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딜레탕트 일기_당신의 상처에 가닿아 연고처럼 스민다면
체호프 단편선중 베로치카 라는 단편을 좋아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좋지 않은 부분은 찾아볼 수가 없다. 동작 하나하나, 말투, 상황들의 묘사들이 오후 4시의 햇살처럼, 또는 밤 10시의 공기처럼 실제적으로 느껴진다. 마치 그들이 걷고 있는 길 옆에 서 있는 나무 뒤에서 그들을 엿보는 것과 같다. 누군가의 모습과 행동을 따뜻하게 적어내는 그의 재능을 닮고 싶다. 이런 구절들을 읽을 때면 메모장이나 사진을 찍어서 보관을 한다. 책을 많이 읽게 되면 어느 순간부터는 내용이 뒤죽박죽이 된다. 그래서 보관해둔 글들은 열어보고 다시 읽고, 그들의 감성을 다시 얻어본다. 같은 구절을 반복적으로 읽어도 좋은 건 달라지지 않는다. 좋은 건 좋아할 수록 더 좋아진다. 나는 그렇다.
'아그뇨프가 베라의 단추 하나하나
주름 하나하나에서 따뜻하고 편안하고
단순한 무언가를 읽을 수 있었던 까닭은
아마도 그녀가 마음에 들어서였을 것이다.
그것은 진실되지 않거나
아름다움에 둔감한 차가운 여자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선량하고 시적인 그 무엇이었다.'
누군가를 이렇게 글로 담아낸다는 것이 낭만적이다. 사실 이 구절 말고도 좋아하는 부분이 많다. 아니, 사실은 이 단편 전체가 좋아서 내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단편의 좋았던 부분을 나누자면 밤이 새도록 함께 책을 읽으며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지도 모른다.
'털실로 짠 숄이 그녀의 어깨에 시무룩하게 걸쳐져 있었다.'
고흐는 언제나 잊혀 가는 보통의 것들을 기억할 수 있도록 그림으로 남기고 싶어 했다. 나는 그림이나, 글이나, 음악이나 이런 자신만의 명확한 방향성이 자신의 감성과 만나 작품이 탄생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예술가들은 보통의 것을 특별하게 보는 사람들이다. 이 예술가들은 내게 다가온 것이 아니라 발견한 것이다. 누군가에게 발견되어 진다는 건 멋진 일이다. 여러 책들과 정보를 검색하며 발견한 나만의 예술가들. 체호프도 그중 하나이다.
'저의 밑줄 중 단 하나라도
당신의 상처에 가닿아 연고처럼 스민다면
그것으로 저는 정말 기쁠 거예요.'
그의 평범하고도 특별한 묘사들과 표현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화려하고 멋진 단어들이 아닌, 보통이라 여겼던 단어들의 배열이 만들어낸 따뜻한 문장들. 밤에 읽기 좋은 베로치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