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대한민국에서 '강남'은 부의 상징으로 인식된 지 오래다. 하지만 답사를 여러 번 다녀오고 나서부터 강남이 이미지로 만들어진 하나의 거대 지역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청담, 압구정, 논현, 대치동. 부의 상징으로 인식되는 대표적인 강남의 동네들. 하지만 조금만 살피다 보면 빈부가 공존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뿐만 아니라 물리적 장소로 인식하는 범위에서도 차이가 난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강남에 대한 경험적 요소가 다르기 때문이다. 좁게는 강남역 인근에서부터 넓게는 한강 이남 모두를 포함하는 강남에 대해 우리는 좀 더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는 고정된 이미지로써의 강남은 언제,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추측하건대 우리에게 가장 대표적으로 알려져 있는, '강남 개발'이 이루어지던 그 시기. 1970년대부터가 아닐까? 토지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부동산 붐이 일어났던 그때 그 시절의 이미지가 21세기를 살아가는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걸 보면서 첫 이미지가 이렇게나 중요하구나 라는 인상을 받았다. 사람으로 치자면 첫인상이다.
그 첫인상이 첫인상으로 계속 남아 있을지 아니면 그 이면에 다른 무엇인가 있을지는 들여다봐야 알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가 알면서도 모르고 있는 강남에 대하여 지금부터라도 살펴보자. 한 번은 이런 부분들이 너무 궁금해서 강남구에서 실제로 거주하고 있는 분에게 질문을 던진 적이 있는데, 돌아온 답변은 이러했다.
A: "본인이 생각하는 강남은 어디고, 어디까지일까요?"
B: "강남구? 송파구? 근데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과연... 의미가 없을까?
나는 서울이라는 도시가 변화하는 과정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강남의 지역성과 지리적&심리적으로 작용하는 범위를 짚어 보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거주하는 지역, 환경에 따라 강남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고 그에 따른 사회적 인식마저 달라지는 것은 그만큼 영향을 많이 주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니깐 말이다. 도시가 형성될 때 도시계획에 따라 달라지는 지리적 범위와 사회적 환경이 서로 맞물려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면 자연스럽게 그 지역의 성격이 보이고, 큰 맥락에서 그 도시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냥 '수서동?' 하면 잘 와 닿지 않지만 'SRT고속철도'라고 하면 퍼뜩 떠오르는 곳,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 낯선 이름만큼이나 잦은 행정구역 변경과 특색 없는 동네다. 지도상 위치도 강남구 끝 지점. 나름 강남 개발 당시 주목받았던 수서동임에도 불구하고 2021년 현재까지도 큰 변화가 없는 이유에는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있는 땅이 한몫을 한다. 개발되어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곳도 있지만 이것이 수서동의 특색을 대변하지는 못한다.
1963년 서울 성동구 송파 출장소
1970년 서울시 성동구 일원동
1973년 서울시 성동구
1975년 서울시 성동구 -> 강남구 신설
1990년 수서지구 개발
1992년 서울시 강남구 일원동-> 수서동·일원본동·일원1동·일원2동으로 분동
매력적인 풍경은 없지만, 특별한 역사는 있다. 노태우 정부(1988년 2월 25일부터 1993년 2월 25일까지)는 경제 성장에 따른 부동산 가격 폭등과 서민과 중산층을 대상으로 한 주택보급을 확대하기 위해 '주택 200만 호 건설'을 추진했다. 그 일환으로 1989년 3월 21일, 강남구 수서동, 일원동 일대를 '수서택지개발지구'로 지정하였다.
1) 사건의 발단
수서사건의 출발은 멀리 1988년 서울 올림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4년 대한하키협회 회장직을 맡아온 한보의 정태수 회장은 비인기 종목이었던 하키를 올림픽에서 우승자를 내는 데 성공했다. 그때 올림픽 조직위원장이었던 박세직 씨(수서사건 당시 서울시장)와 체육부에서 올림픽 조직위로 파견 근무하던 장병조 씨(사건 당시 청와대 문화체육담당 비서관)와 가까워졌다.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개최된 서울 올림픽은 160개국 1만 3,000여 선수단이 참가, 올림픽 사상 최대의 잔치를 기록했고, 한국의 위상을 세계에 드날린 대회였다. 한국 선수단은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살려 소련·동독·미국에 이어 4위의 성적을 올렸다.
노 대통령은 취임 첫해에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무척 기뻐했다. 올림픽을 끝낸 후 체육관계 단체장, 우승선수들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만찬회에서 노 대통령은 “이번 서울 올림픽에서 우승한 종목의 협회장들에겐 반드시 보상하겠다”라고 공언했다. 올림픽 성공에 따른 논공행상이었다. 박세직 올림픽 조직위원장은 물론 장병조 씨도 대통령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우승 종목의 협회장들은 “협회를 좀 더 지원해 달라”, “우수선수 육성책을 세워달라”는 등을 노 대통령에게 주문했다.
비인기 종목에서 우승, 국민적 자신감을 심어준 대한하키협회 정태수 회장의 차례가 돌아왔다. “정부의 주택 200만 호 정책에 호응해 집 없는 사람들에게 아파트를 지어 주겠습니다. 정부에서 택지를 분양해 주었으면 합니다.” 노 대통령은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수서사건은 자세한 내용을 모르는 대통령의 의례적인 이 약속이 발단이 돼서 굴러갔다. 수서사건 연루에 곤욕을 치렀던 당시 정부의 한 인사는 올림픽 직후 만찬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그 만천에서 정태수 회장이 노 대통령에게 수서지구 택지분양을 요구했고, 노 대통령도 선뜻 승낙했습니다. 후에 담당 보직과 관계가 없는 장병조 문화체육 비서관이 수서 특별 분양에 개입하고 박세직 씨 기 시장에 취임하자 단독으로 특별분양에 관해 결심한 것도 이날의 일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올림픽 논공행상에 기업의 논리가 끼어든 것이다. 자연녹지에 아파트를 짓겠다는 건 건설업자의 상식으로 불가능한 일인데도 정태수 회장은 정부를 어떻게라도 설득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대통령마저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으니…. 안 되는 것을 되게 하고,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경제개발 초기의 기업 속성이었다.
[출처 : 오피니언 뉴스(http://www.opinio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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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건의 전말
1989년 3월 택지개발 지구로 지정된 수서, 대치 택지 개발 예정지구를 일반 주택청약 예금자들과의 형평에 맞지 않게 특정 조합에 공급함으로써 빚어진 비리 사건이다. 이 지역은 법적으로 국가나 민간업자가 개발하여 일반에 공급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경제성 때문에 여러 단체가 조합을 결성하여 토지를 매입하고 특별공급을 청원하는 민원을 끊임없이 제기했는데, 1991년 1월 21일 정치권의 압력과 한보 그룹의 로비를 받은 서울시가 법적 근거 없이 이 지구의 민간 주택조합 소유 토지 3만 5500평을 이들 조합에 특별 분양키로 결정함으로써 그들 조합원과 한보그룹에 특혜를 주었다.
본래 수서 택지 특별공급 불가 입장을 밝힌 건설부가 그 공급권을 서울시에 이관하게 된 경위와, 서울시가 1990년 10월 특별공급 불가 방침을 조합 측에 최종 통보했음에도 불구하고 몇 개월 후 입장을 바꾼 과정이 의혹을 낳았다. 더욱 특별분양을 받은 민간조합에 경제 기획원, 서울지방국세청, 군부대, 언론사 등 영향력 있는 기관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특혜의혹이 확산되었다.
1991년 2월 3일 청와대와 평민당이 이 지구 분양과 관련하여 서울시에 보낸 협조공문이 공개되면서부터 수서 택지 특별분양은 정치 쟁점화되었다. 이후 서울특별시가 특별분양 결정을 내리기 직전 열린 서울시 관계자 대책회의에 청와대 비서관과 민자당 의원이 참석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여론이 악화되었다. 전 대통령 노태우는 감사원에 특별감사를 지시, 정치권의 외압 사실을 숨기는 선에서 여론을 가라앉히려 했으나 진정되지 않았고, 2월 7일에는 마침내 검찰이 본격적 수사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수사 과정에서 한보그룹이 청와대 관계자, 국회 건설 위원회 소속 의원들, 건설부 등 공무원에게 뇌물을 건네준 사실은 밝혀냈지만, 외압과 배후의 실체에 대한 수사는 한계를 드러낸 채 마무리되었다. 외견상 부총리를 포함한 정부의 개각으로 일단 수습을 하였으나 6공 하의 정·경·관 유착관계를 보여 준 사건이다.
내용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수서사건 [水西事件] (두산백과)
3) 사건의 결말
수서사건의 장본인인 정태수 회장이 징역 4년을 구형받았고, 이에 비해 장 비서관, 이태섭·이원배 의원이 모두 10년씩 구형을 받았다. 7월 1일 선고공판에서 장 비서관과 이태섭·이원배 의원에게만 실형이 선고됐다. 오용운·김동주·김태식 의원과 정태수 회장, 이규황 건설부 국토계획국장 등은 집행유예로 석방됐다. 12월 6일 항소심 공판에서 김태식 의원에게는 무죄가 선고되고, 다른 피고인들도 형량이 일부 줄어들었다.
6 공화국 임기가 두어 달 남은 92년 12월 24일 노태우 대통령은 사면을 단행, 북역 중이던 장병조·이태석·이원배 씨에게 잔형 면제 처분을 내렸다. 이들은 크리스마스이브날 석방됐다. 사건 발생 1년 10개월여 만에 수서사건 관련자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석방됐다. 정권을 뒤흔들었던 사건 치고는 흐지부지 끝난 것이다. 노 대통령은 재임 중 이 사건을 완전히 종결짓고 싶었을 것이다.
내용 출처 : 오피니언 뉴스(http://www.opinionnews.co.kr)
* 참고 : 사건의 전개과정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비교적 잘 정리된 글을 인용하였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현재까지도 개발제한구역이 존재하는 수서동은 그 당시에도 개발 불가한 그린벨트 지역이었다. 하지만 주택 200만 호 공급정책을 전제로 하여 집 없는 사람들에게 아파트를 지어주겠다는 한보그룹 정태수의 제안에 정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정태수는 국가 고위관직에 있던 공무원들을 유혹하여 많은 이들이 관여하게 만들었고, 그의 계획대로 경제 기획원, 서울지방국세청, 군부대, 언론사 등 영향력 있는 기관들이 다수 참여한 26개 연합주택조합이 결성되었다. 이에 따라 서울시가 법적 근거 없이 민간 주택조합 소유 토지 3만 5500평을 이들 조합에 특별 분양키로 결정함으로써 그들 조합원과 한보그룹에 특혜를 주었다. 국가기관에 소속되어 있는 많은 사람들이 특혜를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해당 사건 관련자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그리고 2021년 현재 수서동은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화로운 모습을 하고 있다. 물론 겉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 실제 내막은 알 수 없다.
여전히 이곳은 개발제한구역이자 개발될 가능성이 있는 지역이다. 특히나 SRT 수서역이 생기면서 그 기대감은 더 높아지지 않았을까? 그런 탓에 나도 가끔은 궁금해지곤 한다. 여기는 언제 개발제한구역이 풀릴까?
특별한 역사와 함께 특별한 건물도 있다. 지하철 수서역 출구를 빠져나오자마자 보이는 고층건물 몇 개. 그중에서도 네모난 유리창문으로만 꽉 채워진 반듯한 모양의 수서타워 건물과 달리 모서리가 둥근 오피스텔 건물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건물 이름이 '로즈데일'. 심상치 않다. 아니나 다를까 이 건물은 1997년 개점을 앞두고 있던 나산그룹의 로즈데일 백화점 건물이었다. 1년도 채 되지 않은 1998년 나산그룹의 부도로 개점은 하지 못했지만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오피스텔로 사용 중이었다. 회사가 부도가 났다고 해서 건물을 부수고 새로 지은 것이 아니라 용도만 변경하여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나름 마음에 들었다.
SRT와 수서역. 사실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는 범위에 속하는 사람이라면 고속철도가 생겨도, 새로운 지하철 역이 생겨도 이전과 다른 점을 느끼기 힘들다. 일부러 시간 내 타러 가지 않는 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처음 SRT 수서역과 SRT고속철도가 생겼을 때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고, 이용할 기회가 없던 나는 여전히 실감 나지 않는다.
SRT 수서역 뒤편으로는 겉으론 잘 보이지 않지만, 수서 차량기지가 있다. 차량기지 자체는 일반인이 접근 불가하여 멀리서 이곳의 존재를 확인만 하고 왔다. 구로차량기지나 신정 차량기지의 경우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지나가면서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수서 차량기지의 경우는 외부로 노출되는 범위가 없어서 걸어서 안으로 들어가야 볼 수 있는 것 같다. 저길 애초에 관계자만 들어갈 수 있는 줄 알았는데 좀 찾아보니 견학을 신청해서 가볼 수 있는 곳이었다. (견학 참고 링크: https://url.kr/ibzqvc )
근처를 배회하며 걷다 보면 동부간선도로가 보인다. 이 도로만 건너가면 송파구 문정동이다. 쌩쌩 달리는 차들 사이로 보이는 무언가의 알림. 잘 들여다보면 수서 차량사업소에서 안내한 출입금지 내용이다. 여기까지도 수서 차량기지에 속하는 구역임을 잘 알 수 있다.
수서 신동아아파트, 1992년 10월
수서 삼익아파트, 1992년 10월
수서 한아름아파트, 1993년 11월
수서 동익아파트, 1993년 11월
수서 주공 1단지 아파트
수서 6단지 아파트
수서삼성아파트, 1997년 11월
수서 까치마을 아파트, 1993년 9월
수서 목련타운 아파트, 1993년 9월
강남 더샵 포레스트, 2016년 7월
수서동에 있지만 수서가 아닌 강남 수식어가 붙은 더샵 포레스트 아파트를 제외하고 수서동의 아파트는 대부분 1992년 -1993년, 1997년 즉, 1990년대에 지어졌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1990년대 노태우 정부가 200만 호 주택건설정책을 실시하면서 건설된 택지지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수서동에 지어진 최초의 아파트는 어디일까? 신동아아파트와 삼익아파트가 나란히 같은 해 10월 사용승인이 난 것을 보면, 두 아파트 모두 수서동에 지어진 최초의 아파트로 보인다.
고층건물, 아파트 다음으로 보이는 굴뚝. 웬 굴뚝인가 싶어 알아보았더니 한국지역난방공사와 함께 있는 자원회수시설 굴뚝이었다. 답사를 하며 이렇게 생긴 굴뚝을 본 건 두 군데다. 난지도 옆 자원회수시설, 목동의 서울 에너지공사 목동 본사. 에너지 효율을 높이기 위해 아파트 단지 인근에 있거나 쓰레기에서 발생하는 가스를 활용하여 주변 지역의 난방을 담당하고 있지만 정작 인근 주민들에게는 혐오시설로 여겨지는 시설이다.
일원동 일대에 위치하고 있는 한국지역난방공사 강남지사는 열병합발전소를 건설할 당시 이 지역 주민들이 혐오시설이란 이유를 들어 건립을 반대하자 추후에 더 이상의 증설을 하지 않겠다는 조건하에 열생산 시설을 건립할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중략)그런데 이번 청담·도곡지구 저밀도 아파트 단지들의 재건축사업이 본격화되며 이 문제가 불거지자 수서지역 아파트 주민들이 또다시 반대하고 나선 것. 구청 관계자는 "현재로서는 뭐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라며 "두 지역 주민들 간에 원만한 합의점을 도출해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을 뿐"이라고 밝혔다.
출처 : 주거환경신문(http://www.r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086)
지역난방공사는 정작 차들이 쌩쌩 달리는 대로를 건너야 있지만 워낙 가까운 거리다 보니 아주 잘 보인다.
수서동은 전주 이 씨 집성촌이 있던 곳인데, 그 마을 이름은 궁마을이다. 현재도 궁마을은 남아 있지만,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전주 이 씨 집성촌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실제 궁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면 새로 조성된 전원주택단지와 함께 먹자골목이 형성되어 있다. 언덕길을 올라 끝까지 가면 교회도 있고, 단지 개발제한 구역으로 묶여 있어 다른 곳에 비해 티가 안 날 뿐이지 변화는 분명 찾아온 듯 보인다. 건너편에는 잘 관리된 전주 이 씨 묘역이 있다. 길을 걷거나 보도를 건널 때 시선이 자연스럽게 닿을 만큼 꽤나 넓은 구역을 차지하고 있다. 이곳을 처음 방문하는 사람에게는 다소 생경한 풍경일지도 모른다. 묘역을 중심으로 봤을 때 주변으로 개발이 진행되면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도 했고, 초등학교도 있고, 성당이나 교회 같은 종교시설도 생겼고, 도시기반시설들이 하나둘씩 생겨났다. 하지만 원래 한 가문의 집성촌 마을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전혀 놀랄 일도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입장에서 가장 생경한 풍경은 묘역이 아니라 아파트 단지와 고층빌딩이 아닐까?
수서동은 조선시대 말까지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수서리였으며, 1914년 3월 1일 경기도 구역 확정 때에도 이 지역은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수서리로 남아 있었다. 대왕면은 경기도 광주군에 속했던 지방행정 구역으로, 조선 후기에는 17개 동리로 구성되어 있었고, 1911년 대왕 면사무소가 신설 당시에는 14개 동리로 구성되었다. 현재는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지역에 편입된 성남시의 옛 행정구역이다. 여러모로 여태껏 봐 왔던 서울풍 경과는 다소 다른 풍경을 가진 서울이다. 뭐랄까? 모든 것이 시기적으로 혼재되어 있는 느낌이다. 특히나 복잡한 도시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비닐하우스가 더욱더 이질감을 느끼게 만든다. 과거 강남에 살던 사람들은 농사를 짓고 채소를 재배하는 농업인들이었고, 수확한 곡물과 채소를 가지고 서울로 향했다. 시장에서 물건을 팔고 다시 강을 건너 돌아와 생계를 이어갔다. 아주 오래된 먼 옛날이야기 같지만 몇 년 전만 해도 바로 옆 동네인 문정동에서도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또한, 도심 재개발과정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살아가는 비닐하우스촌도 있었다. 현재는 '수서역세권 공공주택지구 조성공사'로 인해 대부분 철거되었다. 공사가 진행되는 구역을 따라 걷다 보면 서울의 가장 끝 동네 세곡동과 자곡동에 이르게 되는데 그 길 위에서 비닐하우스를 목격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 풍경은 비닐하우스촌이 사라졌다고 하더라도 단지 과거의 모습으로만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도 그 시간이 이어져 오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비닐하우스촌에 살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지금은 무엇을 하며 살아갈까?
공공택지지구 조성공사가 이루어지는 구역을 제외하고 개발제한구역이 풀리지 않는 동안은 큰 이변이 있지 않는 이상 현 상태를 유지할 수서동. 수서동은 현재의 강남이며 이 모습 또한 강남의 모습이니 잘 들여다볼 것. 앞으로 어떻게 변화될지도 유심히 지켜보면 좋을 것 같다는 말로 이 글을 마친다.
<참고기사>
1. 2017년 5월 8일 자 아시아 타임스, 금싸라기 땅으로 변신 중인 서울 강남구 수서동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7558597&memberNo=29442882
2. 2007년 3월 6일 자 브레이크 뉴스, 서울시 vs 지주, "땅장사냐, 투기꾼이냐"
http://egloos.zum.com/xenophix/v/992536
3. 3. 2004년 6월 14일 자 오마이 뉴스, 당신 같으면 1~2천 벌자고 이런 곳에 살겠소?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91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