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떠난 4박 5일 뚜벅이 제주여행
[받은 글]
4월 11일 임시공휴일 확정 - 곧 행안부 엠바고 뜰 예정
-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
2월 말에 받은 찌라시. 그리고 바로 11일 제주도로 떠나는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임시공휴일 확정 안되면 휴가 내지 뭐. (그리고 진짜 현실이 됨)
숙소는 전부터 꼭 가보고 싶었던 ‘플레이스캠프’로 4박을 잡았다. 컨셉 확실했던 카세트테이프룸.
그리고 한 달이 흘렀고, 가기 전날까지 아무 계획도 없었다. 플레이스캠프에서 매일 열리는 아침요가 클래스만 미리 결제를 해놓고, 맛집 같은 것도 당연히 안 찾아봤다. 제주에서의 아침 요가라니!
대신에 가서 읽을 책은 아주 고심해서 골랐다. 최근에 산 ‘일간이슬아’를 넣었다.
혼자 한 4박 5일 뚜벅이 제주여행 시작.
숙소 체크인 하자마자 든 두 가지 생각.
아, 오길 정말정말 정말 잘했다. 두번세번 잘했다. 또 하나는, 혼자 오길 정말정말정말 정말정말 잘했다. 충동적으로 비행기 티켓 끊은 내 자신 칭찬해.
카세트테이프룸은 빈티지한 카세트테이프 여러 개와 붐박스가 비치돼 있는 룸이다. 이런 공간을 만들어내고 이런 개성있는 콘텐츠로 채운 아이디어가 너무 근사하다. 플레이스캠프 경영지원 직원이자 제주도에 정착하신 한 평범한 가장 분이 기증한 카세트테이프라는데, 다 직접 녹음을 하셨단다. 장르는 팝부터 클래식, 재즈, 락까지. 테이프 A, B 앞뒷면에 몇 분 몇 초마다 어떤 노래가 나오는지 직접 적혀있어 듣는 재미가 쏠쏠했다. 듣다가 중간에 음질이 급격히 안 좋아지는 찰나도 있고 툭 끊기기도 했다. 이것이 투박한 빈티지의 멋이군... 하면서 노래를 이것저것 듣다가 생각해보니 나도 테이프 세대(god 앨범)네...
4박 5일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그 와중에 나만의 반복되는 일상을 만드는 일이 좋았다. 아침 8시 반마다 하는 아침 요가 클래스에 참여했다. 요가 클래스 공간은 제주답게 꾸며져 있어 아침마다의 시간이 더 평온했다. 바닥엔 인조 잔디가 깔려있었고 사방은 탁 트인 통유리에 수업이 끝날 때 주는 따뜻한 차 한 잔까지. 서울에서 아침 요가를 시작한 지 이제 딱 한 달이 되어간다. 내 몸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라 소중하다. 제주에서의 아침 요가도 그랬다.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그 전날 밤늦게까지 먹은 것들을 참회하는 시간이 된 것 같지만...
요가를 끝낸 뒤엔 바로 옆에 있는 도렐커피와 도렐베이커스를 순회했다. 빵이 막 나오는 시간과 맞물렸는데 도렐베이커스 앙버터는 정말... 천상의 맛이다. 길가다 아무나 붙잡고 추천해주고 싶다. “빵은 곧 옆구리살, 겨살, 그리고 뱃살입니다” 트레이너쌤의 명언이 귓가에 맴맴 돌았으나 제주에 머문 4일은 그냥 모든 걸 내려놓고 빵순이로 살았다. 옆구리에 살 좀 찌면 어때 앙버터가 이렇게 맛있는데.
아침 9시에서 10시 사이. 앙버터를 포장해서 그 옆 도렐카페 2층에 앉아서 조용히 책을 읽었다. 진짜 말도 안 되게 행복하고 소중한 시간. 눈 뜨자마자 씻지도 않고 옷만 주섬주섬 챙겨 입고 나와서 요가하고 바로 카페에 앉아있으니 잠시 여기 주민이 된 것 같은 상상도 해보고. 혼자 있으니 어떤 일정에 구애받지 않아도 되고 카페 가서 책을 읽을 때도 누군가의 양해를 구하지 않아도 되는 게 편했다.
올레길은 1코스 완주, 2코스 절반을 걸었다. 합쳐서 총 20km가 넘는 거리 동안 올레길에서 본 올레꾼은 단 2명뿐이었다. 올레길을 요즘엔 많이들 안 걷는구나. 그것도 1코스 시작 안내소에서 잠시 스쳐 지나갔으니 사실 길을 걸으며 만난 올레꾼은 0명인 셈이다. 초반엔 완벽한 봄 날씨와 제주의 풍경을 구석구석 구경하느라 무서움을 느낄 새 조차 없었다. 길에 아무도 없으니 혼자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흥얼거리며 걷는데 이런 행복이 또 있을까 싶었다.
그러다 문득 바람소리 빼고 아무것도 안 들리는 고요한 길목에 접어들 때나, 길가에 아무렇게나 풀어놓은 큰 개들이 지나갈 때, 오름 오르는 길에 만난 뜻밖의 나무 숲... 이런 데에서는 누가 여기서 날 잡아가면 이렇게 그대로 생을 마감하겠구나 싶었다.
올레길에서 혼자 걷는 여자 대상으로 일어난 사고들을 뉴스에서 많이 접했다. 그런 뉴스를 볼 때마다 나는 아니겠지, 우리 엄마는 아니겠지, 생각하고 넘겼는데 막상 혼자 걸으니 무서웠고 누군가에겐 내가 아주 만만한 표적이 될 수 있겠다 싶었다. 내가 요즘 아무리 웨이트를 열심히 해서 힘이 세졌다 해도 남자 한두 명 달려들면 아무런 방어도 못할 게 뻔하다. “여자 혼자 다니기 위험하지 않아요?” “여자 혼자 걸으면 무섭지 않아요?” 만나는 가게 사장님들마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여자 혼자’ 라는 게 꼭 들어간다. 여자 혼자 여행해도 하나도 안 무서운 세상에 살고 싶다. 고요한 순간엔 사방을 두리번거려야 하고 해가 지면 무조건 실내로 들어가야 하고. 여자 혼자 돌아다녀도 전혀 불편하지 않고 불안하지 않은 세상에 살고 싶다.
올레 1코스는 시흥초등학교에서 시작해 두 개의 오름을 오르고 해안도로를 따라 광치기 해변까지 이어지는 코스다. 오름 정상에서는 성산일출봉과 우도가 한눈에 보이고 마지막에는 해안도로를 천천히 걸을 수도 있으니 제주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최고의 코스라고 본다.
어쩌다 보니 제주의 일출과 일몰을 모두 챙겨보게 됐다. 용눈이오름 트레킹을 신청해서 참여했는데 가이드 분이 일출 비밀 명소를 알려줬다. 날씨 운이 정말로 좋으면 성산일출봉과 뜨는 해를 한눈에 그림처럼 담을 수 있다 하셨다. 바로 다음날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 그곳으로 갔다. 해 뜨는 시간은 6시 8분. 고요한 새벽 바다엔 나 혼자였고, 저 멀리 성산일출봉이 보였다. 하늘이 서서히 붉게 물들기 시작했는데 해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사방은 이미 밝아졌고 구름이 껴서 해가 안 보이나 보다, 손시렵다(카메라로 계속 영상을 찍고 있었다), 내일 다시 와야지, 하고 일어나려는데. 동그란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정면으로 보기엔 눈이 부실 정도로 해가 뜨겁게 오르는 장면을 나 혼자 가만히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울컥하기도 하고 아름답고 경이롭고. 많은 생각이 교차했던 새벽이었다.
걷기 여행을 하다 보니 뜻밖의 귀한 풍경과 공간들을 만났다. 차를 타고 다니면 쓱 지나치기 쉬운 길가 구석구석의 풍경들이나 골목 사이에 있는 작은 카페, 책방들.
1. 이름이 기억 안나는 카페...
올레 1코스 마무리 지점 직전에 천천히 일몰을 보고 싶어서 적당한 장소를 찾다가 들른 카페. 멀리서 봤는데 루프탑이 있길래 홀린 듯 들어갔는데 정말 행복했다. 그네를 타고 일몰을 보던 꿈같던 순간.
2. 모뉴에트
올레 1코스를 걷던 중 종달리 부근이었다. 잘 꾸며놓은 유채꽃밭이 갑자기 나와서 멈춰서 유채꽃을 찍고 있는데 그 바로 옆에 연노란색 작은 카페가 있었다. 모뉴에트. 이름도 맘에 들고 인테리어도 예쁠 것 같아서 들어갔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마들렌과 까눌레가 유명한 맛집이었다. 무려 한라산 까눌레를 팔았다.
3. 어반가라지
올레 2코스 중간에는 정말 한적한 시골 동네가 나온다. 논밭부터 노인복지회관 같은 것들이 나오다가 큰 컨테이너 창고 같은 걸 봤는데 ‘어반가라지’ 라고 쓰여있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다가, 앞에 ‘열었슴’ 이라고 적힌 팻말을 봤는데... 뭔가 저 ‘슴’도 그렇고 폰트도 그렇고, 범상치가 않아서 들어가 보고 싶어 졌다.
큰 창고를 개조해서 만든 것 같은 카페였는데 소품 하나하나 신경 써서 인테리어 한 티가 났다. ‘우도땅콩 아인슈페너’라는 요즘 카페 느낌의 힙한 메뉴를 시키고, 사장님 취향인 듯한 EDM 비쥐엠을 들으며 갑자기 훅 들어온 최신 문물에 발끝으로 내적 흥을 한껏 뿜고 나왔다.
4. 책방무사
2코스 루트가 너무 지루해서 중간에 내 맘대로 길을 틀었다. 버스가 다니는 길목으로 가볼까 싶어 그냥 걸어가다가 ‘아름상회’ 간판을 봤다. 간판 아래엔 ‘책방무사’ 라고 작게 적혀있었는데 사진집부터 각종 장르의 책과 매거진, 필름 카메라까지 파는 독립서점이었다.
알고 보니 가수 요조의 책방이라고. 계산대에 요조님 계셨으나... 수줍어서 아무 말 못 했다. 한 권 한 권 다 구경하다 보니 서서 2시간을 보냈고. 사고 싶은 건 많았으나 책 두권 추려서 샀다. 해방촌 책방 스토리지북앤필름 이야기인 ‘내가 책방 주인이 되다니’, 그리고 계간홀로의 ‘이것도 책인가요?’. 두 권을 제주에서 다 읽었는데 해방촌 책방도 가보고 싶어 졌고, 계간홀로도 읽어보고 싶어 졌다. 이렇게 또 재미있는 할 일들이 늘어갑니다.
5. 에곤카페
마지막 날 저녁 메뉴였던 고등어스시집 브레이크 타임을 때우러 들어간 근처 카페. 여기도 우연히 간 곳인데, 여기 때문에 성산읍에 다시 오고 싶을 정도로 머무는 순간에도 계속 머물고 싶은 공간과 분위기였다. 사장님이 에곤 쉴레의 어마어마한 팬이신지 카페 이름도 ‘에곤’이고 내부를 장식한 소품 하나하나에서도 독특한 감각과 센스가 느껴졌다. 자기 취향이 이렇게 오롯이 드러나는 공간을 갖는다는 게 얼마나 근사한 일인지, 내가 이런 공간을 갖게 된다면 난 어떤 것들로 채우려나.
파스텔부터 콩테, 색연필까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공간도 있다. 혼자 있어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 수 있는 곳.
구석에 조용히 자리를 잡고 앉아 책을 읽다가 저녁을 먹고 다시 오겠다고 사장님께 말씀드렸는데, 갑자기 선뜻 자전거를 빌려주시겠다 하셨다. 오 이게 웬 떡. 덕분에 자전거를 타고 섭지코지까지 가서 일몰을 보고 왔다. 뭐지... 혼자 자전거 타고 해지는 거 보는데 리틀포레스트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이 특별한 기분...
‘타쿠마스시’에서 너무 만족스러운 저녁식사를 하고 깜깜해질 때쯤 다시 찾아간 에곤카페. 그리고 맥주 한잔 시켜서 밤 11시까지 책 읽다 나왔다. 다 서울에서도 할 수 있는 것들인데 왜 서울에선 이런 여유가 없을까. 왜지. 곰곰이 생각해봐도 모르겠음.
하루가 이렇게 느릿느릿 천천히 갈 수 있다는 걸 다시금 느낀 4박 5일의 여행. 나는 의외로 혼자 노는 걸 아주 잘하는 사람이라는 것과, 혼자 있는 시간을 생각보다 많이 좋아하는 것도 알게 됐다.
제주에서의 하루하루는 아주 느리게 갔지만, 4박 5일은 너무 짧고 아쉬웠다. 조만간 또 혼자 제주에 가야겠다. 다음번에도 성산읍에 머물러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