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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경별진 Dec 19. 2021

수술은 처음이라서

3주 만에 다시 글을 적어본다. 몸이 항상 좋지는 않았지만 병원에 가면 항상 과로라고 했기에 내 몸이 그리 나쁜 상태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느 날 새벽에 응급실을 가게 되었는데, 응급처치만 가능할 뿐이라며 외래진료를 권유했다. 위경련으로 자주 응급실을 갔었고, 그때마다 진료 권유를 받기는 했다. 하지만 이번엔 심상치 않음이 느껴져 다음날 진료를 보게 되었다. 검사를 마친 의사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혹이 있는데 크기가 커서 바로 제거 수술을 하지 않으면 다른 장기들이 망가질 수 있다는 말을 하셨다. 혼자 가벼운 마음으로 갔다가 수술 이야기를 들으니 덜컥 겁이 났다. 바로 대학병원 진료예약을 하고 피를 뽑으려고 앉아 있는데 손이 떨리고 눈물이 흘렀다. 간호사는 그런 나를 위로했다. 암이라는 병으로 가족들을 잃었기에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대학병원에서 간단한 검사 후에 바로 수술 날짜를 잡았다. 수술은 한 달 뒤에 할 수 있었다. 수술 전 검사를 하면서 수술 날짜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빨리 흐르던 시간인데, 기다리는 것이 있으면 느리게만 가는 것 같다. 그리고 한 달 뒤, 수술 전날 입원을 했다. 입원 날, 입원 시간 30분 전까지 회사 일을 하고 언니와 함께 출발했다. 내가 2살 때쯤이었다. 목욕물을 받아둔 뜨거운 대야에 빠져서 화상을 입은 적이 있었다. 엄마의 말로는 화상이 심해서 의사가 엄마에게 보지 않는 게 좋겠다고 하시고는 장갑을 끼고 알코올을 몸에 부어 화상부위를 모두 벗겨 냈다고 했다. 다행히 피부가 잘 아물어 깨끗하지만 아직도 그 흉터가 조금 남아있다. 그리고 몇 년 전 장에 염증이 생겨 항생제 치료를 위해 입원했던 것, 그때는 4일 내내 물도 못 먹는 금식을 하고 항생제만 맞았다. 이후로는 일을 하다가 손을 다쳐서 6 바늘을 꿰맨 것. 그게 다였다. 경험이 없는 것들에 내 의지와 상관없이 견디고 해내야 한다는 건 나이가 들어도 긴장이 되는 일 같다.


요즘은 코로나로 병실이 부족해서 소아병동으로 배정을 받게 되었다. 나는 이제 막 태어난 아기, 3살 된 아이와 같은 병실을 쓰게 되었다. 보호자는 한 명만 가능해서 엄마만 병실에 있을 수 있었다. 태어나자마자 수술한 아기의 연약한 울음소리를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새벽 내 울다가 자다가 울다가 자기를 반복했다. 아기의 울음소리는 신기하게도 불편하지 않았다. 나는 입원 내내 잠도 잘 잤다. 3살 아이는 엄마와 떨어지는 것을 무서워했다. 모든 것을 엄마와 함께 했다. 24시간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아이들을 지키는 엄마들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먹먹해졌다. 복도나 화장실에서 링거를 하고 힘없이 걷는 아이들을 보는 것은 내 마음에도 큰 무거움이 됐다. 우연히 아이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아이가 날 보며 뒷걸음질 치기도 했다. 환자복을 입고 꼬질 해진 내 모습에 놀랐을 수도 있고, 아이들에게 사람을 경계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는 걸까. 궁금증이 생기기도 했다.


링거까지 손목에 꽂으니 순식간에 환자가 되어버렸다. 혹시나 심심할까 봐 책도 하나 챙겼는데 그동안 못 잤던 잠이 많았는지 계속 잠이 와서 깨어있는 시간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수술 날 아침이 되니 조금씩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수술을 위해 머리를 양 갈래로 묶으라고 했다. 그리고 드디어 내 차례가 되자 내 침대를 끌고 수술실로 데려갔다. 침대에 누워 수술실로 가는 길이 묘했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고, 드라마에서 봤던 장면들이 스쳤다. 빠르게 지나가는 천장이 이상하게 보였다. 수술실 안으로 들어가면서 언니와 손을 한번 잡았다. '잘하고 와.' 눈물이 났다. 보호자가 한 명만 가능하여 입원 내내 언니와 함께 있었다. 수술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대기 중에 수술용 모자를 씌워주자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심장이 마구 뛰면서 눈물이 계속 났다. 애써 할 수 있다고 다짐하며 눈물을 닦아냈다. 내 뒤로 70세에 가까운 분이 들어왔다. 똑같이 수술 모자를 쓰고 수술실에 들어가기를 기다렸다. 그분도 나처럼 두려웠을까. 두려움 앞에 나이는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보는 수술실은 춥고 낯설었다. 수술실에 누워보니 아빠가 얼마나 무서웠을까 생각해보게 됐다. 아빠도 암수술 전까지는 입원했던 적도, 수술을 해본 적도 없다. 아빠는 가끔 자고 일어나면 아이처럼 우리를 찾았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주는 두려움이 무엇이었을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수술은 잘 끝났지만 예상보다 수술이 길어졌고, 언니는 혼자 보호자 대기실에서 4시간을 기다렸다. 아빠는 암 수술을 12시간 받았었다. 아침에 들어가서 밤이 돼서야 끝났다. 나는 7시에 퇴근하고 달려갔는데 가서도 한참을 기다려서야 수술이 끝났다. 수술 후에 바로 중환자실로 들어가서 아빠를 볼 수 없었지만 우리는 밖에서 수술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의료진들이 수 시간의 수술을 한다는 것이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느껴졌다. 내게 어떤 일이 생기면 아직도 아빠를 생각하게 된다. 나는 마취에서 깨어나자 수술한 곳 보다 마취를 해서 인지 호흡기 때문인지 코가 너무 아팠다. 마취가 덜 깬 상태에서도 코가 너무 아픈데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다. 그건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마취가 깨면 6시간 동안 잠들면 안 된다고 해서 계속 선잠을 잤다. 엄마가 걱정할까 봐 전화도 못했다.


그날 밤에 엄마와 영상통화를 했다. 엄마가 날 보며 울었다. 나는 눈물을 꾹 참았다. 엄마가 우는 건 정말 못 보겠다. 아빠가 떠난 뒤로 엄마 혼자 있게 한 적이 없다. 혼자 집에서 딸을 기다릴 생각을 하니 슬펐다.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고 울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왜 우냐고 무심히 말하고는 괜찮다고 했다. 가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기면 여전히 마음속에서 '왜 나예요, 왜 우리예요.'라는 외침이 올라온다. 어쩌면 예상치 못한 일들이 자주 일어나 지쳤는지도 모른다. 살다 보면 이런저런 것들이 괴롭힐 때가 있지만, 아픈 건 정말이지 싫다. 그저 혹하나 제거했을 뿐인데 큰 일을 겪은 것 같이 무거웠다. 아무래도 처음은 역시 어렵다.


수술한 다음날, 걷는 운동을 하기 위해 소아병동 복도를 걸어 다녔다. 벽 한편에 희망 게시판이 있었다. 귀여운 메모지와 펜이 있었고, 희망을 적어보라는 문구가 있었다. 비뚤어진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다시는 수술하지 않게 해 주세요.' '가족들이 아프지 않고 건강했으면 좋겠습니다.' 나보다 한참 작은 아이들이 수술을 받고 견디고 있다는 것에 대단하기도 하고, 안쓰러웠다. 나도 두렵고 무서웠는데, 그 아이들이 어쩌면 나보다 더 빨리 무언가를 배웠을지도 모른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힘겨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내가 지금 경험한 것들이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는 존중감이 조금 자라났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수술을 해보지 않았을 때는 의학 드라마를 보면서 의사 선생님들께 살려주셔서 감사하다고 하면 마음에 와닿지 않았는데 막상 내가 겪어보니 수술해주신 교수님께 감사한 마음이 많이 들었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사람을 죽게 하는 일들도 많지만 생명을 살리는 일들도 많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애쓰는지 알게 됐다. 병원으로 가는 택시에서 기사님이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병원에 오는 것이 좋아요. 삶과 죽음이 다 있잖아요. 사는 것과 죽는 것이 다 있어서, 그래서 병원이 좋아요.' 어떤 의미로 한 말인지는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생각해보게 하는 말이었다. 사는 것과 죽는 것. 참으로 심오한 일이다.


퇴원하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사랑하는 엄마가 보였다. 엄마는 문을 열어두고 문 앞에서 우리를 기다렸다. 엄마는 나를  안아줬다. 나는 그렇게 무사히 살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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