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별의 유영

비우고 나면 채워지는 것들

by 서울경별진

가끔 답장이 없을 곳에 편지를 쓰고는 한다.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내 이야기가 상대에게 근심이 될까 봐 나를 모르는 곳에 보낸다. 이런 행동은 누가 생각해봐도 정상적인 행동으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 이야기들을 적고 나면 무언가 털어낸 듯 홀가분함에 마음이 편해지곤 했다. 그렇게 편지를 쓰게된 몇 달 후 영화를 한편 보게 되었는데, ‘데몰리션’이라는 영화였다.


남자 주인공이 부인을 사고로 잃은 후 슬픈 마음을 달래 보려 이런저런 일을 하고 다니는 영화였는데, 그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이 나와 똑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었다. 주인공이 병원 자판기에 동전을 넣었는데 자판기 오류로 음료수가 나오지 않았다. 남자는 자판기 회사로 편지를 보낸다. 본인의 말도 안 되는 사연을 적어서 말이다. 그리고 얼마 뒤 자판기 회사 여직원이 남자에게 전화를 했고, 둘은 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내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길 바란다고 했지만, 사람의 심리라는 것이 이런 영화 같은 일은 한 번쯤 일어나길 바라지 않는가. 그러나 그런 일은 역시나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나는 매일 열심히 살아간다. 나는 일하는 내가 좋다. 내가 무언가 해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것도. 내 삶이 없이 남을 위해 사는 건 힘겨운 일이다. 하지만 그 마음 안에 자리 잡은 사랑 때문에. 살아. 살아내는 중이다.


누군가는 내게 말했다. 이제는 조금 나쁜 사람이 되더라도 하고 싶은 것 하고, 먹고 싶은 것 먹고, 여행도 다니라고. 시간이 지나면 너의 헌신은 사람들이 기억할지 몰라도 너의 삶은 네가 원한 삶이 아니었을 수 있다면서. 내가 후회하는 모습이 보기 싫다고 했다. 나도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삶을 살아 본 적이 없어서 시작할 줄을 모른다. 무엇이든 내 것이라 여긴 적이 없었다. 가져본 적 없는 것들. 가질 수 없을 거라는 적나라한 현실들이 욕심이라고 부를 만큼의 작은 어떠한 것들도 마음에 간직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 세상에 두고 갈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단지 내가 살았던 시간에 누구에게든 좋은 기운을 나눠줄 수 있기만 바랄 뿐이다.


나는 아직도 종종 답장이 없을 곳에 편지를 쓰곤 한다. 여전히 답장은 오지 않지만 어떤 감정이든 내 마음을 적어 보내고 나면 편해지기 때문이다. 이기적이지만 이렇게라도 마음을 꺼내놓고 싶다. 비우고 나면 무언가 새로운 것으로 채워질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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