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인덕원 집만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도시의 가치와 의미는 누가 만들어가는가: 인덕원 489 영인님 인터뷰 ①

by 이경민

인덕원 489 사례는 한 개인이 구축 건물을 직접 수리며 쌓아간 생각의 흐름과 구체적 실천을 통해 '도시의 가치와 의미는 누가 만들어 가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하지만 건물 관리인(혹은 부모님이 건물 소유주)이라는 특수한 위치와 수입의 원천이 불로소득이라는 지점에서 왜 이 사례가 도시의 가치와 의미를 만드는 것인지 이해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건물이 오래되고 엘리베이터 없고
주차도 안 되는 가치가 없는 건물’이라
생각하며 임대했던 거죠.

근데 저는 인덕원 집만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인덕원 집의 장점을
엄마가 생각해 보지 못한 방법,
다른 방법으로 적용하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비용을 많이 안 들이고
집을 어떻게 할지 찾아본 거죠.


개인적으로 건물 소유주의 마인드에 따라 건물의 가치는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위에 언급된 말로써 인덕원 489를 관리하는 영인님의 마인드를 엿볼 수 있다. 영인님은 왜 부모님과 다르게 생각할까? 어떤 지점에서 차이가 나는 것일까? 어쩌면 부모님과 영인님은 다른 시대를 살아왔고 다른 경험을 했기 때문에 당연히 그런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아 이 차이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구체적 경험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어 인터뷰를 진행했다. 과연 인덕원 489를 관리하는 영인님은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일까?


특히 자본과 투자를 전제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인덕원 489를 두고 건물에만 한정하는 것이 아닌 동네와 지역으로 범위를 확장해 넓게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도 인상적이다. 생각이나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닌 행동하면서 고군분투한 과정들이 어떻게 차별점을 만들어가는지 영인님의 지나온 삶과 현재의 여정을 따라가 보고자 한다. 아래 질문을 같이 연결해서 보면 참고가 될 것이다.

1) 개인의 어떤 경험이 건물 관리하는 방법 다르게 하려는 지점과 연결되는가?
2) 그 과정에서 어떤 지점을 고민했는가?
3) 임대인과 임차인의 관계 설정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4) 기존과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임대수익을 얻고자 하는가?
5) 그래서 무엇을 했고 어떤 지점을 발견했는가?

**참고: 인터뷰로 한 사람의 생을 따라갈 때 전반적인 내용을 인터뷰어가 취사선택해 전달하면 그 삶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최대한 자세히 반영했다. 따라서 인터뷰 내용이 길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차곡차곡 쌓다: 자원활동-국제개발협력-아시아청년교류사업-자영업

일본 문부성 프로그램에 참여해 자원 활동을 하셨다고 들었어요.

세계장애여성대회에서 자원 활동하다가 유네스코 자원활동가워크숍을 소개받고 참석했는데 거기에서 일본 문부성 주관 아시아 자원활동 프로그램 정보를 듣고 지원해서 다녀왔어요. 히로시마 시내에서 2량 무인열차로 1시간 정도 가면 ‘무카이하라’라는 농촌 마을이 있어요. 10개월 정도 농가에 살며 장애인 작업장에 출퇴근했었죠. 자원활동이었지만 직원과 똑같이 일했어요.


라오스에 있는 마을 사업에도 참여하셨었다고요.

10년 계획으로 진행한 방비엥 푸딘댕 마을 프로젝트 3년 차에 합류했어요. 라오스 방비엥 푸딘댕 마을에 사는 타농시 아저씨가 지역 아이들을 위한 교육사업을 하셨거든요. 그 사업을 토대로 AVAN(Asia Volunteer Action Network)이 청소년 센터와 커뮤니티 센터를 짓고 운영했고요. 교육 사업으로 빈곤 문제를 해결하고 언어가 다른 세 부족의 아동과 청년들의 관계 개선으로 마을의 갈등을 줄이는 것이 목적이었어요. 저의 목표는 청소년들의 자율, 자치, 자립이었고요. 도서관, 동아리 활동(전통춤, 전통 자수, 자연보호), 영어 교실(전 세계 여행자 참여) 프로그램 운영과 인근 2개 마을을 포함한 마을 사업(한국, 스페인, 일본의 대학 및 민간 봉사단 코디네이션)을 맡아서 했었어요.


평소 장애인이나 마을 사업에 관심이 많았던 건가요?

어릴 때부터 스스로를 ‘마이너 한 사람, 소수자’라고 생각해서 주류보다 소수에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닐까 싶네요. 대가족을 이루고 있던 환경에서 성장했기에 돌봄에 익숙한 것도 있을 거 같아요. 장손녀라 어릴 때부터 조부모님 식사를 챙기고 사촌들, 조카들을 돌보는 게 무척 익숙하거든요. 또 장애 여부를 떠나 다양한 사람을 접하게 된 것도 영향이 있을 것 같고요. 타의로 입시를 치르고 왜 대학에 다니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던 채로 겉돌다가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를 알게 되어 장애우대학이라는 코스를 이수하고 여러 활동을 했죠. 개인적으로 매주 중증장애인거주시설에서 밥, 목욕, 빨래 봉사를 했어요. 라오스 마을사업은 직장에서 퇴직을 고려하고 있을 때 때 마침 라오스 현장에 이슈가 있어서 제가 가겠다고 지원했고요. 현장 일에 대한 걱정이나 겁은 없고 지역에서의 활동을 선호했던 거 같아요.


일본과 라오스에서 자원활동, 마을 사업을 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에서는 어떤 일을 하셨는지 궁금해요.

일본에서 돌아와 취업 활동을 하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일반 회사는 안 맞는 거예요. 청담동에 있는 마케팅 회사에 면접을 통과했는데 뭔가 너무 이질감이 들어 양해를 구하고 안 갔어요. 지금은 많이 극복했지만 그때는 모든 것에 자신이 없었어요. 매일 정장하고 힐 신고 출퇴근하는 것마저 부담스럽고 염려되는 일이었던 거 같아요. 그 후에 시민단체 교육 담당 간사, 협동조합 활동가, 궁궐 해설사로 일하다가 라오스에 가게 된 거고요.


라오스에서 돌아와서는 카페를 3년 운영했는데 건강이 나빠져 정리했어요. 그때 엄마가 치매이신 할머니를 혼자 돌보는 게 너무 힘들다고 하셔서 부모님 댁으로 내려가 엄마를 도우며 집에서 멀지 않은 공공기관에서 강소농 지원 업무를 했어요. 그러다가 서울대학교에서 해외 자원봉사 파견 업무를 담당했고, 평화교육 민간단체에서 사무국장을 하고, 서울시 청년 사업 중간지원단체에서 아시아 청년 레지던시 프로그램 AYARF를 했어요. 남들은 다 다른 일을 했다는데 저는 같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큰 강줄기 안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는 거죠. 지금은 일을 안(못) 하고 있고요.


원래 봉사하는 삶이 지향점은 아니었던 건가요?

아니에요. 그냥 인간 자체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거 같아요. 그렇다고 해서 정치나 사회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무지하죠. 내 마음으로 시작되는, 인간의 마음 깊은 곳이 궁금했어요. 뭔가에 관심 있다거나 뭘 하고 싶다는 것보다 그냥 착한 사람으로 사는 게 목표였어요. 여기서 착하다는 건 ‘천사 같다’는 의미가 아니라 ‘시민 의식이 있는’ 정도가 아닐까 싶어요. 같이 잘 살았으면 좋겠고요.


의미가 깊네요. 장애 분야에서는 일을 한 건 아니네요.

장애 분야에서 자원활동을 많이 했었죠. 그러다 국제자원활동으로 넘어가게 되어요. 유네스코 자원활동가 워크숍에 참여했다가 사업 담당 언니가 국제자원활동 기획팀 같이 해보지 않겠냐 해서 시작했죠. 국제사업이라 영어가 필수인데 저는 그런 실력이 안되었지만 다른 부분으로 좋게 봐주어 덕분에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 거죠. 다만 심적으로는 많이 힘들었었어요. 다른 이들에 비해 제 인생이 너무 못난 것 같은 자격지심이 들었거든요. 외국인 100명 앞에서 영어로 어나운스를 해야 하는데 못해서 뛰쳐나가 하루 종일 울고…. 힘들었지만 20대 때 경험한 게 다행이다 싶어요. 덕분에 나중에는 더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사람의 중심을 더 보게 되었고요. 여기서 중심은 생김새, 배경, 색 같은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지 않는 그 사람의 고유성이랄까요. 보이는 것 너머의 그 사람의 내면이요.


일본어를 잘하셔서 통번역 일을 하신 줄 알았어요.

일본에서 귀국한 뒤 일본어능력시험 1급을 따고 궁궐 일본어 해설사로 일한 경험이 있어요.


카페는 어디서 운영하셨던 거예요?

숙대입구역 굴다리 지나 오른쪽에 철공소와 삼일교회가 있는데 그 사이에 있었어요. 교회 후배가 오픈하고 제가 라오스에 있을 때 ‘카페 해 보는 거 어때? 언니도 이제 먹고살아야 되지 않아?’라면서 인수 제안 메일을 여러 번 보내왔어요. 안 한다고 했었죠. 그런데 귀국하고 어느 날 파마하러 미용실에 갔었는데 완전 폭탄을 맞은 거예요. 그 순간 ‘카페를 해야겠다.’고 결정했죠. 큰 결정은 시간 들여 생각해야 하는데 그냥 훅 정해버리고 작은 결정에는 소심하게 한참 걸리는 거 같아요. 카페를 운영하면서 돈은 벌었지만 심신은 너무 힘들었어요.

인덕원의 역사와 함께 한, 인덕원 489

고향도, 건물도: 다시 돌아보다

안양으로 돌아와 어떻게 인덕원 건물 관리를 하게 된 건가요?

2023년 여름이었나? 엄마가 ‘인덕원집 작은 방에 노부부가 오래 살았었는데 이사를 하신다니까 집 관리를 해야 하는데…….’ 하며 걱정하시더라고요. 여태껏 그런 얘기를 하신 적이 없어서 몰랐거든요. 그래서 같이 가봤는데 건물 전체가 엉망이었어요. ‘내가 도와드려야 하나? 시간 되는 내가 해야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릴 때 할아버지와 엄마가 건물 관리할 때 도배 일을 자주 도와서 그런지 어렵게 생각되지는 않더라고요. 하는 김에 좀 제대로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동안은 없던 화장실은 공사를 맡겼어요. 저는 도매, 장판 갈고 도어록 사다가 설치하고 싱크대, 세탁기, 냉장고 새로 다 들였죠. 그러고 부동산에 내놨더니 그날 바로 다 임대가 나가더라고요.

임대를 놓을 방 도배를 하고 도어록 설치도 했다.

지금 제가 살고 있는 100호는 지하철 공사를 하는 중국인 인부들이 숙소로 쓰고 있었거든요. 한 팀이 거주하다 계약 끝나고 나가고 새로운 공사장 팀이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었어요. 어느 날 지하 단란주점 노랫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겠다고 연락이 오더니 바로 퇴실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수십 년 만에 그 집을 다시 가보게 된 거죠. 집은 옛날 그대로인데 곰팡이투성이에, 벽에는 대못이 수십 개 박혀 있고, 스펀지 꽃무늬 벽지를 덕지덕지 붙여뒀더라고요. 그날도 부동산에서 집 보여주겠다고 또 공사장 십장 아저씨랑 같이 오셨더라고요. 솔직히 말씀드렸어요. ‘지하 단란주점에서 소리가 올라와 전에 사시던 인부들이 나가셨어요.’ 그랬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시더라고요.

시간의 흔적이 묻어나는 벽지들

그때 생각했어요. ‘쾌적하게 만들어두고 세를 놓아야겠다’ ‘소음 이슈가 있으니 내가 여기 살면서 고쳐야겠다.’ 곧장 제 이삿짐을 집 한쪽에 쌓아두고 내부를 손보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시작한 것이 1년 걸린 거죠. 매일 한 건 아니고 날 좋을 때 셋방과 100호를 같이 작업했죠. 최소 비용으로 했어요. 앞으로 여기를 어떻게 바꾸게 될지도 모르겠고 거주공간으로 괜찮은 곳인지 아닌지도 잘 몰라서였어요. 겨울도 지내봐야겠고. 섣불리 돈 들여 고치기보다 제 노동력을 쓰고 감당할 수 있을 정도만 지출해야겠다고 판단한 거죠. 공사해 주시는 설비 사장님은 원룸을 3개 만드는 게 수익적인 측면에서 낫다고 그러셨어요. 현실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지만 80년대 집을 부수면 되돌릴 수가 없으니 그게 첫 번째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했죠.

100호 집 내부, 80년대 분위기가 집안 곳곳에 가득하다

2층 상가는 계약 만료 전에 퇴실했어요. ‘성인 보드게임 카페’였는데 ‘불법 도박을 하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상했어요. 퇴실이 확정돼서 원상복구 이야기를 하려고 들어갔더니 이전에 임대했던 세무사 사무실 인테리어 그대로에 큰 원형 테이블, 탁구대, 점수판 뭐 그런 게 이렇게 있더라고요. 나중에 철거 사장님이 여기 보도방이었다고 알려주시더라고요. 철거 후 잠깐 부동산에 임대를 내놨었어요. 당구장, 색소폰 연습실, 함바집 같은 업종에서 연락이 오는데 뭔가 딱 맞지 않아 직접 공유 오피스를 운영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때마침 전 직장 동료가 인테리어 사업을 막 시작한 지인을 소개해 줬고요. 그 친구는 포트폴리오가 필요하고 저는 돈을 많이 쓸 수 없는 상황이니까 ‘같이 상부상조하는 의미로 해보자.’ 해서 고심해 도면까지 작성했는데 그때쯤 건물에 사정이 생겨 더 이상 진행되진 않았어요.

2층 내부 모습, 철거공사를 완료한 상태

같이 하려던 프로젝트도 멈춘 거네요.

그렇죠. 그 친구한테 미안했는데 마침 친구가 금전적인 문제로 회사 다니면서 일을 더 배우려 한다고 해서 다행이었어요. 지하 단란주점은 2025년 설 연휴 전에 나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6월 말에 나갔어요. 그래서 드디어 공간을 볼 수 있었죠. 지하는 방이 구분되어 있어서 2층 공유 오피스 아이디어를 지하에 적용할 수 있겠다 싶었고 2층은 세를 잘 놔서 수익구조를 만들자는 생각이었어요.


그렇게 해서 건물관리를 하게 됐고

부모님이 인덕원을 오가며 건물을 돌보는 게 쉽지 않아 지셨어요. 문제가 생기면 동네 설비 사장님을 믿고 의지해 여태 관리하셨죠. 생각해 보면 엄마에게 ‘그 사장님이 일을 잘하느냐 못하느냐’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던 것 같아요. 도울 자, 그 존재가 귀했던 거죠. 제가 요즘 통감하고 있어요. 1층 골프 가게 사장님한테도 주변 시세보다 훨씬 산 임대료에 오랫동안 올리지도 않고 다만 알아서 잘 사용해 주기를 바라셨고요. 엄마 생각에는 건물이 오래되고 엘리베이터도 없고 주차장도 없는 가치 없는 건물이라 누구에게든 저렴히 임대했던 거 같아요.


근데 저는 인덕원 집만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인덕원 집의 장점을 엄마가 생각해 보지 못한 방법, 다른 방법으로 적용하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우선은 비용을 많이 안 들이고 집을 어떻게 할지 찾아본 거죠. 온라인에서 인테리어나 집공사 커뮤니티랑 블로그를 찾아봤는데 대부분 요즘 스타일로 예쁘게 하는 것 위주여서 제가 원하는 정보를 찾기가 어려웠어요. ‘오래된 집을 많이 손대지 않고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 것 같은데’ 하면서 찾아보다가 일본 DIY 리노베이션을 알게 되었고요.



인터뷰는 ②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