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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단주택지는 어떻게 불하되었을까?

영단주택 탐구생활 ➀

by 이경민

문래동 영단주택지를 처음 접했을 때, 왜 여기에 영단주택지가 형성되었는지 궁금해서 역사적으로 이 일대의 공간변화를 하나씩 살피기 시작했다. 초반에는 영단주택지와 영단주택지로서 형태만 집중해서 보다가, 1942년에 조성된 주택지가 남아있음으로써 인해 문래동의 정체성이라든지, 지역성을 형성하는데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에 대한 부분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또, 영단주택지 거주자가 주로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살피는 과정에서 그 중 일부는 영등포 공업지대 노동자를 대상으로 지어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전 공장자리가 아파트단지로 변해버린 지금 상황을 놓고 보면, 영등포가 공업지대였음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라는생각이 들었다. 또한 더 이상 주거지가 아닌 철공소로 변한 것이 어쩌면 공업지대와 연결될 수 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변화가 아니였을까 생각해본다.

도림정(문래동 영단주택배치도), 출처: 네이버블로그에 있던 포스팅사진(https://blog.naver.com/zelkova927/222519499079)

지금처럼 한강 위 다리가 많이 없던 시절, 영등포는 한강을 건너야 닿을 수 있는 곳이었고 그때만 해도 영등포는 서울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인구도 지금처럼 많지않았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시작으로 서울로 편입되기 까지 인구도 많이 유입되고 공업지대로 성격이 변하면서 도시로써의 영역이 확장되고 번화가가 되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일제강점기- 해방이후 - 미군정 - 2000년대 초까지) 영등포는 공업단지로서 역할을 계속이어갔고, 그런 탓에 사람들의 인식이 크게 변하진 않았다. 그러니 서울 도심부에 비해서 변화되는 속도도 느리고, 도시경관도 큰 변화가 없었다. 이 부분은 영등포지역 과거 사진이나 자료를 뒤적거리다 보면 쉽게 알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일제강점기 때부터 있었던 맥주회사 공장 모습이 2000년대 초반 사진 속에서 등장하는 것으로 쉽게 알 수 있다.

OB맥주공장 모습(2002년도), 사진출처: 영등포구청

그런 공장의 노동자들이 거주할 목적으로 문래동 영단주택지가 조성되었던 것이고, 주택지로써 계속 기능해오다가 어느 시점부터 철공소로 바뀌었다. 영단주택지가 철공소로 바뀌기 시작한 시점은 정확하진 않지만 1960년대 후반로 추정된다. 그때 부터 계산해 보면 얼추 60년이 지났으니 꽤 시간이 흘렀다. 근데, 주택가로 조성된 영단주택지는 언제부터, 어떤 이유로 주택지가 아닌 철공소로 변하게 되었을까? 왜 바뀌었을까? 사람이 살기 좋은 환경이 아니었던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일단 영단주택지 내에서 남아 있는 주택가 흔적을 샅샅히 찾아보기 시작했다.


주택가 흔적 찾기

가정집 흔적은 철공소 건물을 자세히 보면 곳곳에 남아있다. 집 대문자리가 철공소 출입구가 되었지만 기둥은그대로 남아 형태를 유지하고 있거나 수도를 사용할 때설치했던 수도꼭지가 보였다. 이건 새로 설치한 것인지확인이 필요해 보인다. 문래동3가쪽에서는 예전에 달아두었던 문패도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용도는 바뀌었지만 이전의 것들을 완벽하게 없애지 않았기에 과거 주택가였음을 인지할 수 있다. 더군다나 외형조차도 그대로 남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내부는 철공소로 사용되면서부터 예전 구조를 알아볼 수 없지만, 외관이라도 남아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철공소가 대부분 사용 중이지만, 주택의 형태가 남아 외관상으로 쉽게 알아볼 수 있다.

1940년대 지어진 주택이 어떤 과정을 거쳐 개인에게 불하되었을까? 해방 이후, 미군정시기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영단주택의 소유자는 어떻게 변해왔을까?그 이전에 해방 이후 누가, 어떻게 해당 주택(자산)을 관리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큰 흐름을 살펴보기 위해 부평역사박물관 발간 자료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해 보았다.

1) 1945년 8월 종전
종전 후 조선주택영단은 미군의 관할하에 학무국 사회과에서 관리하였다. 그해 10월 17일에 미군의 관리관으로 임명된 로슨소령의 감독하에 일본 측에서 조선 측으로 조선주택영단의 인수인계가 이루어졌다. 야마다 이사장, 이케 기요시와 사이토 다다토 두 이사가 퇴임하고, 문상우 이사장, 이원식 이사가 취임했다.

2) 1946년 6월 ~ 1948년 8월 15일 : 조선주택영단 -> 대한주택영단
조선주택영단은 일본인 소유의 가옥인 전산으로 간주되어 경기도 적산관리소의 관할로 이관되었다. 조선주택영단이 이후로는 그 자산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게 되었다. 그 후 1948년 8월 15일에 조선주택영단은 경기도 적산관리소에서 중앙관제소 관할로 이관되고, '조선주택영단'에서 '대한주택영단'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3) 1950년 6월 25일~1954년 2월
6.25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는 일제강점기부터 있었던 영단사옥이 전화에 휩쓸려 그때까지 있던 서류는 모두 불타버렸다. (1945년에는 일본인의 손에 의해 대부분 소각되었다.) 한국전쟁이 일단정지된 1953년 2월에 대한주택영단은 사회부 관할로 이관, 1954년 2월에는 대한주택영단은 조선주택영단의 성격에 대해 법제국에 규명 질의서를 제출하였다. 이후 대한주택영단의 독자적 판단으로 자산처분이 가능해졌다.

4) 1955년 2월 16일
대한주택영단은 사회부에서 보건사회부로 관할이 이관됐다.

1945년부터 1955년 약 10년간의 변화를 큰 흐름에서는 알 수 있으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4년 뒤인 1959년에는 조선주택영단 시기에 건설된 주택에 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주택분양요구 운동이 있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미 불하절차가 진행되었다는 말인 것인가? 아니면, 거주민들이 불하를 요청한 건데, 이 거주민들은 누구인가? 이 사람들은 어떻게 영단주택에서 거주할 수 있었던 것인가? 아쉽게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어 않다. 그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이 시기부터 구조선주택영단시대에 건설된 임대 주택은 원칙적으로 그때 살던 거주자에게 매각이 시작되었다.'라는 설명을 근거로 일시적으로 임대, 거주하다가 본격적으로 불하된 형태로 밖에추청해볼 수 없었다.

1959년, 조선주택영단 시기에 건설된 주택에 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주택분양요구운동이 일어났다. 그해 1월 29일에 서울 영등포 지역의 상도동 외 4개 동 1,300세대 주민에 의하여 '주택 분양촉진 연합대책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이에 따라 대한주택영단도 분양을 검토하기 시작했고, 다음 해에는 그 가격을 제시하는 단계까지 갔다. 그러나 문래동, 대방동의 구 조선주택영단주택 주민들은 제시받은 분양 금액이 고액이라서 9월에 데모를 일으켰다. 그런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이 시기부터 구조선주택영단 시대에 건설된 임대주택은 원칙적으로 그때 살던 거주자에게 매각이 시작되었다.

p115, <산곡동 87번지 부평영단주택>, 부평역사박물관

데모를 일으켰다기에 신문에 한 줄이라도 기사가 났을 것 같아 기사를 보니 1960년 9월 1일 자 조선일보에 해당내용을 찾을 수 있었다.

"분양금 싸게 해라."
영단주택 입주자들 데모
일일 장 오 서울 중구 소공동에 있는 대한주택영단 앞에서 영등포 문래동, 대방동 주민 약 50명은 '생명다음은 주택이다.'라는 푸라카드를 내어 걸고 연좌 데모를 했다. 주택영단이 지은 세 궁 민주택에 입주한 이들 부인네들의 주장은 영단의 입주분양금이 비쌀 뿐 아니라 강제로 불하하여 내 쫓기게 된데 대한 부당성을 호소하는 것이었는데 영단 측에서는 이날정오현재 간부들이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1960년 9월 1일 자, 조선일보 (링크: https://buly.kr/AljgRCe)

주택불하시기는 얼추 1950년쯤으로 추정된다. 해당부분에 대한 내용은 1950년 5월 9일 자 동아일보 기사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주택연고자, 사회부서 선정

귀속재산 불하에 대한 사무절차는 관재청에서 할 것이나 이 귀속재산 중 특히 주택에 있어서는 그의 연고자를 결정함에 있어서 사회부장관이 선정할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사회분에서 하는 일은 주택에 대한 연고자선정문제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주택에 관한 기업체 즉 주택영단이든가 건물회사등에 속하는 주택도 사회부에서 처리할 것이라고 한다.
1950년 5월 9일 자, 동아일보 ( https://link24.kr/4FreqoJ)

문래동이 철공소로 변화된 것은 1960년대쯤 청계천일대에 도심 재개발이 시작되면서 청계천 사람들이 이주해 오면서부터라고 전해져 온다. 하지만, 공장 입주 시기가 문래동 1가부터 6가까지, 구역별로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문래동 4가 경우, 비교적 늦게 철공소가 입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아래 사진 때문이다. 1979년 문래동 4가에서 촬영된 것으로 철공소로 변하기 이전 모습이다.

이러한 부분은 도서 <문래의 언어>에 실린 주민인터뷰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문래동에 공장이 들어온 시기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이 조금씩 다르다.

"공장들은 84년도부터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주택이었고..." p174
"86년도에 들어왔으니까 87~8년 정도까지는 가정집이 그래도 많았어요. 2~3년 되니까 가정집들이 나가고 공장으로 바뀌게 된 것 같아요....(중략)..." p184(한양슈퍼)
"내 기억으로는, 2가쪽, 철도 쪽이 있는 게 2가인데, 그때만 해도 2가에는 공장이 많았는데 4가쪽에는 많지 않았거든요. 그 당시에 청계천에서 이쪽으로 몰려올 때가 거기 공사하면서 청계천에 있는 사람들이 문래동으로 많이 왔어요. 오래돼서 연도를 정확하게 기억하기가 어렵네요. 그렇게 하다가 점점 늘어서 여기가 공장지대가 되었죠.."
"그땐 여기가(문래동 4가) 공장이 별로 없었어. 2000년 전에는 공장이 많이 없었어. 2000년 전후로, 1995년 후로 하나 생기고, 조금씩 늘어난 거지. 내가 아마 1976년부터인가 통장을 시작했거든, 저쪽부터 시작해서 두 줄(거리)이 한 반, 총 8반이 있었어. 그 8반을 움직이는 통장이 한 명이야."
"예전엔 집 한 채에 막 몇 명씩 살던 저런 곳들이. 공장 되면서 일하는 사람 한 두 명이 전부이고." p104
"공장들은 84년도부터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주택이었고..." p174
"변한 건, 공장으로 변한 거 말고는 없죠. 그리고 저기 5가 6가는 공장이었는데 아파트로 되었고, 문레동이 예전에 남성, 삼환아파트 자리, 거기가 다 개천이었어요. 그래서 이쪽에는 수도가 들어왔었는데 그쪽에는 판자촌이었죠. 공동수도를 썼었고. 공동화장실을 쓰고, 여기는 영단주택이어서 집집마다 화장실이 다 있지. 영단주택이 옛날에는 고급주택이거든요." p179
"86년도에 들어왔으니까 87~8년 정도까지는 가정집이 그래도 많았어요. 2~3년 되니까 가정집들이 나가고 공장으로 바뀌게 된 것 같아요....(중략)... 그때는 가정집이 필요한 거. 집에서 미원, 다시마, 밀가루 같은 가정에서 많이 쓰던 게 많이 나갔죠. 처음에 장사할 때는 여기서 콩나물도 팔고, 두부도 팔고 그랬어요. 처음에 장사할 때는 공장이 없었으니까. 가정집이 나가니까 그다음부터는 그 물건들이 안 나가는 거예요." p184(한양슈퍼)
문래동 영단주택지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을 대상으로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 영상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ICA4DOkWWw0


영단주택지는 왜 철공소로 변화되었을까?

영단주택의 불하과정과 불하된 대상도 궁금하지만, 이쯤 되면 주택가였던 영단주택지에 공장이 들어오게 된 이유도 궁금해진다. 바뀐 건 알겠는데, 왜 하필이면 영단주택지였을까?


"갑자기 공장이 왜 들어왔죠? 신기하게"

"응? 하나하나씩 들어오기 시작했어. 내 생각엔 여기가 언덕이 없고 그러니까 평지야. 그러면 움직이기도 좋고, 운반하기도 좋고. 그리고 양남동도 공장 있고, 영등포도 가깝고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중심지였어. 이 4가 안에, 몰라서 그렇겠지만, 탱크 부속품도 만들고 총부속도 나오고, 자동차 부속도 나오고, 안 나오는 것이 없어. 각종 부속들이 한 군데서 만드는 게 아니라 여러 군데서 만들어서 모이잖아. 그런 것들이 지금도 여기 다 있어. 배에 들어가는 물건, 자동차에 들어가는 물건, 어디 안 들어가는 것 없이 저쪽엔 핸드폰 만드는 공장도 있고, 케이스공장 등등 사람이 많이 살았던 지역에 공장들이 하나씩 들어오니까 사람들 이사 가고, 철거민들이 많았는데 다 떠나고, 예전에는 아침에 애들 학교 보낸다고 빡빡했는데, 여기가 회사 출근하는 사람들 몇 백 명들이 일하고, 방림방적도 몇 천명이 있었는데 예전엔 얼마나 좋았겠어."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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