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글고민

by 서우

연휴가 끝나고 나서 소식이 잠깐 끊겼던 오랜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000, 잘 있지? 회사는 어때?"

반가운 목소리였다. 나도 그 친구에게 잘 지내냐고 물었다.

"우리 회사 이제 희망퇴직자 받아."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슬픔과 체념이 섞여 있었다.

"우리 부서 사람들도 벌써 옷 벗은 사람들이 많아."

---------

■ 브런치에 작가 신청을 하고 '주마다 글을 한 편씩 써보자'라고 다짐했던 것도 어느덧 1년을 가리키고 있던 시점이었다.


친구에게서 연락이 온 날 밤, ‘언젠가 나도 잘릴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내가 이 1년 동안 무엇을 붙잡고 살아왔는지 돌아보고 싶어졌다. 밤늦게 브런치에 썼던 글들을 다시 열어봤다.


사실 브런치를 시작한 건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어보면서 후원을 받고, 그게 책으로도 출판되는 모습을 보니 재미있어 보여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 무엇보다 이제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없는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나서고 싶었다.


하나둘씩 친한 친구들의 입에서 직장에서 퇴사하거나 나간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나도 내가 가야 하는 방향성을 찾아야겠다 다짐했었다.


그러면서 글고민을 했던 것 같다.


브런치를 연재하기 전에도 매일 일기장을 적어왔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지나면서 달라지는 내 마음속 이야기들을 간직한 지 어느덧 3년이 지났다.


처음 펜을 든 것은 내가 너무 괴로워서, 불행해서.


글로 적어내지 않으면 도저히 견디지 못할 것 같아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하루, 이틀이 모여 1년이 되고, 2년이 지나니 일기로 채운 노트만 두꺼운 책 1권 분량이 되었다.


분명 내가 너무 불행해서 쓰기 시작한 일기였는데…하나 둘 차곡히 써 내려가면서 내가 너무 행복한 사람인 걸 깨달았다.


나라는 사람을 기록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겪으면서, 내게는 다양한 사람들과 얽힌 추억들을 간직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사계절이 지나면서 변화하는 내 감정을 기록하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찾아가는 과정을 겪고 있다. 한편으로는 두려우면서 한편으로는 성장하는 내 모습이 보여서 즐거웠다.


브런치 작가를 신청하고 나서는 하나의 글을 완성해 보는 경험을 하고, 소설의 한 에피소드를 끝내 보면서 '완성'의 시원섭섭함을 알게 되었다. 한 에피소드를 끝내고 나면 "그래도 끝까지 썼다"는 뿌듯함 속에서도 "아, 이 전개는 다시 점검해 볼 걸" 하는 아쉬움이 공존했다.

글이란 무엇인가. 위로인가, 해답인가, 질문인가.


그 시간에 남들처럼 자격증을 따거나 주식 공부를 했다면 연봉이 좀 더 올랐을까 라는 생각도 들기는 하지만, 퇴근 후 책상 앞에 앉아 일단 글을 써보고 다각도에서 고민을 거쳤던 시간들은 머릿속에 기억으로 남는다.


여러 유혹들을 뿌리치고 내 글에 몰두하는 일은 정말 어려웠지만, 그 과정에서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조금씩 명확해졌다.


완벽하지 않아도 일단 완성하는 것.


그게 글쓰기를 지속하게 만드는 힘이었다.

---------

■ 최근에는 국내에도 개봉했었던 곤 사토시 <퍼펙트 블루>를 봤다.


아이돌 챰의 소속이었던 한 걸그룹 아이돌이 배우가 되기 위해 탈퇴하면서 벌어지는 정신적인 괴로움을 표현한 영화이다. 데뷔작인데도 ’ 정체성 혼란과 정신병’이라는 주제의식으로 아직도 신선하게 느껴지는 연출을 사용해서 여러므로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영화 속 주인공은 아이돌과 배우 사이에서 정체성을 잃고 무너진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점점 자신을 잃어간다. 보고 나서도 굉장히 찝찝했다. 나를 곱씹어보게 되었다. 다니고 있는 회사와 글을 계속 쓰는 나 사이에서 계속해서 갈피를 못 잡는 듯했다.

---

■ 그러면서도 의도가 명확하게 반영된 스토리를 보면 나도 그런 글을 써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관한 이야기를 언젠가는 적어보고 싶다. 단순히 누군가의 종말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속에 언제든 스며들 수 있는 위기와, 그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민낯을 담아내고 싶다.


평범한 인물이 끝없이 시험대에 오르고, 무너질 듯 흔들리다가도 다시 일어선다. 결국 그는 고난의 연속 속에서 조금씩 단단해지고, 이전에는 몰랐던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그런 이야기가 끌린다. 화려하게 빛나는 성공담보다, 상처 난 자리에서 피어나는 생의 기운이 더 진실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사람의 날것의 감정, 벼랑 끝에서 드러나는 절망과 희망의 교차점. 언젠가는 그런 감정을 나도 적어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품는다.


주변 사람들의 희망퇴직 소식을 들으면서, 나는 여전히 회사와 글 사이를 오가지만, 아직은 멀게 느껴지는 목표에 계속 손을 걸치면서 고민해 본다.


그게 전부다.


이전 08화#08. 성장통의 흔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