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까지 갔는데 아무 것도 못하고 온 이야기

그 와인은 결국 누가 마셨을까

by 보회미안

여행은 많이 가보고 직접 느끼고 부딪혀봐야 내가 선호하는 여행스타일이 뭔지 알게 되고, 비로소 나만의 여행패턴 같은 것들도 만들어진다.


도시냐 자연이냐

나는 교통, 식당, 숙소 같은 편의시설이 잘 돼 있는 큰 도시를 좋아하면서 동시에 평소 볼 수 없는 이색적인 자연의 절경을 보는 것에 아주 관심이 많다. 그런 의미에서 유럽의 많은 도시들은 이런 것들이 잘 버무려져 조화가 된 훌륭한 여행지다. 나는 높은 타워에서 보는 야경이나 유럽의 유명한 광장, 동남아의 야시장, 종합쇼핑몰 같은 것들엔 별 흥미가 없다.


2015. 5. Barcelona


하루종일 가만히 쉬는 ‘호캉스’ 스타일의 여행은 딱 한 번 해봤는데, 호텔 뷰 보고 감탄한 건 10분 정도고 그 다음엔 방에서 TV 보는 것 밖에 할 게 없어서 나는 재미가 하나도 없었다.


죽이 잘 맞는 동행자들

H, 그리고 P와 함께 여름 휴가를 맞춰 여행을 다니기 시작한 건 2015년부터다. P는 여행루트와 계획을 짜는 것에 타고난 재능이 있어 우리가 노랑풍선의 2세 ‘빨간풍선’ 이라 부른다. 늘 P가 먼저 여행지의 큰 루트를 머리 속에 저장하고 여러가지 경우의 수를 따지거나 우리의 의견을 반영해 최종 여행 계획이 만들어진다. 숫자에 밝아 돈 정산이나 시간 계산도 아주 정확하다.


H는 함께 있으면 긍정의 에너지가 전이되는 분위기 메이커다. 걱정하기 보다는 다른 가능성들을 먼저 생각해 안심을 시킨다. 나와 비슷하게 충동적인 면이 다분히 있는데 지금 하고 싶은 건 지금 해야 직성이 풀린다. 루트가 갑자기 바뀐다거나 길을 잃는다거나 기차를 놓친다거나 하는, 여행지에서 겪을 수 있는 당혹스러운 순간에도 대부분 잘 당황하지 않는다.


나는 성격으로 보면 H와 비슷한 면이 많은데 셋 중에 제일 무던하고 덜렁거린다. 셋 다 적응력도 빠르고 활동적이라 셋이 2015년 처음 같이 여행을 떠나고 서로 죽이 잘 맞는다는 걸 안 이후로 거의 매년 휴가를 함께 가는 여행메이트가 됐다.


입사 1년차의 첫 여름휴가

2015년은 입사 후 처음으로 긴 휴가를 쓸 수 있게 된 해였고, 그 당시 스물 다섯이었던 나는, 활기차고 예술적인 나라 스페인에 너무 너무 가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는 여행 초짜라 유명한 관광지 위주로만 미리 몇 군데 알아두고, 그렇게만 열심히 다닌 것 같다. 그래서인지 여전히 스페인은 또 가고 싶고, 두고 두고 아쉬운 나라다.


퇴근 후 바로 공항버스를 타고 밤 비행기를 타는 일정이었는데, H가 오후 2시 쯤 거의 울기 직전으로 사색이 됐다. 여권을 책상 위에 올려놨는데 팀 선배가 쓱 열어보고는 "야 너 여권 만료됐어"라고 큰 소리로 말했으나, 평소 장난끼가 워낙 많은 분이라 H는 처음에 "아 장난치지 마세요"하면서 안 믿다가, ”야 진짜라니까?" 하며 정색하는 선배 모습에 아 이거 슬슬 이상한데? 싶어 열어봤는데. 진짜로 여권 기간 만료가 돼 있더랬다.


그래도 다행히 우리나라는 모든 절차가 빠른 덕분에, 공항에서 처리를 잘 해줘 무사히 출발을 했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다. 세상 느긋한 유럽이었다면 돈을 허공에 다 날릴 뻔 했다. C 매니저님 감사합니다.


처음 타본 아랍에미리트 항공은 생각보다 쾌적했고 경유지에서 마주쳤던 아랍인들에게선 부내가 났다.


2015. 5. Spain


아침잠과 맞바꾼 최고의 순간

5월의 바르셀로나는 날씨가 완벽하다. 자전거를 빌려 골목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고 소품 가게에서 30유로짜리 귀걸이를 사고, 갓 구운 크로아상을 먹고, 길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마냥 구경했다. 대부분 반라의 상태로 누워있는 바르셀로네타 비치에서 우리는 수영복 없이도 행복했다.


“야 우리가 화요일 3시에 바르셀로나에 있다”

돈 버는 게 좋다는 걸 처음으로 체감하게 됐다. 회사를 벗어나니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던 회사도 금방 잊었다. 뭔가에서 완전히 해방된 자유로움에서 오는 행복을 내내 만끽하면서도 실감이 안나기도 했다.



갈까 말까를 침대에 누워 수십번 고민하다가 결국 일어나 해가 뜰 무렵의 고요한 구엘공원을 본 건, 두고두고 제일 잘 한 일이다. #구엘공원 이라고 해시태그 검색을 하면 많이 나오는 포토스팟 중에 하나가 계단 옆 도마뱀 모양 동상인데, 계단에 사람이 워낙 많아 도마뱀이 절반은 짤리거나 거의 안보인다. 우리는 거의 자리를 펴고 독사진도 수십장 찍고, 아무도 없는 구엘공원 옥상을 뛰어 다니며, 아침잠을 포기하고 부지런을 떨어 얻은 그 특별한 순간을 최고로 만끽했다.


2015. 5. Park Guell


해가 질 즈음 폐장하기 직전 올라간 까사밀라 옥상,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정교함, 완전히 밤이 된 후 마주한 까사바트요의 불빛, 몬주익 언덕 계단에 옹기종기 앉아 저마다 야경을 즐기는 많은 사람들을 구경한 밤, 인삼처럼 생겨 우리 맘대로 인삼바위라 부르던 몬세라트의 절경 모두 경이로웠다.


2015. 5. Casa Milla
2015. 5. Casa Batllo


내일 일정 바꾸자

몬세라트는 원래 계획에 없던 곳이었는데, 자기 전에 침대에 누워 여행책을 보다가 다같이 꽂혀서 급 가게된 곳이다.


우리가 있는 곳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이었고, 가는 교통편을 새로 예약해야 되는 번거로움도 있었는데, 기꺼이 감수하고 만장일치로 가게 됐다.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보는 바위를 봤다.


2015. 5. Monseratt
2015. 5. Montjuic


정작 하고 싶은 건 아무것도 못하고

한국에서는 새벽까지 잘도 깨 있다가 스페인까지 가서는 매일 밤 10시, 11시만 되면 셋 다 눈이 완전히 풀려서 방전된 배터리들처럼 아무 것도 못했다. 그 와중에도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꾸역꾸역 클럽을 가겠다고 천근만근인 몸을 끌고 택시를 탔는데 셋 다 그대로 기절해서 아무도 눈을 제대로 못떴다. 술도 안마셨는데 셋 다 뭐에 취한 듯이 정신을 못차렸다. 결국 문 앞까지 갔다가 다시 그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는 어이없고 웃픈 이야기. 우리는 4년이 지난 지금도 이 때 이야기를 하며 서로를 맘껏 비웃는다. 거기까지 갔는데.


하루는 시체스해변 이라는 누드비치에 갔는데 우리만 유일한 동양인이었다. 누드비치가 생각만큼 그렇게 섹시한 풍경은 아니다. 이런 표현은 좀 그렇지만, 날 것의 살덩이들을 한 번에 마주한 느낌이다. 사람들은 올누드인 상태로 공놀이도 하고 책도 읽고 스킨십도 한다. 그 사이에서 다 벗은 것도 아니고, 다 입은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있었다. 옛날 그리스로마신화 속에 2000년대 현대인이 혼자 타임머신 타고 뻘쭘하게 툭 떨어진 느낌이다. 사실 H는 누드에 도전할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았는데, 서로 낯부끄러웠던 것도 있고, 백인들만 벗고 있는 그 사이에서 동양인인 우리가 벗으면 부담스런 시선이 집중될 것 같기도 했고, 지금 생각해보면 다 쓸데 없는 걱정이다. 다 벗고 바닷물에 들어가는 느낌이 어떨지 너무 궁금한데. 과감하게 도전해 보지 못한게 아쉽다.



그라나다에서 우리가 머문 숙소는 알함브라 궁전이 바로 보이는 기가 막힌 위치에 있었다. 야외로 탁트인 공용 테라스 같은 곳이 있었는데 거기서 고즈넉하게 와인을 마시면서 알함브라의 야경을 보기로 했다. 그 순간을 위해 일부러 그 숙소를 잡은 것도 있다.


2015. 5. Casa Bombo


근처 상점에서 와인도 사오고, 안주도 사왔다. 기분 좋게 샤워하고 팩 한 다음에 와인 마시러 가자 하고는 셋 다 그대로 뻗어 잠이 들었고, 다음날 H와 나는 허무하게 귀국했다. 그 와인은 따지도 못하고 두고 왔다. 아직도 우리는 생각날 때마다 ‘그거 누가 마셨을까’ 하며 낄낄댄다.


2015. 5. Granada
2015. 5. Alhambra


스페인까지 가서 남들 다 하는 것만 정말 열심히 하다가 방전이 돼서, 정작 우리만의 특별한 에피소드는 만들지 못하고 왔다 생각했는데. 막상 이렇게 좋았던 것, 아쉬웠던 것들을 적다 보니 못해서 아쉬웠던 순간들을 기억하는 것도 다 재미가 있구나 싶다.


하지만 스페인까지 가서 밤에 잠만 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아쉽고. 여러 번의 여행을 겪으면서 내가 좋아하는 나만의 여행의 모습들을 점차 찾아가고 있는데, 바르셀로나와 그라나다를 지금 간다면 그 때와는 아주 다른 느낌일거다. 두고두고 아쉬운 바르셀로나와 그라나다는, 더 늦지 않은 시기에 꼭 다시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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