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gress
이곳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보란 듯이 내려쬐는 열기 아래에 서있는 나는 날것에 가까웠다. 이토록 무력할지라도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야 했다. 메말라 버석해진 모래알들이 뒹구는 지면을 맨발로 디뎠다. 알알이 느껴지는 까끌거리는 감촉. 양 볼을 날카롭게 스친 뜨거운 모래바람이 숲처럼 길게 뻗은 속눈썹 사이사이를 파고들었다. 오아시스는 물론 신기루 따위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곳에 구원은 없다.
장면이 전환되었다.
금방이라도 흰 눈을 펑펑 쏟아 내릴 것 같은 하늘 아래에 다다랐다. 모든 게 전소하고 회색 재만 남은 모양새. 집어삼켜진 세상의 끄트머리. 멸망. 모든 것의 끝과 시작. 이곳에 사랑은 없다.
장면이 전환되었다.
신원 미상의 사람이 피가 다 빠져나간 채 길바닥에 죽어있다. 그것은 섬뜩할 만큼 잘 만들어낸 모형에 가까웠으며 붉은 피를 뿜어대던 심장은 차갑게 굳었으니 숨이 붙어있지 않아 인간이 아니다. 떨어지는 싸락눈이 포근히 나비처럼 내려앉는다. 어느 누구도 그것을 돌봐주지 않는다. 이곳에 온기는 없다.
장면이 전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