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by 서울경별진

어느 날 퇴근 후 집 앞 편의점 앞에서 아빠를 만났다. 아빠는 또 술을 한잔 하고 오신 상태였다. 그리고 할 말이 있다며 앉아보라고 했다. 우리는 편의점 앞 테이블에 앉았다. 아빠는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하고 싶은 것을 하게 해 주면 안 되냐고 하셨다. 나는 아빠가 여태까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셨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내 삶과 우리 가족이 모두 아빠의 빚을 갚는데 쓰지 않았나. 나는 나도 모르게 이전에 직원이 여행을 못 가본 내게 농담으로 방콕에 다녀오지 않았냐고 했던 말이 얼마나 내게 상처였는지에 대해 말했다. 별거 아닌 농담이었을 테지만 사실 어디 가본 적 없는 내게는 너무 슬픈 농담이었다. 하지만 아빠는 내게 "너도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 누가 그렇게 살래?"라고 하셨다.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내가 보낸 시간들을 아빠가 인정해주지 않는 것 같았다.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당시 아빠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고, 용서할 마음도 준비되지 않았었다. 용서는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했는데 나는 내 감정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었다. 해결할 수 없을 때는 잠시 방치를 해놓는 것도 방법이었다. 대화를 하고 싶은 이유는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고 타협점이 생기길 바라는 생각으로 할 때가 많다. 하지만 아빠와 나는 대화를 할수록 서로를 더 이해하지 못했다.


어느 날 자우림 김윤아 님의 다큐를 보게 되었는데, 그분의 아버지도 아프셔서 매일 죽음이 자신의 주변에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행복한 가정에서 사랑받고 자란 남편의 모습을 보며 자신도 함께 행복해졌다고 했다. 나는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하게 될 때면 어떻게든 내 삶에도 행복이라는 것을 찾아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니라면 누군가를 보며 스치는 행복이라도 맛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온전히 내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당시 내가 잡을 수 있는 행복은 여전히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보거나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좋아하는 가수의 영상을 보는 것. 그들의 행복한 모습을 보며 그냥 그 순간 웃고 마는 것. 당시에 내게는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무언가에 빠지면 다른 무언가를 잊을 수 있으니 말이다.


한 번쯤은 그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가슴 아래 가운데 부분이 먹먹하게 아픈데 잡을 수도 없어서 눈만 감게 되는, 그리고 이내 그곳에서 뜨겁게 차오르는 아픔이 솟아내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고통과 흐르는 눈물 말이다. 하지만 무엇이 나를 힘들게 하는지 스스로도 알 수조차 없는 상태.


집에만 계셨던 아빠의 차를 다시 주차하기 위해 처음으로 아빠 차 운전석에 앉았다. 낡고 오래된 차에서 나는 노후된 소리와 찾기도 힘든 미러 버튼. 차 곳곳에 난 흔적들이 갑자기 내 마음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우리는 아빠의 차도 거의 타본 적이 없었다. 낡은 차 안이 아버지의 유일한 공간이었을까. 아빠에게도 고되고 혹독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낡은 차 안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내가 살아온 모든 시간은 가난하지만, 비참한 가난이었다. 비참함 속에서도 매 순간 바닥이었다. 바닥에서도 바닥을 기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매 순간 노력하며 살았고 열심히 일했다. 어떨 때는 내 삶이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 아빠가 그토록 미웠는데, 원망했는데, 말라가고 아파하는 아빠를 보면서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픈 건 대신해줄 수가 없었다. 우리에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데, 사랑하는 방법이 서툴렀다. 서툴러서. 그래서 마음이 더 아팠다. 왜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할 때 깨달음이 오는 걸까. 왜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없을 때 후회라는 것을 하게 되는 걸까.


아빠가 떠난 날,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는데 그때 지인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까지 이해하려고 하지 마"

우리는 과연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들과 마주했을 때 이해라는 것을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해라는 것은,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존재를 다 끌어안아버리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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