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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우 Mar 02. 2021

원성왕릉과 무인상

통일신라의 명암을 남긴 원성왕과 무덤 앞을 지키는 석상들

원성왕릉의 무인상과 사자들

     

다시 불국로를 따라 내려가 불국사 안내소에서 왼쪽으로 돌려 산업로로 돌아가자. 산업로에서 다시 왼쪽으로 꺾은 후 1km 더 가면 괘릉으로 들어가는 길이 보인다. 왼쪽으로 돌려서 조금만 더 가면 원성왕릉 주차장이 보인다.


원성왕릉으로 들어서면 입구를 알리는 네모난 돌기둥이 있다. 그리고 양쪽에서 서로 마주 보고 선 무인상 한 쌍이 있다. 무인상을 보면 신라인처럼 생기지 않았다. 반구형태로 된 모자를 쓰고, 오른손에 칼집을 들고 있다. 얼굴 생김새는 신라인 같지 않다. 코는 크고 눈은 부리부리하며 수염이 구레나룻에 덥수룩하게 나 있다. 뒤에는 주머니가 있는데 아무래도 장사하려고 주판을 넣고 다닌 건 아닐까? 왜 이방인과 같이 생긴 동상이 신라 왕릉 앞에 있는 건지? 혹시 역사책에서 나오는 서역인? 그러면 실크로드를 타고 신라에 직접 온 중앙아시아 사람인가? 아니면 신라 고관들이 당나라에서 만난 중앙아시아인의 생김새를 보고 석공들에게 새기라고 했는지?


아직까지 여기에 구체적으로 답하는 사료는 나오지 않았다. 다만 삼국유사에 무덤의 주인공인 원성대왕 편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원성왕 11년에 당나라 사신과 두 명의 하서국인이 신라 용 세 마리에게 주술을 부려 작은 물고기로 변하게 하여 훔치려 했다. 그런데 동지와 청지에 있는 두 용의 아내가 두 남편들과 분황사 우물의 용을 구하기 위해 원성왕에게 이 사항을 보고한 것. 결국 왕이 하서국인을 붙잡아서 용을 해방시켰다.


뭔가 현실성 없는 이야기인 것 같다. 아무래도 왕의 치적을 쌓기 위해 허황되게 보이는 전설을 남겼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두 명의 하서국인’이라는 문구에 눈길이 간다. 하서국은 감숙성 황하 이서 지역을 가리킨다. 바로 이 지역에 오늘날 타지키스탄인의 조상뻘인 소그드인이 살았다는 것. 게다가 최치원이 <향악잡영>에서 속독악의 무용과 연주 장면이 실려 있는데, 속독은 소그드를 음사한 것이다. 게다가 이 외래 음악을 신라 전통음악으로 아예 인정을 하고 있다. 그가 활동한 시절은 9세기 말이니, 속독악의 초기 전파는 이보다 훨씬 앞서야 가능하다. 그럼 신라인과 소그드인이 경주에서 직접 교류한 적이 있다는 건가?


하지만 원성왕 시절 소그드인이 신라 수도 금성에 진짜 방문했는지에 대한 결론을 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 같다. 신라인이 직접 기록한 1차 문헌사료가 매우 적기 때문이다. <삼국유사>도 고려인의 손을 거쳤으니. 원성왕 시절 신라인이 소그드인과 직접 교류했는지 아니면 당을 통해 간접적으로 교류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당시 금성 귀족들은 소그드인을 알았다는 것에 무게를 두고 싶다.


소그드인 무인상 앞에는 역시 양 옆으로 문인처럼 보이는 석상 한 쌍이 있다. 그냥 눈으로 보면 신라의 높은 관리가 아닐까? 하지만 2007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3D 스캔 연구를 바탕으로 무인상이라고 결론 내렸다. 문화재연구소 보고서에 대수장포(大袖長抱)라는 긴소매를 갖춘 도포를 입고 그 위에 기마병이 주로 사용한 양당(補播)의 갑옷을 걸쳤다고 쓰여 있다. 또 주름진 소매 사이로 무인이 드는 장검을 잡고 있다고. 내 눈으로 자세히 보니 도포 안에 갑옷이 어렴풋이 보인다. 얼굴을 자세히 보면 구레나룻에 수염도 나있다. 이 사람도 이방인인가?


소그드인으로 추정되는 무인상(왼쪽). 원성왕은 과연 그를 만났을까?
도포를 입은 무인상(왼쪽). 문인처럼 보이지만 소매사이로 장검을 잡고 있다고 한다
도포를 입은 무인상(왼쪽) 뒷부분. 자세히 보면 갑옷이 보인다.

도포를 입은 무인상 앞에는 사자가 양쪽으로 두 마리씩 있다. 왼쪽 아래에 있는 사자와 오른쪽 위에 있는 사자가 특이한데, 전자는 남쪽으로 후자는 북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다. 남쪽으로 고개를 돌린 사자는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무덤 입구를 바라보는지라 경계하는 눈빛이 살벌하다. 게다가 이빨을 내밀며 위압감을 준다. 반면 북쪽을 바라보는 사자는 이가 가지런하다. 무덤 뒤에 나무들이 보호해줘서 그런지 좀 여유로운 표정이라고 해야 할까나?


원성왕릉 앞에 특이하게 생긴 석상들은 무언가를 말해주고 싶은 것 같다. 신라인이 생각했던 세계는 중앙아시아 저 멀리까지 닿았다는 것. 원성왕은 삼국유사 이야기처럼 서역 이방인들을 알현했을까? 그렇다면 서역인들과 좋았던 기억이 생생히 남아 죽을 때 이들을 석상으로 남기라고 유언했는지? 당사자가 무덤에 있으니 알 길은 없다.


남쪽을 바라보는 사자. 이빨을 내밀며 우리를 경계하고 있다.
북쪽을 바라보는 사자. 남쪽을 바라보는 사자와 달리 이가 가지런하여 오히려 웃는 느낌이 든다.


원성왕과 그가 남긴 것 


신비로운 무인상들을 뒤로하고, 무덤으로 향했다. 무덤 주변에는 갑옷을 입은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는데, 말이 남쪽, 쥐가 북쪽으로 향해 있다. 무덤을 둘러서 갑옷 입은 동물들을 세보니 정확히 12마리, 시계방향 순서대로 있다. 무덤 주변으로 십이지신상을 새긴 것은 통일신라 무덤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양식이라고 한다.


무덤을 가까이 보니 경주 시내에 있는 천마총과 황남대총과는 뭔가 다른 형태다. 그렇다. 여기는 돌무지덧널무덤이 아니다. 오히려 당나라식 돌방무덤에 가깝다. 통일신라 시대에 가서 돌방무덤으로 바뀐 이유는 돌무지덧널무덤을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이 어마어마해서다. 하지만 돌방무덤은 돌무지덧널무덤보다 도굴에 더 취약하다. 그래서 원성왕릉 내부에 남아있는 부장품은 거의 없다고 한다. 불국사 다보탑처럼 일제강점기 때 도굴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원성왕이 묻힌 능. 천마총과 황남대총과 달리 당나라식 돌방무덤에 가깝다.
십이지신상 중 말(午). 말이 남쪽을, 쥐가 북쪽을 바라보고 있다. 통일신라무덤의 독특한 양식.


무덤의 주인공인 원성왕은 어떻게 왕이 되었을까? 삼국유사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伊飱金周元初爲上宰, 王爲角干居二宰, 夢脫幞頭著素笠, 把十二絃琴入扵天官寺井中. 覺而使人占之, 曰 “脫幞頭者失聀之兆, 把琴者著枷之兆, 入井入獄之兆. 王聞之甚患杜門不出”


“이찬 김주원(伊飡 金周元)은 처음 상재(上宰)가 되고 왕은 각간으로 두 번째 재상이 되었는데 꿈 중에 복두(幞頭)를 벗고 소립(素笠)을 쓰고 12 현금(絃琴)을 들고 천관사(天官寺)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꿈에서] 깨자 사람을 시켜 그것을 점치게 하니, 말하기를 ‘복두를 벗은 것은 관직을 잃을 징조요, 가야금을 든 것은 형틀을 쓰게 될 조짐이요, 우물 속으로 들어간 것은 옥에 갇힐 징조입니다.’라고 했다. 왕은 이 말을 듣자 심히 근심스러워 두문불출하였다.”


정확히 말하면 원성왕이 되기 전 김경신이 꾼 꿈이다. 김경신이 두려워 두문불출할 때 아찬 여삼이 와서 김경신을 뵈었다. 왜 근심하냐 그러니까 불길하게 점쳐진 꿈 때문이라고. 여삼은 오히려 좋은 꿈이라며 다시 풀어보겠다고 했다. 여삼이 해몽한 건 다음과 같다.


“脫幞頭者人無居上也, 著素笠者冕旈之兆也, 把十二絃琴者十二孫傳世之兆也, 入天官井入宫禁之瑞也.” 王曰 “上有周元何居上位.” 阿飱曰 “請密祀北川神可矣.” 從之.


“‘복두를 벗은 것은 위에 거하는 다른 사람이 없다는 뜻이요, 소립을 쓴 것은 면류관(冕旒冠)을 쓸 징조이며, 12 현금을 든 것은 12대손까지 왕위를 전한다는 조짐이며, 천관사 우물로 들어간 것은 궁궐로 들어갈 상서로운 조짐입니다.’라고 하였다. ‘위에 주원이 있는데 어찌 왕위에 오를 수 있겠소?’ 왕이 말하자 아찬이 대답하기를 ‘청컨대 은밀히 북천신(北川神)에게 제사 지내면 될 것입니다.’ 하자 [왕은] 이에 따랐다.”


얼마 후 선덕왕이 세상을 떠났다. 나라 사람들은 첫째 재상인 김주원을 왕으로 받들기로 했다. 하지만 김주원의 집은 북천 북쪽에 있었는데, 냇물이 불어나서 건널 수가 없었다고. 이에 김경신이 먼저 궁궐에 들어가서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원성왕이다.  <삼국사기>에는 김주원이 강을 건너지 못한 것은 하늘의 뜻이니 덕망이 높은 김경신을 세우는 게 어떨지에 대해 조정에서 논의한다. 결국 신료들의 뜻이 일치해서 김경신이 왕이 되었다고. 김경신이 왕위에 오른 건 늦겨울이라 김주원이 왕위 다툼에서 패했음을 우회적으로 말했다고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늦겨울에는 오히려 가뭄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원성왕 시절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보면 대내외로 평화로웠던 것 같다. 유교 경전에 능한 사람을 선발하는 독서삼품과를 실시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학자들은 이것이 고려 시대 ‘과거제’의 전신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게다가 백제시대부터 존재했던 저수지 둑, 벽골제를 증축했다. 원성왕이 치수정책을 보는 눈이 있어서 그런지 증축이 당대에 끝나지 않았다. 고려 현종, 고려 인종, 조선 태종 때에도 벽골제가 계속 개축되었으니까. 오늘날까지도 김제평야라고 부르며 한국지리 시간 때 대표적인 벼농사지로 구체적으로 배우니, 벽골제는 조선 초기까지 국가정책으로 관리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오늘날에는 김제 지평선축제가 대박을 터뜨리며 작년에 22주년을 맞았으니, 원성왕은 1,200년 후 후손들에게도 큰 선물을 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성왕릉 전경. 아직도 능 아래는 축축하다

여기가 왜 원성왕의 장지가 되었는지도 상당히 흥미롭다. 원래 이곳은 곡사(鵠寺)라는 절이 있었다. 원성왕이 자신의 장지를 어디로 할지 고민하다가 이곳을 골랐는데, 신하들이 절 자리를 뺏는 것에 반대가 많았다고. 하지만 왕은 절은 자리하는 곳마다 반드시 교화되기에 어디로 가든지 어울리지 않음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곡사터를 벼 2,000 섬에 정당하게 매입한 후, 오늘날 숭복사지로 절을 이전했다. 이 내용은 초월산 대숭복사비에 적혀있다. 비문을 짓고 글씨를 쓴 사람은 바로 해운 최치원 선생.


왕이 승하하자 유해를 화장한 후 남은 뼈를 부수지 않고 능에 안치했다. 장지 아래쪽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다. 연못을 흙으로 메우지 않고 왕릉을 그 위에 걸치듯이 만들었는데, 여기에서 괘릉(掛陵)이라는 말이 유래했다. 오늘날까지도 능 아래는 매우 축축하다고 한다. 앞에서 말했던 석굴암 아래 샘처럼 건물 아래 흐르는 물길이 이슬을 땅 아래로 유도한다는 원리를 적용하여 능을 구성한 게 아닌가는 나만의 생각도 해 본다.


독서삼품과를 추진하고, 벽골제를 증축하고, 자신의 장지를 개인 재산으로 당당하게 산 것을 보면, 왕의 생애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열왕계였던 김주원 대신 자신의 왕위에 오른 것은 원성왕 사후 후대 왕들에게 상당한 부담을 줬다. 바로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이 왕손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해 옛 백제 땅에서 신라 조정에 반란을 일으킨 것. 하지만 당시 신라 중앙군은 여전히 강력했기에 난을 금방 진압한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이 산적 세력과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 난도 결국 진압되어 무열왕계가 6두품으로 강등되어 왕위에 오르지 못하는 원인이 된다. 하지만 김헌창의 난은 멀리 내다보면 통일신라의 왕권쟁탈전과 후삼국시대가 개막하는 신호탄이 되었기에, 원성왕의 원죄는 결국 신라를 무너뜨리는 나비효과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김부식은 혜공왕이 죽고 선덕왕과 원성왕이 즉위한 이후부터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를 신라 하대라고 말했다. 이는 오늘날 역사 선생님들이 신라역사를 가르칠 때도 그대로 적용한다. 신라 하대에는 권력다툼이 심해서 왕이 여러 번 바뀐다는 말씀과 함께.


원성왕이 왕위에 오를 때 정통성의 문제가 있긴 했지만 통치 수완은 평균 이상이었던 것 같다. 독서삼품과를 실시하고 벽골제까지 증축했으니. 서역인이 무덤을 지키는 걸로 보아 원성왕 전후로 신라인들의 세계관이 통일 전보다 더 넓어졌을 수도 있다. 비록 능 안에 있던 부장품들은 어디 갔는지 모르지만, 십이지신상과 무인상들은 오늘날까지 그대로 남아 통일신라 무덤의 원형을 잘 간직했다. 그러나 원성왕의 정통성 부재가 신라가 서서히 기울어지는 원인이 되었으니, 통일신라의 명암을 모두 뚜렷하게 남긴 왕이라고 해도 될는지?


소그드인으로 추정되는 무인상(오른쪽). 종아리 아랫부분이 파손되어 받침석이 있다.
도포를 입은 무인상(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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