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어도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살고싶다
딱 3년 전 지금, 독일에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10일 앞두고, 낮이고 밤이고 모든 동네가 크리스마스를 노래하던 때였다. 크리스마스 조명과 캐롤로 온통 뒤덮인 유럽을 만끽하는 건 꽤 새로운 경험이었는데, 이렇게나 매일매일 크리스마스를 온 몸으로 느낀건 태어나 처음이었다. 하루종일 작은 동네 구석구석을 구경하고 크리스마스 마켓을 둘러보다가, 지나가다 보이는 카페에 들어가 따끈한 핫초코로 몸을 녹이고, 학센이나 슈니첼 같은 것들에 흑맥주를 곁들여 먹거나, 장을 봐서 간단한 저녁을 만들어 먹고, 누워서 수다를 떨다가 잠드는 날들이었다.
알아서 흘러가던 날들
프랑스 보르도에서 교환학생을 하던 L이 학기를 마치고 한국에 오기 전 유럽 여행을 할 때를 맞춰, 갓 2년차 직장인에 접어든 신입사원 나와 또 다른 L이 겨울 휴가를 내고 L과 독일에서 만나기로 했다.
기숙사 생활 3년 동안 매일같이 하루종일 보고, 서로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또 각자 어떤 스타일인지를 너무 잘 알아서 일부러 맞추려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맞춰지던 일주일이었다. 굳이 여행 중에 뭘 특별하게 하려고 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우리끼리 이렇게 유럽 어딘가에서 만나 크리스마스를 만끽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특별했다.
로맨틱가도를 따라 여행하다
여행지마다 풍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도로들이 있다. 제주도의 1100도로나 애월해안도로, 크로아티아 자다르에서 남쪽 두브로브니크로 내려가는 해안도로 같은. 독일의 '로맨틱가도'는 남부 뷔르츠부르크와 휘센을 연결하는 도로인데 주변 풍경이나 도시의 분위기가 정말 로맨틱 해서 로맨틱가도라 이름 붙은 것도 있고, 계속 가면 로마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프랑크푸르트에서 한시간쯤 달리면 있는 뷔르츠부르크는 로맨틱가도의 시작이면서, 알테마인교에서 바라보는 야경이 정말 근사한 도시다. 알테마인교 초입에는 여러 와인하우스가 있는데 글라스 와인 한 잔씩을 판다. 다리 곳곳에는 와인 한 잔씩을 손에 들고 저마다 자유롭게 뷔르츠부르크를 즐기는 사람들이 보인다. 우리가 갔던 날은 날씨가 유독 많이 흐렸는데 자욱한 안개와 불빛들 사이로 보이는 도시의 먼 풍경들을 구경했다.
수채화의 도시, 로텐부르크, 밤베르크
우리는 뉘른부르크에 숙소를 잡고 당일치기로 근교 소도시인 로텐부르크와 밤베르크를 다녀왔다. 출발부터 컨디션이 안좋았던 L은 밤베르크에 가는 날 아침에 몸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 집에 있겠다 했는데, 겨우 겨우 설득을 해 데리고 나왔다.
유럽의 소도시들은 다 저마다의 특색이 있다. 크기로만 보면 반나절이면 충분히 다 볼 정도로 아주 작은 규모의 도시들이 많은데, 그 작은 데에도 구석구석 도시마다의 특색이 묻어있는게 신기하다.
독일의 아기자기한 소도시로 유명한 로텐부르크와 밤베르크는, 수채화의 도시다. 누군가 알록달록 물감칠을 한 그림을 입체로 만들어 볼록 튀어나게 한 것 마냥, 선명하고 생동감 넘치는 파스텔톤의 색들이 도시마다 동동 떠다닌다.
나는 특히 로텐부르크가 좋았다. 시청사 종탑에 올라가 내려다본 풍경은 나의 독일여행 뷰 중 손에 꼽히는데, 네모난 비스킷들이 가지런히 정렬돼 있는 것처럼 똑같이 찍어낸 모양이 실제 내가 보는 뷰라고 느껴지기 보다는, 그림을 보는 것 같이 이상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로텐부르크는 슈니발렌의 고장이기도 하다. 색소를 가득 입힌 색색깔의 슈니발렌을 인테리어 소품 보듯 꼼꼼히 구경하고 골랐다.
글리봐인과 회전목마
독일은 12월 한달 내내 크리스마스다. 길 한복판에서 낮부터 밤까지 열리는 크리스마스 마켓에서는 따뜻한 와인 '글리봐인'과 갓 구운 소시지, 각종 크리스마스 장식품들을 판다. 특히 길거리에서 크리스마스 캐롤을 연주하는 버스킹 공연들이 줄지어 이어지는데, 산타 모자를 쓴 할아버지들의 트럼펫 공연이나, 광장 전체를 울리는 중창단의 합창, 그 노래를 따라 부르는 사람들의 떼창들. 광장 계단에 아무렇게나 앉아 슈니발렌을 부숴 먹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했다.
4시면 해가 지는 유럽의 겨울
유럽을 겨울에 간 건 처음이었다. 오후 3시 반만 되도 금세 어스름해지고, 4시부터 5시 사이면 밤이 찾아온다. 해가 빨리 진다고는 누누히 들었는데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상점도 빨리 닫고, 날씨도 추워서 여행자들에겐 참 좋지 않은 조건이다. 특히 도시 이동을 하는 날에는 오전에 기차 이동시간으로 쓰고 나면 밝은 낮 시간에 돌아다니며 구경할 시간은 고작 3~4 시간 정도다.
해가 지면 깜깜한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걸어 다녔던 우리가, 지금 되돌아보면 꽤 대견하다. 그래서인지 초저녁부터 방에 들어와 따뜻하게 몸을 녹이던 시간들이 노곤노곤하고 아늑했다.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나이
나이가 많이 들어서도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살고 싶다. 크리스찬인 내게 크리스마스가 갖는 가장 큰 의미는 예수님이 태어난 날인데, 꼭 종교를 떠나서, 크리스마스 자체가 주는 축제의 분위기 때문에 친구들과 연말 파티를 한다거나, 남자친구와 특별한 데이트를 한다거나, 좋아하는 가수의 크리스마스 콘서트나 공연을 보러 가기도 한다. 독일의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일주일을 지내며 느꼈다. 국적이나 문화, 나이, 성별이 모두 다른 이들이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흥을 내고, 길거리나 집을 꾸미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한달 내내 파티를 하고, 빨강 초록 옷을 맞춰 입는 날이, 일년 중 크리스마스 말고 또 있을까.
3년 전엔 독일에서, 2년 전엔 도쿄에서, 그리고 작년엔 서울에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느꼈었다. 올해는 어디서 뭘 할지 아직은 모르겠다만, 여전히 크리스마스 트리를 보고 캐롤을 듣는 일이 설레고 신이 나는게 참 다행이다. 나이가 아주 많이 들어서도 무뎌지지 않으면 좋겠고, 나랑 같이 한살 한살 나이를 먹어가는 내 친구들도 그랬음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