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가좌동, 홀로 선 코스모화학공장 40동
1965년 인천의 가좌동은 공업지역으로 지정되었고, 1968년 인천-서울 간 도로 연변 토지 구획 사업으로 시공되면서 체비지를 통해 천여 개의 기업이 입주한 거대한 대규모 공업단지가 생겼다. 이산화티타늄을 생산했던 코스모화학 공장은 이 단지 안에서 40년 넘게 지역의 발전에 기여하다가 2016년 6월 울산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45개의 공장 건물이 모두 철거되고 단 한 개의 건물 40동만 남아 '코스모 40'으로 다시 태어났다. (참고로 코스모화학은 1968년 설립된 한국 지탄 공업이 전신이며, 1971년 한국티타늄 공업, 2003년 지금의 코스모화학으로 회사명이 변경되었다.)
사라지는 것과 남겨지는 것. 이 둘 사이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순 없을 것이다. 상황과 맥락 안에서 우선순위를 어디다 두느냐에 따른 결과이다. 그중에서 정해진 범위 안에서 군집을 이루고 있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있는 와중에 오롯이 선택된 하나만이 남겨진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코스모 40을 바라보는 내 시선은 오롯이 이 질문에 집중되어 있었다. 명확한 정답이 있는 건 아니지만 나름의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는 코스모 40을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었고, 공장이 위치한 지역이 어떤 곳인지 알아보고 이해하는 것이 우선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 코스모 40이 위치한 곳은 인천 가좌동이다.
1900년대 초부터 1970년대: ‘개 건너’
가재가 많이 사는 개울이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큰 가재 한 마리가 개울에서 나와 가재울이라고 부르던 것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가재리라고 하였고, 이후 가재가 변음이 되어 가좌가 되었다고 한다. 한편으로 개울(건지)이 있던 곳이라 하여 건지골이라고도 불렸다.
‘개 건너’라고 불리던 가좌동은 부평군 모월 꽂면 가좌리로 1914년 부평군 석곶면과 통합해 부천군 석곶면이 되었다. 그 후 1940년 인천부에 편입돼 천 강정이 되었으며, 1946년 가좌동으로 바뀌었다. ‘가마 굴’, ‘능안’, ‘건지골’, ‘살구지’, ‘네 집 네’ 같은 자연부락이 있었으며 이들 지역은 나중에 1,2,3,4동의 행정동으로 이루어졌다. ‘개 건너’는 인천대학교 체육관에서 주안 4,5,6 산업공단 사이에 큰 갯골을 말하는데 지금도 인천시립병원에서 공단방향으로 이어지는 하천 줄기가 옛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인천대 체육관 뒤쪽으로는 마을이 없이 외딴집들이 몇 가옥씩 모여 있었다. 그러나 개울 건너 ‘개 건너’에는 그나마도 집을 구경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가옥수가 적었다.
인천에 살던 토박이들은 가좌동 지역을 ‘개 건너’라고 부르기도 했다. 시장 바깥 터에서 분식가게를 운영하는 이동형 씨는 인천 토박이다. 바로 이웃한 석바위에서 나고 자란 그는 아직도 그때의 풍경을 떠올린다. “여기를 옛날에는 개 건너라고 부르기도 했어요. 내가 어릴 적에는 나룻배를 타고 여기까지 다녔던 기억이 있습니다. 남구 도화동과 가좌동 사이에는 긴 갯골이 있어서 바닷물이 드나들었어요. 밀물이 들어와 있을 때에는 나룻배로 물을 건너고 썰물일 때에는 돌다리 징검다리 껑충껑충 뛰어 건너곤 했지요.” <내용 출처: https://c11.kr/8aa4>
“개 건너에는 못 갑니다. 장화 신고 다니는 그곳을 내가 왜 갑니까?” 기사들은 차를 놀리면 놀렸지, 서구에는 갈 수 없다며 배짱을 튕겼다. 서구에는 한사코 가려고 들지 않는 택시기사와 곧바로 흥정이 시작된다. “바빠서 그러는데 사정 한 번만 봐주세요. 웃돈도 얹어줄게요. 예~, 제발 좀 갑시다” 그제야 못 이긴 척 차에 택시기사는 시동을 걸곤 했다. < 내용 출처: https://c11.kr/8aa5>
'염전'
인천은 소금을 만들기에 유리한 기후와 지형 그리고 넓은 소비 시장으로 인해 현재 열우물 558번지 지금의 주안 5, 6공 단 일대와 그 넘어 간석동, 십정동, 가좌동 일대까지 널리 염전 밭 이 펼쳐졌다. 경인고속국도 주변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인해 폐지된 염전은 십정동, 가좌동, 가정동, 간석동, 주안동, 도화동, 송림동, 용현동으로 현재의 인천교 부근이며 그 면적은 114만 평에 이른다.
'공업단지'
'개 건너’로 얕봄의 대상이었던 석남·가좌동은 1970년대부터는 ‘노다지’를 캐는 동네로 확 변했다. 이곳 목재 업체 사장들은 죄다 수입 외제차를 타고 다니며 흥청거렸다. 나무 산업이 부른 풍요였다. 1964년 제재 업체인 동화개발㈜는 가좌동 산 216 일대 갯벌 66만㎡를 메웠다. 수입한 원목 단지와 목재 공업단지를 조성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동화개발과 같은 계열사 동화기업㈜는 1970년과 1971년 세 차례에 걸쳐 가좌동 갯벌을 무려 267만㎡나 매립했다. 동화기업이 오늘날 국내 제일의 마루 목재로 성장하는 터를 이곳에서 닦은 것이었다. < 내용 출처: https://c11.kr/8aa5>
'경인고속도로의 기공식이 열린 곳'
가좌동은 1967년 3월 24일 우리나라 최초의 고속도로인 경인고속도로의 기공식이 열린 곳으로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 지금은 많이 확장이 됐지만 이때 공사를 시작한 초기의 경인고속도로는 1968년 12월 21일에 가좌동 톨게이트~서울 영등포구간만이 개통됐다. 이어 1969년 7월 20일 가좌동~인천항 앞까지 나머지 구간도 뚫려 전체 길이 29.5km 왕복 4차선으로 만들어졌다.
<내용 출처:https://c11.kr/8aad>
개울이 있던 개 건너였고, 소금을 만들어 내는 염전이기도 했지만 공업단지 조성으로 매립된 지역. 경인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그 영향력을 받게 된 곳이다.
마치 거대한 큰 목표를 이루고 지역의 큰 변화를 지속적으로 끌고 갈듯 공업단지가 조성되었지만 세월이 흐르니 이 또한 옛것이 되었다. 예전만큼 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니 언제 어떤 상황에서 사라져도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을 정도다. (영향력을 발휘해야만 남겨질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건 아니니 오해가 없길 바란다.) 이러한 흐름 속에 누군가는 모든 것이 다 사라지기 전에 남기고자 하며 그 의미를 찾아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고 고민한다. 과거를 붙잡고 현재를 덧입힌다. 코스모 40은 그렇게 탄생했다. 모든 건물이 사라지는 와중에 선택되듯 남겨진 이유는 무엇이고, 이 공간을 선택한 사람들은 누구일까?
코스모 40에 이르기 전 큰 사거리 앞 횡단보도에 조금은 이곳 풍경과는 조금은 이질적인 카페 하나와 오래된 한옥 한 채가 자리 잡고 있다. 13대째 살고 있는, 심 씨 가문의 집성촌이기도 한 가좌동 한편에 가문의 고택과 함께
신진 말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심기보 대표와 서울 합정동과 인천 가좌동에 위치한 빈브라더스의 총괄 브랜드 디렉터 성훈식,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재 모습으로 구현하기 위해 설계를 맡은 삶것 건축사사무소 양수인 대표가 코스모 40을 탄생시킨 주역이다. 이들은 하나 같이 '사라지는 건물을 살려야겠다, 어떻게든 살아남았으면 좋겠다' 말했다. 왜 일까? 그들에게 사라진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사업이 될지 안 될지를 떠나 먼저, 사라지는 건물을 살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외국에는 전성기가 끝난 공업도시에 남겨진 공장을 문화시설로 재생한 성공 사례가 많아요. 한국에는 왜 그런 공간이 없을까, 생각하다 여기까지 왔습니다.” ‘코스모 40’을 기획한 성훈식(34) 씨는, 제 기능을 잃고 남겨진 인천의 공장들을 근대유산으로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성 씨와 함께 코스모 40 프로젝트에 의기투합한 심기보(39) 씨는 이 일대와 인연이 각별하다. 그의 집안은 13대째 서구 가좌동에 뿌리를 굳게 내려왔다. 공장 지구 한편엔 300년 된 심 씨 가문의 고택이 온전히 남아 있다. 그만큼 감회가 깊다. “우리 가족의 생활 터전은 바로 공장 옆에 있었습니다. 매캐한 화학물질 냄새가 풍기는 이 일대는 매력적인 개발의 대상이 아니었지요. 그 덕에 살아남았습니다.” 역설적이지만 소외된 땅이었기에 속도가 앗아갈 뻔한 풍경을 붙잡을 수 있었다.
<내용 출처: http://bitly.kr/GvzEgC, 굿모닝 인천>
"2016년 가을 추석 즈음 코스모화학 공장 40동에 처음 들어갔던 순간을 잊기 어렵다. 연휴에 몰래 들어갔기에 더 생생한 기억이다. 금방 무너져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덜렁거리는 골강판 소재의 외벽을 지나 건물 내부로 발을 몇 발짝 딛는 순간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높게 뻗은 탄탄한 H빔들이 모아이 석상들처럼 서 있는 강렬한 모습에 압도됐다. 3층의 먼지 쌓인 캐비닛에서 찾은 손으로 그린 것이 분명한 1989년의 도면에는 크고 작은 기계와 다양한 굵기의 배관이 공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수십 년간 폐황산을 정제하는 화학 공정을 담당하던 설비들이 kg당 몇백 원의 고철로 팔려나가고 나니 그동안 주목받지 못한 H빔들이 빈 공장의 주인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이 건물 또한 곧 철거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건물이 어떻게든 살아남으면 좋겠다고 신진 말 심기보 대표와 나눴던 이야기가 지금 와 생각해보면 코스모 40 프로젝트의 킥오프 미팅이었다. 40동은 본래 철거 초기 없어질 예정이었으나 주거지와 가깝다는 연유로 철거 기간 방패막이 역할을 하기 위해 가장 마지막에 철거하기로 결정되었고, 생을 다하기 직전 수상한 동네 이웃들에게 발견되어 살아남은 것을 보면 건물도 하나의 생명체 같다는 생각이 든다. " <내용 출처: 공장의 재탄생 코스모 40 기획 이야기, https://c11.kr/8bjx>
도시재생사업으로 전국이 들썩이고 있는 이 시점에서 오래된 건축물을 철거하지 않고 재생하는 방식(증축하거나 리모델링)의 사례들이 많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코스모 40의 사례는 전혀 새로운 방식은 아니다. 하지만 기존 재생 건축과 차이점은 말한다고 한다면 최대한 기존 건물의 변형을 줄이고 성격을 살리되, 필요한 공간을 보강하여 연결한 방식이라는 점이다. 처음 이 연결점을 찾기 위해 건물 외부를 전체적으로 훑었는데 아무리 봐도 우측 엘리베이터 부분밖에 보이지 않는 거다. 기둥을 보면 기존 공장 기둥과 신축 기둥이 맞닿아 있지 않다고 했지만 구분이 되지 않았다. 한참을 혼란스러워하다가 우연히 건물 도면을 보게 되었는데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이처럼 폐공장을 활용하여 공간 재생하는 사례는 많다. 하지만 운영 방식이나 행태는 다른 듯 보이지만 비슷한 부분들이 많다. 예를 들면 카페가 입점해서 커피를 판매하거나 잘 알려진 유명 브랜드는 아니지만 독특한 개성의 브랜드가 입점해서 의류, 액세서리 등을 판매한다던지 말이다. 솔직히 말하면 이러한 상행위는 꼭 여기가 아니어도 충분히 실현 가능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생태계가 마치 트렌드이며 유행인 듯 퍼져 나갈 경우 지속 가능성이 늘 염려된다. 경제학적 측면에서 공간을 기획하고 '어떻게 이익을 창출해서 운영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으로 필연적일 수도 있는 부분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간 재생의 의미를 짚어 보고, 해당 공간이 주변 지역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지속 가능성을 위해 어떤 노력들이 필요한지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하는 것도 분명하다.
코스모 40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그동안은 인천의 대표 공업단지 안에서 화학공장으로서 역할을 했고, 그로 인해 지역 경제에 영향을 미쳤다. 이 역할은 이제 접어 두고 복합 문화공간으로서 어떤 새로운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지역과의 연계성은 어느 정도로 가져 갈지, 그와는 완전 별개의 독립된 공간으로서 자리매김할지의 고민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재생건축은 재활용의 건축을 넘어 새로움의 건축이어야 한다. 도시재생은 역사를 보는 눈, 세상을 보는 눈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시간의 흐름을 읽고, 서로의 생각과 기억을 더듬어 '새롭게 한발 더 나아가는 것', 서로 다른 아이덴티티를 확인하고 기존의 것과 새것이 창의적 방식으로 공존하며 서로를 존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결국은 재생건축의 가치를 공유하고 공감대를 형성해 건축 자체의 의미를 넘어 사회문화적 연대감을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 <내용 출처: 내용 출처: 공장의 재탄생 코스모 40 기획 이야기, https://c11.kr/8bjx>
- 시대가 요구하는 공간의 성격이나 쓰임에 따라 소비하는 대상은 달라진다.
더 이상 공장이 아닌 복합 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한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 과거 근로자들의 흔적을 찾아 가보려 한다. 기존 공간의 형태나 흔적들을 최대한 훼손시키지 않고 남겨 둔 덕분에 공간의 몰입도는 높았고 자연스럽게 근로자들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실제로 본 것이 아닌 오직 흔적을 따라 상상한 것이라 현실과 차이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것에 감안하고 봐 주길 바란다.
조명
공장 내부는 최대한 빛이 차단되는 구조였다. 창문은 작고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으며 천장 곳곳엔 햇빛을 대신한 조명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는 시설 설비나 기계들을 비춰 생산 공정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가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현재는 기둥에 색이 들어간 조명이 설치되어 있고, 천장에도 추가적으로 조명을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천장에 창문을 설치해서 빛이 떨어지며, 건물 앞쪽(외부 계단 있는 위치)에도 창을 텄기 때문에 예전보다 훨씬 더 밝아졌으리라 짐작된다.
계단, 비상구
근로자의 작업 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비상구다. 돌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생명줄과도 같은 비상구는 어느 위치에서, 어떤 상황에서 발견하든 눈에 띄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상구로 이르게 하는 것이 계단. 수직으로 배열된 공간 안에서 긴급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곧장 허공으로 뛰어내릴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외부로 연결되는 비상계단이 있다면 더욱 안전하게 빠져나올 수 있을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작업공정에 따라 분리된 공간을 자연스럽게 넘나들수 있도록 연결하는 역할도 한다. 1층에서 2층으로, 2층에서 3층으로 혹은 바깥으로.
작업일지
공장만 남긴 것이 아닌 것에 감동했다. 실제 코스모화학공장에서 근무했던 분들이 작성했던 작업일지들도 그대로 있었다. 내부에 설치되어 있던 기계의 도면도 그대로 부착되어 있었는데 뭔진 정확하게 몰라도 '이런 것들이 있었구나.' 하며 잠시나마 상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어떤 업무를 했었는지, 근무 시간은 몇 시부터 몇 시였는지, 누가, 몇 명이 근무했는지 등 비교적 상세하게 그들이 직접 작성한 일지였다. 한 장 한 장 넘겨 볼 때마다 '이걸 작성했던 사람은 어떤 분이었을까?, 근무했던 이 날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바깥 풍경
우리는 변화된 코스모 40 내부에서 창문을 통해 보이는 공업단지 풍경을 이색적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일터였던 공장 근로자들이 일상 속에서 매일 바라봤던 창 밖의 풍경을 보며 느꼈을 감정은 분명 우리와는 다를 것이다. '화려한 옷을 입은 하늘 높이 솟은 굴뚝과 다른 공장들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공장은 분명 가동되고 있지만 미동도 없이 정적이기만 이곳에서 보낸 시간들은 어떠했을까?' 내부에서 크고 작은 창문을 통해 바라본 세상은 온통 회색빛이었다. 날씨가 흐린 탓도 있었지만 대게의 공장들이 그렇듯 회색빛 위주로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풍경을 바라보며 내가 느끼는 것과 공장 근로자들이 느꼈던 것이 다를 수 있다. 아니 어쩌면 내가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들이 느낀 감정들은 정반대일 수도.
앞으로 더 지켜볼 일이지만 개인적으로 도시재생(공간) 사례로 이들이 좋은 선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실제로 이 지역에 집안 대대로 살았었기 때문에 더 깊이 있고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신진말의 심기보 대표님과 브랜딩과 공간 기획자로서 그 누구보다 많은 고민을 했을 성훈식 디렉터의 탄탄한 기획력이 공간에 충분히 묻어나 있어 더더욱 힘이 실릴 거라 예상한다. 공간이 사람을 포용하는 것이 아니라 주눅 들 만큼 위압감이 들면 좋은 공간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코스모 40의 경우 '공장'이라는 특수성이 있음에도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몰입감이 강해서 빠져 드는 느낌이 든다.
3층
2층
1층
"재생건축은 재활용의 건축을 넘어 새로움의 건축이어야 한다. 도시재생은 역사를 보는 눈, 세상을 보는 눈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시간의 흐름을 읽고, 서로의 생각과 기억을 더듬어 '새롭게 한발 더 나아가는 것', 서로 다른 아이덴티티를 확인하고 기존의 것과 새것이 창의적 방식으로 공존하며 서로를 존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결국은 재생건축의 가치를 공유하고 공감대를 형성해 건축 자체의 의미를 넘어 사회문화적 연대감을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 <공장의 재탄생, 코스모 40 기획 이야기, https://c11.kr/8bjx, 글: 성훈식 디렉터 >
또한 도시(공간) 재생을 이야기할 때마다 주로 판의 무대가 되는 공간만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공간재생의 의미를 묻고 그 이후 공간과 함께 할 수 있는 다양한 실험들을 하면서 시행착오를 겪고 그 기반을 마련해두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성훈식 디렉터가 위 글에서 말했던 것처럼 '사회 문화적 연대감'이 확대되어 필요성을 인지/ 인식한 사람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 이런 공간들도 계속 생겨 날 수 있다. 소수의 누군가만이 이끌어 가기에는 지속가능성이 낮아진다. 필요하다면 제도적 개선도. 이 모든 것들이 지금 당장 이루어질 순 없겠지만 좋은 선례들이 계속 보인다면 가능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