐거든요. 독립출판물을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늘어나는데 유통할 곳이 없으니까, 그런 곳을 만들어서 유통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서점에서 책도 많이 읽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고요.
종로4가 지하상가 청년몰 사업 지원받아서 시작하게 되었죠. 대부분의 청년몰이 그렇듯 유동 인구가 별로 없는 곳에 가게를 개점하는 식으로 진행되는 방식이었어요. 몇 개월 있다가 저를 포함한 다른 팀은 나왔어요. 한두 달 정도 서울 전역을 걸어 다니면서 ‘어디에 서점이 있어야 좋을지’를 고민했죠. 당시 한남동에 살고 있었는데 근처에 있던 바(BAR)사장님이 맥주 마시러 놀러 오라고 하셔서 자주 갔었어요. 그런 저에게 ‘그렇게 돌아다니지만 말고, 같이 뭔가를 해보자. 낮에는 서점을 하고, 밤에는 바(BAR)를 하면 공간을 24시간 운영할 수 있고, 낮에 왔던 사람이 저녁에도 오고, 저녁에 왔던 사람이 낮에도 가지 않겠냐.’고 해서 서점을 열게 됐어요. 거기서 6~7년을 같이 하다가 코로나가 터지면서 정리하고 방화동으로 온 거죠.
Q. 종로4가-한남동-방화동-공항동으로 이동했는데 동네마다 어떤 차이점이 있었나요?
종로4가
종로4가는 할 이야기가 별로 없어요. 지하 귀금속상가에 있었고, 주로 한복과 귀금속 가게가 있는데, 사장님들하고만 마주하게 되거든요. 사장님들에게 배운 점이 한 가지 있다면, 손님이 있든 없든 가게가 열려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어요. 당시 아침 9시부터 저녁 9시까지 일하고 퇴근했었어요. 이때는 종로, 을지로에 사람이 많이 몰리지 않을 때여서 주로 방산시장이나 청계천 산책을 많이 했어요.
한남동
이태원 제일기획 뒤에서 바(BAR)와 같이 운영되었어요. 독립출판 붐이 조금씩 생겨날 때였고, 제일기획이 가까이 있으니, 직원들이 많이 왔었어요. 이외도 이태원이 관광지다 보니 관광객들도 놀러 왔었어요. 문이 닫혀 있어도 열고 들어왔거든요. 20대~30대 초반 여성분들이나 이태원·한남동 사람들도 왔어요. 아마 ‘나인원 한남’ 생긴 이후 한남동과는 다를 거예요. 당시에는 큰길에만 가게가 있었고, 사잇길에는 별로 없었거든요. ‘힙스터’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가게를 많이 돌아다녔고, SNS도 활용도 활발하게 시작할 때였어요.
이태원 계단장을 열었던 우사단 마을 기획자들부터 한남동에 있는 사람들이 다양한 행사를 열었고, 그런 흐름과 같이 편승한 면이 있는 거죠. 지역 서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지역 서점 하는 사장님들과 결이 조금 달랐어요. 페이스북에 문제집을 팔아야 하는 건지 고민돼서 글을 올렸었는데, 진주문고 대표님이 문제집 판매가 쉽지 않으니, 전화로 ‘안 팔았으면 좋겠다.’며 조언해 주시는 것을 듣고, 지역 서점과 그 당시 다시서점은 조금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이후 한울 출판에서 나온 <서점 대 서점>이라는 책을 보면서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지금은 서점에서 문화행사도 하고, 다양한 물건을 팔지만, 당시에는 문제집 파는 서점 정도밖에 인식을 안 했었어요. 금호동에 서점연합대표를 하시던 분이 있었는데, 핸드폰과 책을 같이 두고 팔고 있더라고요. 지하에는 문제집을 비치해 두고 있었고요. 지금 생각해 보면 이분들이 앞서갔던 것이 아닐까 해요. 생존의 문제니까요. 이후에 일본 서점 모델이 번역되고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이 서점에 관심 두기 시작한 것 같아요. 작은 서점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가 대부분 2년 만에 문을 닫았죠. 서점이라는 공간에 다들 조금씩 환상이 있었잖아요. 친구들도 여러 곳에서 서점을 열었다가 닫았어요.
서점으로 생존하는 것은 어려워요. 한 달에 3,000권 이상 팔아야 300만 원 정도 수익이 나는데, 그 정도 팔리려면, 관광지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주도와 경주가 있긴 한데, 제주도는 많이 생겼고, 경주 분들이 제일 잘된다고 들었어요. 관광지니까 사람들 지갑이 쉽게 열리잖아요. 하지만, 동네 상권에서 뭔가를 하긴 어려워요. 유동 인구가 없으니까요. 이태원에서 오래 할 수 있었던 것도 코로나 터지기 전에는 사람들이 ‘놀러 가자’ 하면 홍대·이태원이었으니까 유동 인구가 많았던 거죠. 책 입고가 늘고, 온라인 몰도 운영하다 보니 재고를 둘 창고가 필요했고, 방화동에 지하를 구해서 옮겨 둔 거죠.
방화동
한남동은 온라인 몰에서 판매하는 제품의 매장 겸 쇼룸처럼 쓰다가 이후 방화동으로 완전히 오게 되었습니다. 방화동에 서점이 한 군데 있는데, 문제집을 파는 곳이에요. 사람들이 와서 책 편하게 읽고 갈 수 있는 서점이 없는 상황이었어요. 강서구에 문화공간도 부족했고요. 그래서 ‘지역 서점을 해야겠다. 이런 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동안 다른 지역에서 배운 것을 강서구에서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Q. 특별히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서점 손님으로 만난 친구가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도 다녀오고 요즘도 종종 서점을 찾아주는데 반갑지요. 특별한 에피소드라고 하면 자영업자 분들 대부분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르실 거예요. 그래도 앞서 말한 손님들이 버티는 힘이 되어주는 것 같아요. 제가 왜, 어떤 마음으로 서점을 운영하는지 알아주는 고마운 분들이죠. 그 손님이 다시 서점에 올 때까지 잘 버티고 싶고요.
Q. 방화동에서 서점 운영하면서 처음에 계획했던 것과 달랐던 부분이 있나요?
방화동은 제 고향이기도 하고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문화적으로는 소외되어 있어요. 개화동, 방화동, 공항동 등 서울 서쪽 외곽 지역은 동네 모두 시민들이 누릴 수 있는 문화예술 향유가 부족했어요. 그래서 서점을 열었을 때 반가워하는 분들도 많았어요. 을지로나 해방촌에 있어야 할 것 같은 서점이 우리 동네에도 있다면서 매번 다른 친구들을 데리고 오는 분들도 있었고요.
강서구로 거점을 옮기면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건 일부 시민과 기관들이 서점을 대하는 태도예요. 용산구에 있을 때는 많은 기관이 뭔가를 함께하고자 했었는데 여기서는 ‘왜 서점이 그런 걸 하느냐’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어디서는 당연한 일이 여기서는 의아한 일, 뭔가 이유를 감추고 있는 일처럼 의심을 사기도 하고요. 지역에 관심 두고 일하면 다들 정치적으로 보거나 정치인이 되려고 그러는 거 아니냐고 쏘아붙이는 분들도 있어요. 제가 정치인이 되거나 말거나, 그게 무슨 상관인지 잘 모르겠어요. 정치인들이 이런 일을 하는 거라면, 이미 했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왜 한낱 서점도 하는데 자기들은 안 하는 걸까요.
Q. 서점 10주년 책 타이틀이 「서로에게 의미 있는 것」이던데, 앞서 말씀 주신 맥락과 닿아 있는 것일까요?
작년에 ‘서점이 왜 필요하냐? 서점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라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서점뿐 아니라 어떤 공간이든 서로에게 의미 있는 공간이 있잖아요. 예를 들면 동네 구멍가게가 될 수도 있고요. 하지만 서점에는 일단 다른 물건보다 책이 있으니까요. 책은 그런 것들의 총합 같은 느낌이거든요. 누군가는 서점만 그런 거 아니라고 말하더라고요. 이해는 하는데, 저한테는 서점이 그런 존재이고, 문화예술 경험이 퍼지는 것의 기초 단위가 텍스트라고 생각하거든요.
책은 문화와 예술 경험의 기초 단위입니다.
프랑스, 독일처럼 서점 개업할 때 무이자로 대출해 주거나 지속적인 지원하는 것까지 바라는 것도 아니에요. 최소한 할 것만 좀 잘했으면 하는 거고, 서점지원 예산이 작년에 11억이었는데 전액 삭감했다고 떠들지만, 서점 입장에서는 있으나 없으나 똑같거든요. 운영하는 담당자들은 같은 생각을 해요. 100만 원씩 지원해 주면서 증빙하라고 하는데, 강사비, 디자인비로 다 나가고, 서점이 갖는 수익은 없어요. 그런데 기관은 수익이라고 하고, 종합소득세 신고할 때 합친 소득으로 계산해야 합니다. 서점은 수익으로 남는 것이 없어요. 오히려 마이너스죠. 그럼에도 ‘서점에서 이걸 왜 할까?’를 생각해야 하는데, 사람들은 단편적으로 ‘지원금 100만 원 받았잖아.’라고 밖에 못 받아들여요. 이런 맥락에서 서점 운영하시는 분들이 공간 지키는 이유가 있는 거고, 그런 부분에 대해 10년 동안 썼던 글을 담아낸 거죠.
Q. 어떤 분들은 ‘꼭 의미가 있어야 하나? 굳이 의미부여하지 말자.’ 라고 할 때도 있거든요. 그런 분들에게는 어떤 말로 답을 할 수 있을까요?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환타를 엄청나게 좋아하거든요. 먹을 때마다 농담처럼 하는 말이 있어요. 나치의 맛이 느껴진다고요. 환타는 히틀러가 만든 거거든요. 농담처럼 이야기하는 거지만 맥락이 있잖아요. 예를 들면, 여기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시내가 영등포였거든요. 버스 타고 40분에서 1시간 걸려서 영등포역 앞에 내려서 경방필백화점을 갔는데, 그게 지금의 영등포 타임스케어거든요. 그렇다면, ‘경방필은 어디 갔을까?’를 생각해 볼 수 있고, 경방필을 운영하는 경방 그룹 창업주는 친일반민족행위자였거든요. 사람들은 그런 거 상관없고 타임스퀘어 짓고 나니 ‘예쁘다.’고 하면서 사진 찍고, 친일파 욕하면서도 그 공간에서 돈을 쓰잖아요. 모순이죠. 의미 없이 그냥 지나가야 할까요?
기본적으로 어느 공간을 가든, 뭔가를 소비하든 최소한의 맥락이 있잖아요. 역사·사회·문화에 관심 많은 사람은 역사적 맥락일 것이고, 브랜드를 좋아하는 사람은 취향을 쫓아가는 일인데, 저한테는 똑같이 느껴지거든요. 예전엔 음악 들으려면 앨범 사서 펼쳐보고 참여한 사람은 누구인지 찾아서 들었는데, 요즘은 한번 듣고, 끝이잖아요. 책도 마찬가지고 사람들이 단순하게 생각하는 걸 좋아하는 거 같아요. 생각하며 살기 힘든 시대이기도 하고. 환타는 나중에 코카콜라에 인수되었어요. ‘소비를 왜, 어떻게 하느냐는 어떻게 살아가느냐’와 같은 말이라고 생각해요.
Q. <다시 서점>은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 같나요?
서점에 놀러 오거나 인터뷰하러 왔던 사람이 나중에 등단해서 시인이 된 모습을 본 적 있어요. 다른 기관에 문화예술 교육을 하면서 만난 친구가 같이 수업하면서 행복해하는 모습도 보기도 하고요. 그냥 놀러 오시는 오래된 손님도 있어요. 그런 분들이 오셔서 어찌 됐든, 어디에서든 다시서점이 있을 걸 아니까 놀러 와서 같이 나이 들어가는 것들이 있는 거죠. 제가 엄청 나이가 많은 건 아니지만, 조금 더 겪어 봤다고 고민 들어주거나 술을 같이 마시거나 맛집을 알려주면서 웃고 떠들고 성장하는 모습을 옆에서 보거나 대화를 나누다 보면 저에게도 자극이 돼요. 어떤 공간이 사람들을 모이게 하고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것보다는 하나의 ‘계기’라는 것에 초점 맞춰서 갈 수 있는 것 같거든요.
저는 중학생 때부터 홍대·신촌에 매일 놀러 다녔는데,
그때의 경험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습니다.
저는 중학생 때부터 홍대·신촌에 매일 놀러 다녔는데 그때 라이브 클럽이 엄청 많았지만 지금은 다 사라졌잖아요. 당시에 활동했었던 것들이 기반이 돼서 많은 인디뮤지션이 방송에 나오고 조명을 받았잖아요. 자우림, 크라잉넛 이런 분들이요. 요즘, 크라잉넛을 누가 인디밴드라고 하나요? 메이저이죠. 이런 분들이 성장한 건 ‘홍대·신촌’이라고 하는 활동의 기반이 된, 그때 그 장소가 계기가 된 거잖아요. 그런 지점에서 의미가 있을 거로 생각해요. ‘시작’하는 곳, ‘계기’가 된 곳이요. 예전에는 인터뷰 요청이 오면 많이 했었거든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올 것 같았어요. 근데 언젠가부터 잘 안 해요. 미디어를 보고 더 많은 손님이 오는 것도 좋지만, 다시서점을 좋아하는 손님이 한 분이라도 더 오셨으면 좋겠어요. 대신 학생들이 요청하면 해줘요. 어렸을 때 장래 희망이 카피라이터였거든요. 음반 속지에 글 쓰는 것도 하고 싶었고, 그걸 쓰시는 분에게 이메일로 어떻게 하는지 물어보고 했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니 무례한 행동인데, 그분이 친절하게 답변을 해주었어요. 그런 경험이 쌓이면서 그런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겉으로 봤을 땐 무뚝뚝해 보이고 말을 건성건성 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아이들에게 친근하게 대하는 친절한 어른이 되어야겠다고요. 살면서 그런 어른을 많이 못 봐서 그럴 수도 있어요. 결핍이 뭔가를 만들기도 하니까요.
서점이 왜 필요하냐고 묻는다면, 저는 그저 책이 주는 모든
것들이 필요하다고 답할 것입니다.
피플 앤 더 시티(People and the City)
살면서 우리는 각자 살고 있는 도시를 가깝게 마주할 기회가 얼마나 있을까요? 먹고 사는 일이 바쁜 현실 속에서 마음을 쓰고 들여다본다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먹고 사는 일’ 안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행위가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나요?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지나쳤던 것들이 나의 이웃과 나의 삶에 작은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데도 계속 무관심할 수 있을까요? 여기, 자신이 발 딛고 살아가는 ‘터’에서 어떠한 지점으로부터 삶이 연결되는지를 깨닫고 도시를 마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도 처음부터 알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겠지요. 다만, 그 깨달음을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고, 도시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과 이슈를 더 이상 모른척 하지 않습니다. 각자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지역에서, 그리고 도시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목소리를 냅니다. 이들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의 삶 속에서 도시와 개인의 삶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발견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