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1젤라또를 하는 삶
우린 모두 입사 동기다. 2014년 5월 인턴 시절부터 시작해 회사 안팎의 온갖 일들을 함께 겪고 나누면서 평범한 입사 동기의 전우애를 뛰어넘는 끈끈함이 생겼고 서로의 TMI도 꽤 많이 아는 사이다.
2016년 10월의 우리가 이태리에 함께 가게 됐다. 인스타그램에서 우연히 보게 된 '친퀘테레' 사진이 첫 시작이다. 반짝거리는 바다 위로 우뚝 선 절벽 같은 바위 위에 분홍, 노랑, 주황, 연두색의 알록달록한 집들이 사과나무의 사과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유일한 남자 L에 대해 설명하자면
오빠 보다는 언니에 가까운 공감능력에 누구보다 예민하고 기민한 감성을 가졌다. 우리 중 아는 게 제일 많아 모르는 게 있으면 일단 L에게 먼저 물어보는 경우가 많다. 중랑구에서 고양이 한 마리와 함께 사는 싱글남인데, 집에 놓는 가구나 가전, 입고 다니는 옷이나 가방 같은 것에 있어 브랜드를 많이 따지고 돈도 많이 쓴다. 일 년에 한두 번은 혼자 훌쩍 해외여행을 떠나고 일본은 거의 동네 주민처럼 길을 꿰고 있다.
쓸데없는 기억력이 좋아 소름 돋을 때가 많았는데, 예를 들면 우리 중 누군가의 2년 전 소개팅남의 이름을 기억한다거나, 그 남자가 나온 학교나 과 같은 정보들까지 금세 찾아낸다. 심지어는 내가 스무살에 한 커뮤니티 카페에 ‘부츠 팔아요’ 라고 올렸던 게시글까지 찾아냈다.
가끔 촌철살인을 위장한 막말 같은 것들을 거침없이 내뱉는데, 프로불편러 같으면서도 때로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주는 것 같아 속 시원 할 때가 있다. 그래서 일부러 욕할 거리가 생기면 L에게 얘기하기도 한다.
소소한 일상이 특별해지는 순간
스페인 여행을 함께 다녀온 P와 H, 언니와도 같은 L, 그리고 S. S는 현재 우리 중 유일한 유부녀고, 이직도 가장 먼저 했으며, 모든 걸 똑 부러지게 해낸다. 세상 여리여리 상여자 같은 외모인데 성격은 남고생 같이 털털한 매력이 있고 당구, 포켓볼, 사격, 방탈출게임 같은 것들을 좋아한다.
마음이 맞는 입사 동기들끼리 다같이 날짜를 맞춰 해외여행을 간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다행히도 같은 팀이던 나와 L이 다른 회사로 갈라지면서 우리 모두 다 다른 팀 소속이 되어 서로 눈치 안보며 휴가 날짜를 맞추게 됐다. 메신저나 카톡, 회사 카페에서 매일같이 얘기하던 이들과 여행을 떠나니 피렌체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도 여기가 피렌체인지, 보라매인지 잘 실감이 안나 서로 낄낄대기도 했다.
다섯 명의 다 큰 성인이 큰 충돌 없이 무사히 여행을 하는 것도 참 쉽지 않은 일인데, 무슨 복인지 또 찰떡 같이 잘 맞고 별 거 아닌 거에도 자주 빵 터진다. 다섯 명 모두 생김새나 필요가 다 다른 팥빙수 재료들 같은데, 잘만 섞어주면 세상 잘 어우러지는 맛이 난다.
아침은 거의 기차역 샌드위치로 때웠다. 두 명은 기차 시간을 확인하고 짐을 지킨다거나 나머지는 샌드위치랑 커피를 사서 최대한 빠르고 효율적으로 움직였다. 유럽은 빵이 워낙 맛있으니 기차역에서 아무렇게나 파는 연어 샌드위치나 카프레제 샌드위치 같은 별거 아닌 것들이 매일 아침을 행복하게 해줬다.
기차를 타고 3~4 시간 이동할 때마다 서로 찍은 사진을 부지런히 공유했다. 기차에서 샌드위치를 먹고, 찍은 사진을 보면서 낄낄거리고, 내려서 갈 맛집을 찾는, 소소하기 그지 없는 일상들이 다 특별했다.
피렌체의 노란 밤거리를 거니는 일이나, 문 닫기 직전 피자집에 가서 따끈한 마르게리따 두 판을 거뜬히 먹는 일이나, 바다가 보이는 식당에서 테이블이 넘칠 듯이 메뉴를 거하게 시켜놓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오래도록 수다를 떨며 먹는 일이나, 외국인들이 아무도 알아 듣지 못하는 데에서 우리끼리 신나게 한국어로 맘껏 욕을 하며 대화 하는 일이나, 길거리 화가들이 그려놓은 그림이나 상인들의 가죽 팔찌 같은 것들을 마냥 구경하는 일들이 별 거 아닌 듯 해도 온 몸 가득 행복한 순간들이었다.
친퀘테레, 포지타노
이태리어로 ‘친퀘(Cinque)’는 ‘다섯’, ‘테레’(Terre)’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피렌체에서 기차를 타고 2~3시간 정도 달리면 리오마조레, 마나롤라, 코르닐리아, 베르나차, 몬테로소 다섯 개의 마을이 나온다. 우리는 그 중 마나롤라, 베르나차, 몬테로소 세 군데에 들렀는데 작은 마을들을 수놓은 알록달록한 상점들을 구석구석 구경하고, 젤라또를 먹으며 친퀘테레의 하루를 만끽했다.
포지타노는 눈부시다. 새파란 하늘 아래 더 새파란 바다, 그 사이 새하얀 햇빛이 서로 만나서 파란색과 초록색 물감을 반반씩 풀어논 듯한 바다 색을 만든다.
3층짜리 집
에어비엔비를 예약할 땐 미처 몰랐는데 피렌체에서 우리가 머문 숙소는 옥상까지 딸린 근사한 집이었다. 층이 가파른 오래된 나무 계단을 오르면 분홍색 선베드가 놓인 옥상이 나오는데, 저 멀리 두오모 성당의 지붕이 보였다. 그 뒤로는 주홍색, 분홍색의 낡은 지붕들이 어스름한 새벽하늘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이 낭만적이었다. 더 오래 머물지 못해 아쉬웠다.
나는 술을 못 마신다
하루는 P와 S,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만 토스카나 와이너리 투어를 했다. 소수정예의 원데이 투어인데 현지에 거주하는 한국인 인솔자 분이 직접 본인의 차를 운전해 하루를 꼬박 함께 여행한다. 차가 없으면 갈 수 없는 꽤 먼 지역까지 빠르고 쉽게 갈 수 있다는 점과, 이태리 미식여행의 종결이자 와이너리 투어의 대표라 알려진 ‘토스카나 와이너리 투어’를 경험할 수 있다는 이 두 가지만으로도, 일주일 중 하루를 꼬박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다.
토스카나는 피렌체 근교에 위치한 지역인데 이태리의 와인 생산지로도 유명해 크고 작은 와이너리들이 많다. 토스나카의 소도시인 시에나는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된 곳인데 피렌체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붉은 벽돌의 건물들이나 고딕 양식의 대성당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차에 타기 직전에 급하게 가죽 소품 가게에 잠시 들러 가죽 신발, 가죽 가방 같은 것들도 샀다.
이태리를 대표하는 키안티 와인이 생산되는 와이너리에 들러, 생전 처음 보는 와인 창고나 포도즙을 짜내는 기계 같은 것들을 구경했다. 그 후엔 본격적인 점심 코스가 시작되는데 애피타이저-메인요리-디저트에 어울리는 세 종류의 와인이 함께 준비된다. 모든 와인은 마시고 싶을 때까지 계속 마실 수 있다. 나는 원체 술이 몸에 받지 않는 체질이라 술 한잔만 마시면 얼굴이 벌게진다. 이 날도 당연히 딱 한 두잔으로 목까지 벌게졌는데, 와인의 고장까지 와서 와인을 양껏 마시지 못하는 게 세상 그렇게 원통할 수가 없었다.
술을 워낙 좋아하는 P는 이태리에 온 이래로 제일 행복한 표정을 하고는 가장 독한 디저트 와인이 너무 맛있다며 몇 잔이나 마셨다.
로마의 영사관을 가게된 일
H가 여권을 잃어버렸다. 아마도 소매치기를 당한 것 같은데, 급하게 로마에 있는 대사관에서 임시 여권을 발급해야 했다. 우리는 현금이 얼마 없었고 택시는 카드결제가 안되서, 얼마 안 되는 잔돈을 탈탈 털어 택시를 겨우 탔다.
해외에서 한국 영사관은 처음 가봤는데, 일단 들어가자마자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꽤 있는걸 보면 엄청난 안도감과 함께 내가 국적이 있는 사람이란게 새삼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또 불안하고 초조한 우리와는 달리 이런 것쯤은 일도 아니라는 듯 느긋하고 여유로운 대사관 직원들을 보면 괜히 또 한번 안심하게 된다.
H는 근처 지하철 역사 사진부스에서 머리를 양 귀 뒤로 정갈히 넘기고 찍은 여권사진으로 이태리 발 여권을 만들어 무사히 한국에 왔다.
공항에 가기 직전, 콜로세움 앞 돌계단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으며 생각했다. 별 일이 다 있어도 다 어찌저찌 잘 해결된다고.
1일 1젤라또를 실천하는 삶
소소한 일상의 연속이 만들어낸 행복한 이태리 여행을 마치고, 1일 1젤라또를 하며 사는 삶에 대해 생각했다. 죽을 때까지 1일 1젤라또를 하는 삶이란, 오늘은 무슨 맛의 젤라또를 먹을까, 어떤 사이즈로 먹을까 같은 고민을 매일매일 하루에 한 번씩 할 수 있을 만한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하고, 매일 즐겁게 사먹을 수 있는 돈도 있어야 하며, 살찔 걱정에서 자유롭기 위해 건강한 운동도 곁들여야 하며, 맛있는 젤라또 집이 매일 걸어서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하니 근처 환경도 꽤 좋아야 한다. 그러니 죽을 때까지 1일 1젤라또를 하며 산다는 건 분명히 꿈꿀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 생각이 든다.
별다른 걱정 없이, 오늘 먹을 젤라또 맛을 즐겁게 고민하는 날들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