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와인 빨며 일몰 보던 날들
여름을 좋아하는 나는 겨울이 너무 지루하다. 겨울 내내 느껴야 하는 차가운 공기가 싫다. 옷이 무겁고 두꺼우니 몸도 움츠러들고 괜히 축축 쳐지는 느낌도 싫다. 유독 길고 지루했던 올해의 겨울을 힘겹게 버텨내며 2월 말 겨울의 끝자락 H, P와 함께 보라카이로 떠났다. 지겨운 겨울을 벗어날 돌파구였다.
나는 여름 옷 입는 걸 좋아한다. 패턴이나 소재가 겨울 옷보다 훨씬 경쾌하다. 1월부터 다이어트도 해서 비키니 입을 준비도 했다. 우리 가서 정말 브라만 입고 다니자며 천 쪼가리에 가까운 여름 옷들을 캐리어에 꾹꾹 눌러 담았다. 다 천 쪼가리 뿐이었는데 캐리어가 왜 꽉 찼는지...
H, P 와 함께 하는 해외여행은 어느덧 네번째 인데 오로지 휴양을 위해 아무 계획 없이 떠난 여행은 처음이었다. 가서 그냥 호텔에서 조식 먹고 원없이 수영하고, 바닷가에서 낮잠 자고, 헬스장에서 운동도 하자며 연신 물개박수를 쳐댔다. 창 밖으로 바다를 보며 땀흘리며 운동하는 존멋인 우리를 상상하며 레깅스에 브라탑도 챙겨갔다(결국 조식 먹을 때만 입었다는 이야기..) 공항 면세에서 산 팩와인을 비행기에서 하나씩 쪽쪽 빨면서 가는 길부터 들썩들썩 했다. 아 그냥 비행기만 타도 이렇게 신이 난다니.
첫 숙소였던 헤난 팜비치는 한가운데 풀을 빙 둘러싸고 정사각형 모양으로 객실들이 배치돼 있는데 우리는 놀기 좋게 1층 pool access 방으로 잡았다. 발코니 문을 열면 바로 풀장이 나오는... 천국의 구조였다.
조식이 시작되는 아침 댓바람부터 식당에 갔다. 마치 아침 밥 시간만을 기다려온 승냥이들처럼...(사실 맞다) 화이트비치를 보며 세상 느긋하고 느릿느릿한 아침 밥을 먹었다. 이렇게 여유롭게 조식 먹는 시간이 제일 행복했다. 한국의 2월에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쨍한 햇살을 그대로 쬐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호텔 풀에서 코코넛 주스도 사먹고 수영도 하고 낮잠도 잤다.
화이트비치에서는 한발자국 움직일 때마다 호객행위를 당했다. 현지인들 호객행위의 특징은 앞뒤 없이 일단 다짜고짜 들이대는 거다. “호핑투어?” “누나 선셋투어?” “돗자리?” 등등 쉴새 없이 한국말로 영업하는 질리는 호객력(?)에 나중엔 정말... 진절머리가 났다. 욕이 나올 뻔 했다. 제발 우리의 여유로운 저녁을 방해하지 말아줘...
보라카이 하면 잊을 수 없는 게 툭툭이와 아이존이다. 안전장치 하나 없이 툭툭이 뒷자리에 엉덩이만 걸치고 생명줄을 붙잡듯 양손으로 꽉 손잡이를 잡고 가로등 없는 새까만 밤길을 쌩쌩 달릴 때마다 생각했다. 여기서 손 놓으면 진짜 저세상이다. 모든 먼지와 모래바람을 온 얼굴과 몸에 뒤집어 썼지만 먼지 막는 것보다 손잡이 꽉 잡는 게 우선이었다. 운전하는 친구들은 하나같이 뒤를 돌아보는 일이 없었다. 손님들 걱정이 될 법도 한데... 지도도 네비도 하나 없이 아주 익숙하고 무심하게 운전만 했다.
아이존은 H의 언니가 보라카이에서 친해진 현지 가이드 겸 친구다. 우리의 보라카이 일정 내내 함께해 줬는데 거의 프라이빗 가이드에 가까웠다. 한국말을 아주 잘하고 한국말로 카카오톡도 하고 한국 노래도 흥얼거린다. 손목에는 태극기 모양 타투도 하고 있다. 아이존은 현지인만 아는 맛집, 마사지샵, 펍 같은 곳에 우리를 아주 잘 데려다주고 짐도 다 들어줬다.
바다 위에서 해지는 걸 보기 위해 탔으나 정작 해지기 전에 내려버린 선셋투어, 처음에 극강의 공포를 느끼다가 가이드 손 꼭 붙잡고 점차 심신의 안정을 찾아간 스쿠버다이빙, 온몸이 흐물흐물 녹아 내리는 기분이 들었던 스톤 마사지. 다 아이존이 인도해줬다. 아이존 없었으면 보라카이 여행 가능했나...
두번째 간 숙소는 모벤픽 리조트였는데 이곳 프라이빗 비치에 가장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화이트비치와 비교가 안될 정도로 조용하고 사람이 거의 없다. 역시 돈을 들인 보람이 있다. 일단 호객행위가 없는 게 제일 좋았다. 아무도 없는 해변에서 우리는 뭔가에 홀린 듯 플랭크부터 시작해서 요가에서 배운 별별 자세를 하면서 모랫바닥과 거의 혼연일체 돼서 놀았다. 참 이런걸 보면... 우리의 여행 스타일이 정말 잘 맞는다고 느낀다. H가 바다수영을 열심히 하는 동안 P와 나는 그늘에 누워서 음악 듣고 낮잠 자고 와인도 먹고. 무릉도원이 따로 없었다.
낮잠을 자며 또 생각했다. 돈을 많이 벌어야 돼.
보라카이의 일몰은 정말 아름답다. 주황색 물감 한 방울을 하늘에 톡 뿌린 듯이 서서히 아주 천천히 하늘이 붉게 물들어 가는데 그 모습이 바닷물에 반사돼 잔잔하게 넘실거렸다. 망고주스를 마시면서 노을 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가 해지는 걸 이렇게 가만히 보고 있던 때가 과연 언제였던가 싶었다. 매일 망고주스에 팩와인이나 쪽쪽 빨면서 바닷가에 누워서 노을 보는 인생은 어떠려나... 삼삼하려나...
보라카이에 한번 다녀온 사람들이 열이면 열 하나같이 다 보라카이를 강추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특별하게 한 건 없는데 뭔가 활력의 기운을 얻고 온 기분, 그리고 머무는 자체로 행복했던 곳. 물도 깨끗하고 일몰도 아름답고 물가도 저렴한 곳. 비행기로 4시간만 가면 가까운 데에 이런 곳이 있다는 건 행운이다. 우리는 앞으로 틈만 나면 보라카이에 갈 궁리를 하기로 약속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보라카이에 가고 싶다. 앓다 죽을 보라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