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끝은 곧.
2월 3일, 말뿐인 입춘. 아직 추위도 채 가시지 않은 날씨였다. 숨을 후하고 불면 희끄무레한 입김이 나왔고 찬기가 스민 손끝은 봉숭아 물을 들인 것 마냥 붉어졌다. 잠에서 깨기도 전에 담요를 덮고 마루에 걸터앉아 녹지 않아 버석한 맨땅에 발끝을 톡톡 두드렸다. 찬 바람만 드나드는 대문만 바라보는 게 언젠가부터 일상이 되었다. 봄은 한 해의 시작이다. 그러니까 오늘이라면 그 사람도 어련히 와 주지 않을까 싶어서. 작게 부푼 기대감에 까맣고 둥근 눈동자가 햇빛을 받아 반짝하고 빛났다.
2월 11일. 봄이 오는 것처럼 만나러 온다고 했는데, 아니 봄이 오기 전에 만나자고 했었는데. 날짜로는 입춘이 지났지만 기온은 아직 영하를 웃도니 아직 겨울이라며 조급한 마음을 잠시 달래 두었다. 동경에서 비롯된 구원. 애정에서 비롯된 사랑 같은 것들로 인해 전부 소진해 버린 모난 마음에는 더 이상 누군가를 위한 공간이 남아있지 않았다. 설령 여유분의 마음이 있다고 해도 그 자리를 내어주지 못할 만큼 지쳐있었다. 마당 나뭇가지에 걸린 동그란 해가 유난히 부러웠다. 마음도 모난 곳 없이 얼룩진 곳 없이 저렇게 하얗고 둥글 수는 없을까.
2월 17일. 그날 이후 며칠을 슬픔에 담가두었다. 담가둔 감정을 꺼내어 돌볼 생각은 차마 하지 못했다. 그 행동이 스스로에게 얼마큼 상처를 낼 수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잠에서 깨자마자 눈물을 똑똑 흘렀다는 것 또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세상의 모든 사랑이 자신을 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몰랐다. 사랑받고 싶었고 사랑을 주고 싶었으니 그럴 수 있는 대상이 필요했던 것뿐이었다. 그렇지만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웅크린 채 다시 잠을 청하는 가엾은 미인은 이 사실을 느지막이 깨달았다.
2월 27일. 오늘은 샤콘느를 들었다. 빙글 돌아가는 나선형 계단처럼 화성 모형을 반복하는 단조로운 멜로디가 주는 안정감이 좋았다. 어떤 노래를 듣고 있으면 항상 그에 맞춰 이따금씩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어떤 날은 거대한 파도가 그 몸집을 안다는 것처럼 느리게 일렁였다. 또 어떤 날은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 잔잔 바리 꽃잎이 바람을 타고 살랑이는 장면이었다. 오늘 들은 샤콘느의 계절은 한 겨울이었다. 큼지막한 함박눈이 떨어지는 고요한 회색 하늘을 눈에 담았다.
3월 9일. 겉치레뿐인 사랑을 하지 못한다. 말이 겉치레이지 진심이 아닌 무언가를 한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었다. 왈칵 쏟아져 버리는 진심을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조금 편해졌으면 하는 욕심은 성치 못한 마음에 보란 듯 구김을 만들었다. 구겨진 종이의 주름은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한 번 흔적이 남아버린 마음은 되돌릴 수 없어 버려야 했으니 그건 그거대로 번거로웠다.
그러나 후회는 선택하는 순간에 찾아오지 않는다.
문득 한여름의 쓰레기 소각장이 떠올랐다. 날씨와 중첩된 열기에 땀을 뻘뻘 흘리며 남은 기억들을 전부 태웠다. 파란 하늘과 대비되는 검은 연기가 공기 중으로 폴폴 올라가 흩어졌다.
근처 바닷가로 갔다. 미지근한 물에 손을 담갔다. 양손에 한가득 담아 올렸던 물이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 손 틈 사이로 흘러 팔을 따라 뚝뚝 떨어졌다.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양옆으로 곧게 뻗은 눈썹 끝이 축 처졌다. 그리고 머지않아 잔뜩 슬퍼진 눈에 울망 울망 눈물을 매달았다. 이를 달래줄 누군가가 옆에 있으면 좋으련만 애석하게도 그날은 오늘처럼 혼자였다.
4월 1일. 제일 최근의 글을 기점으로 꽤 많은 날이 지았다. 2월 일기를 처음 쓰던 날처럼 일어나자마자 두꺼운 담요를 칭칭 두르고 마루에 걸터앉았다. 아직 꽃샘추위가 기승이지만 제법 봄 냄새가 났다. 별안간 어린 길고양이가 마루 밑으로 떨어진 다리에 머리를 비벼댔다. 담장에 놓인 화분을 타고 마당으로 들어온 것이다. 아직 찬기가 남아있는 땅인 줄도 모르고 망설임 없이 고양이와 눈을 맞췄다. 그렇게 꽤 오랫동안 옅은 갈색 무늬가 있는 고양이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대문에 걸려있던 해가 어느덧 머리 꼭대기에 올라왔다. 한참을 같은 자세로 있었던 구부정한 허리가 불편해 팔을 위로 올려 기지개를 켜려던 찰나 다른 인영 하나가 이쪽으로 비척이며 걸어왔다. 그리고 그 옆에 앉아 그르릉 거리는 고양이의 머리를 연신 쓸어내렸다. 음울이 스며있던 미인의 입가에 언제 그랬냐는 듯 큰 호선이 그려졌다.
기다리면 봄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