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가족이었다는 것

by 서울경별진

어릴 적, 그러니까 내가 아주 아기였을 때 우리 네 식구가 찍은 사진이 딱 한 장 있는 것 같다. 제대로 된 가족사진이 없다. 예전에는 가족사진이 그렇게 중요한지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가족의 얼굴이 선명하게 남은 사진 한 장이 없다는 것이 슬프다. 이제는 어떻게 해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이 말이다.


아빠는 아프시기 전에 갑자기 가족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다. 동네 사진관에 가족사진 비용을 알아보니 가장 저렴한 것이 20만 원이었다. 액자까지 하면 조금 더 비쌌다. 한창 빚에 허덕일 때라 20만 원이 아쉬워서 사진을 찍지 못했다. 우리는 아빠가 일할 때 썼던 디카와 삼각대를 들고 집 근처 경치 좋은 곳으로 갔다. 우리는 옷도 맞춰 입지 않고 각자가 입고 싶은 옷을 입었다. 아빠는 구경도 안 하고 사진 찍을 곳만 둘러보다가 초록 잔디와 나무가 무성하고 커다란 돌이 있는 곳에 앉았다. 우리는 카메라 앞에 섰다. 나, 아빠, 엄마, 언니. 아빠와 엄마는 돌에 앉고, 언니와 나는 옆에 섰다. 타이머를 맞추고 3~5번 정도 찍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사진이 잘 나올 리가 없었다. 흔들리고, 비뚤어지게 나왔다. 그게 우리의 첫 가족사진이자 마지막이 되었다. 언니는 그 사진을 인화해서 앨범에 넣었다.


'음악으로 감정을 느끼고, 책으로는 다른 세상을 보며, 그림으로 감성을 알아가고, 사진으로 기억한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은 이 모든 것을 담은 한편의 장편 영화와 같다.'


이후로도 우리의 사정은 좋아지지 않았고, 서로가 힘들어 함께 사진을 찍을 생각은 전혀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여전히 사진 찍을 돈이 아쉬웠다. 아빠는 수술을 한 뒤로 머리카락을 길렀다. 어느 날은 단발인 나보다 더 길어서 어깨까지 내려와 머리를 묶고 다니셨다. 또 어느 여름날에는 타투가 해보고 싶다고 해서 타투는 절대 안 되고 스티커를 사드리겠다고 하고 스티커를 사서 아빠와 나란히 붙이고 다녔다. 아빠는 옷이랑 모자도 좋아했다. 긴 머리에 중절모를 즐겨 썼다. 아빠는 가장 좋아하는 스타일을 하고 혼자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어 오셨다. 그리고 커다랗게 인화 후 액자까지 만들어 텔레비전 옆에 올려두셨다. 가장 좋을 때 모습으로 영정사진이라고 찍어온 것이었다. 우리는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이야기하고는 했지만, 결국 그 사진으로 아빠의 마지막을 보냈다. 그리고 비뚤어진 우리의 첫 가족사진은 아빠의 납골당에 함께 있다.


사진으로 우리를 남기지 못한 것이 아쉬워서 종종 생각이 난다. 내가 그림이라도 잘 그렸다면, 옛 화가들처럼 사진 같은 초상화라도 그려뒀을 것이다. 언젠가는 화가에게 가족 그림을 요청해볼 생각이다. 아빠가 곁에 있었을 때 우리 네 식구의 모습을 다시 보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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