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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우 Aug 20. 2021

양동마을과 옥산서원

경주 안강의 두 명문가 : 여강 이 씨와 경주 손 씨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에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곳이 두 군데나 있다. 바로 양동마을과 옥산서원. 양동마을은 또 다른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안동 하회마을과 더불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전통마을인데, 여강 이 씨와 경주 손 씨의 집성촌이다. 양동마을은 조선시대 풍수지리학 기준으로 상당히 손꼽히는 명당이어서 그런지, 조선시대의 대표 학자인 이언적과 무수한 과거 합격자들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이언적은 성리학에 상당히 뛰어난 학자였는데, 젊은 시절에 뛰어든 무극과 태극에 대한 논쟁은 이후 이황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양동마을에서 안강읍내를 지나면 옥산천을 따라 들어가는 길이 하나 나오는데, 이 길을 따라가면 옥산서원을 볼 수 있다. 옥산서원도 역시 양동마을의 상징인 이언적을 배향한 조선시대 옛 사립학교다. 이언적의 학문이 이황에게 큰 영향을 주어서 그런지, 영남에서 안동 도산서원에서 쌍벽을 이뤘을 정도다. 그래서인지 학문을 좋아했던 영조와 정조의 관심을 끌었으며, 흥선대원군이 부패한 서원들을 철폐했을 때도 살아남은 47개소 중 한 곳이다. 그래서 20세기에 훼철되었다가 복원된 대다수 서원과는 달리 상당히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양동마을, 옥산서원, 이언적 그리고 그의 후손들인 여강 이 씨. 시대가 바뀐 지금 동성촌의 흔적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으나, 지금도 안강읍에 살고 있는 여강 이 씨 후손들이 많다. 어떻게 여강 이 씨는 안강에 정착했고, 마을에서 중요한 가문으로 유지할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한 비밀을 풀기 위해 나는 양동마을과 옥산서원으로 출발했다.


양동마을 전면에 보이는 관가정과 향단


양동마을은 영천에서 포항으로 가는 28번 국도상에 있다. 수도권, 충청권, 영서 지방에서 오시는 분들은 상주-영천 고속도로의 동영천 나들목에서 나온 다음 28번 국도를 계속 타고 가자. 그러면 포항으로 넘어가기 직전 왼쪽 편으로 양동마을로 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경상남도 동부에서 올 때는 경부고속도로 경주 나들목을 거쳐 68번 지방도를 타고 쭉 올라오면 28번 국도를 만나 양동마을로 들어갈 수 있다.


마을을 들어가는 길 입구에 오른쪽에 철도역의 흔적이 보이는데, 바로 동해남부선 옛 양자동역이다. 2007년에 여객취급을 중단해서 오늘날에는 차양막과 승강장만이 남아있다. 이곳을 지나가는 단선철도도 12월이 되면 철도 운행을 중단한다. 올해 12월부터 모든 열차 운행을 동해선 신선으로 이전하기 때문.


마을을 들어서기 전에는 양동마을 문화관이 나온다. 양동마을의 주요 가옥들을 소개할 뿐만 아니라 마을에서 나온 문화재들을 전시하고 있다. 1층에는 보물 제1216호인 양민공 손소 초상을 볼 수 있다. 세조 13년 함경도 길주에서 일어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해 공을 세웠다고. 또한 양동마을 주요 가문에서도 중요한 인물인데, 풍덕 류 씨 가문 류복하의 외동딸과 장가를 들어서 마을에 이주하였다고 한다. 손소의 후손들이 바로 경주 손 씨 문중을 이루게 된다. 강릉 오죽헌에서 보았듯이 임진왜란 이전 조선시대에는 장가를 든 후 아이가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 남편이 처가에 머무는 풍습은 매우 흔한 일이었다. 전에 언급한 대로 조선 초기까지 아들과 딸 모두에게 재산을 균분상속했으니까.


보물 제1216호 양민공 손소 초상


문화관 2층으로 가면 양동마을에서 발견한 문헌들이 나온다. 하나는 국보 제283호인 통감속편인데, 원말명초에 집필된 중국 역사서로 조선 세종 4년(1422)에 간행된 책이다. 통감속편은 여러 판본이 있어서 왜 굳이 국보로 지정했나는 의문이 들 수 있겠지만, 세종 당시 구리 활자인 경자자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또한 단종이 세자 시절에 공부하던 책이라 매우 희귀하기 때문. 여기에 전시된 통감속편은 복제품인데, 경주 손 씨 가문이 소장하고 있다가 경기도 성남에 있는 한국학중앙연구원에 기증했기 때문이다.


또한 보물 제2118호로 지정된 원나라 최후의 법전인 지정조격도 있다. 발견한 연도도 비교적 최근인 2002년인데, 안승준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이 라면상자에 종이뭉치를 발견했다고. 그런데 이 종이뭉치가 중국에서도 발견되지 않은 유일본이라 원나라의 후예인 몽골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그래서 8년 후 남바린 엥흐바야르 전 몽골 대통령이 이 법전을 직접 관람했다고.


국보 제283호 통감속편 복제품


문화관을 지나고 양동마을을 관람하러 들어갔다. 그런데 나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내가 마을을 방문했던 날이 7월 31일인데,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지 11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래서 A4지에 '무료입장‘이 크게 쓰여 있다. 그래서 4,000원을 아끼고 마을로 들어갈 수 있었다. 마을에 들어가면 왼쪽에 전통건물로 된 양동초등학교가 보인다. 혹시 이 마을에 아이들이 살고 있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전교생 모두 마을 외부에서 온 학생들이라고 한다. 양동마을이 고령화되고 있다는 증거인데, 남아 있는 마을 주민들이 세상을 떠나면 어떻게 유산을 지켜야 할지 고민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학교를 지나니 양동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지금 내가 눈으로 보는 것은 1/3에 불과하다. 마을 입구에서 정면에서 바라볼 때 두 건물이 눈에 띄는데, 왼쪽에 있는 건물은 보물 제442호 관가정, 오른쪽에 있는 건물은 보물 제412호 향단이다. 관가정은 우제 손중돈의 옛집인데, 입구에서 볼 때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손중돈은 손소의 둘째 아들이자 조선 초기 명망이 있는 학자이자 문묘종사와 종묘배향을 동시에 이룬 이언적의 외삼촌이다.


마을 입구에서 바라본 관가정(왼쪽 꼭대기 기와 저택)과 향단(오른쪽 꼭대기 기와 저택). 그 아래에는 평민들과 노비들이 산 초가집들이 있다.
보물 제442호 관가정. 손소의 아들 손중돈의 거처다.
관가정 대문 앞에서 바라본 마을의 모습


이언적의 외삼촌이라. 그렇다 이언적의 아버지 이번은 풍덕 류 씨에게 장가든 장인처럼 손소의 딸에게 장가를 들어 양동마을에 발을 들였던 것이다. 이언적도 외삼촌 손중돈처럼 어린 시절을 외가에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조선 사회가 장자상속제로 바뀌게 되는데, 이로 인해 양동마을은 경주 손 씨와 여강 이 씨 두 성씨가 공존하는 집성촌으로 변모하게 된다.  


관가정 오른편 높은 구릉에 대규모 기와주택이 보이는데, 바로 향단이다. 이언적이 고향의 편모를 모시기 위해 사직을 청했는데, 조정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대신 경상감사로 명했다. 그래서 감영과 고향을 오가며 노모를 모실 수 있었다고. 노모를 모시는 와중에도 관직을 수행해야 했기 때문에 집을 99칸까지 지었다고 한다. 이후 동생에게 집을 증여했다고. 하지만 6.25 전쟁 때 폭격을 받아서 현재는 50여 칸만 남아 보수한 채로 유지하고 있다.


관가정과 향단은 사유지라서 내가 직접 들어갈 수 없었다. 하지만 외관상 볼 때 관가정의  수수함 향단의 화려함이 대조를 이뤄서 마을 전면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 아래에는 초가집들이 있는데, 두 가문을 위해 일한 평민들과 노비들의 거처였다.


멀리서 바라본 보물 제412호 향단. 이언적이 노모를 모시기 위해 조선 조정에서 99칸으로 지어준 집이다.


말 물(勿) 자 중앙과 끝 부분에 있는 무첨당과 서백당


양동마을의 본모습을 보려면 정면에서 보이지 않는 곳까지 깊이 들어가야 한다. 양동마을을 위에서 바라보면 한자 말 물(勿) 자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관가정과 향단은 勿자의 1획 부분의 능선 가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세 가닥 뒤에 있는 일자는 바로 설창산인데, 설창산에서 내려오는 세 가지 지맥이 기운을 넘치게 한다고 한다.


사실 양동마을의 핵심 저택은 두 군데가 있다. 바로 여강 이 씨의 종택의 사랑채 건물인 무첨당과 경주 손 씨의 종택인 서백당이다. 이 두 저택은 양동마을 입구에서 보이지 않는다. 무첨당은 첫 번째와 두 번째 능선 가닥 사이에, 서백당은 두 번째와 세 번째 능선 가닥 사이에 있다. 일단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무첨당으로 가기로 했다.


여강 이 씨의 핵심 무대로 알고 와서 무첨당이 상당히 화려한 사랑채인 줄 알았는데, 오히려 강릉 선교장보다도 상당히 수수한 느낌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오른쪽에 본채와 사당이 있지만, 현재 직계 후손이 거주하고 있어서 접근할 수 없어서 그렇다. 무첨(無添)이라는 말은 이언적의 손자인 이의윤의 호에서 따온 것인데, 조상의 유산을 더럽히지 않겠다는 뜻이라고 한다. 『시경』 「소아 소완(小雅小宛)」편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잠들어서, 너를 태어나게 해 주신 분들을 욕되게 하지 마라(夙興夜寢 無添爾所生)”에서 따왔다고.


여강 이 씨 종택의 사랑채인 보물 제411호 무첨당. 오른편에 창산세거라는 현판이 보인다.
무첨당 대청마루. 오른쪽 편에 좌해금서라는 현판이 보이는데, 흥선대원군의 글씨다.
무첨당의 누마루. 누마루 오른쪽에 오체서실(五棣書室)이라는 현판이 보이는데, 이언적의 다섯 손자가 공부했던 곳이다.


오른쪽 현판을 보면 ‘창산세거(蒼山世居)’라고 쓰여 있는데, 설창산 자락에 대대로 살아왔다는 의미다. 즉 이의윤은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마을에서 학문에 전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청마루 오른쪽에는 ‘좌해금서(左海琴書)’라는 편액이 있는데, 직역하면 왼쪽 바다에 있는 거문고와 서적이라는 뜻이다. 한양에서 남쪽을 바라볼 때 왼쪽 바다가 있는 곳은 영남 지방이다. 그리고 거문고와 서적은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나오는 시구에서 유래한 것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悅親戚之情話 樂琴書以消憂

”친척들이 정다운 이야기에 기뻐하고, 거문고와 서책을 즐겨 시름을 잊으리라. "


이를 유교에서 해석하면 무릇 선비는 거문고와 책과 함께해야 한다는 뜻으로, 좌해금서를 의역하면 영남 지방의 선비들이 사는 마을이라는 의미다. 이 글씨를 쓴 사람은 바로 권력을 잡기 전 흥선대원군. 실제 그가 무첨당에 방문하여 쓴 글씨다(무첨당에 있는 현판은 복제본이다.). 오늘날도 무첨당은 여강 이 씨의 문중의 대소사를 논의하거나 손님들을 맞이할 때 쓰인다. 또한 문중의 중요 제사 장소이기도 하고.


두 번째 능선 가닥을 넘어 손소가 지은 저택인 서백당으로 향했다. 무첨당에서 서백당으로 넘어갈 때 나는 수졸당 고택, 근암고택, 상춘헌 고택, 사호당 고택을 봤는데, 모두 여강 이 씨의 후손들이 거주한 곳이다. 이언적 사후 여강 이 씨가 양동마을에서 큰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는 고택들이다.


국가민속문화재 제78호 수졸당 고택
국가민속문화재 제76호 근암 고택 안채
국가민속문화재 제75호 상춘헌 고택
국가민속문화재 제47호 사호당 고택


저택을 보고 세 번째 능선 가닥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송첨 종택이라는 푯말을 볼 수 있다. 이시애 난을 진압한 손소가 이곳에 지은 집이다. 저택으로 들어가면 상당히 거대한 향나무를 볼 수 있는데, 무려 500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워낙 오래된 나무라서 그런지 재해를 예방하기 위해 철 지지대가 상당히 많이 있다.


향나무 반대편으로는 거대한 저택이 하나 있는데, 왼쪽 편에 서백당(西百堂)이라는 현판이 쓰여 있다. 이언적도 이율곡과 마찬가지로 바로 외가인 여기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다. 서백당은 ‘하루에 참을 인(忍) 자를 100번 쓴다는 의미’라고. 이는 후손들에게 마음을 청렴히 하고 품위 있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에서 지은 이름이 아닐까?


서백당 마당에 있는 500년 된 향나무
서백당. 경주 손 씨의 종택이자 이언적이 유년기를 보낸 곳이기도 하다.
서백당 입구에서 바라본 마을의 모습


특히 서백당은 풍수지리로 봤을 때 다른 고택보다도 상당히 길지인데, 터를 안내한 풍수가는 이곳에서 세 명의 현인이 나온다고 예언했다. 이 중 두 명이 이미 조선시대에 나왔는데, 아시다시피 손소의 아들인 손중돈 선생과, 이황에게 영향을 준 대학자인 이언적이다. 나머지 한 명은 오늘날까지 나오지 않았는데, 서백당 종가인 경주 손 씨는 라이벌 의식이 있어서 그랬는지 이 씨가 아닌 자신의 가문에서 위대한 인물이 나오기를 바랐다고 한다. 그래서 딸들이 친정으로 출산하러 오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고. 내가 살아 있을 때 양동마을에서 현인이 과연 나올 수 있을까?


서백당을 보고 양동마을을 나섰다. 여강 이 씨와 경주 손 씨가 같이 공존하면서 살아와 오늘날까지 이른 유네스코 문화유산 마을. 그래서 20세기 마지막 무렵에 영국 찰스 왕세자가 방문했다고 한다. 하지만 양동마을이 1984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기 전에는 초가집들이 슬레이트 지붕으로 가득해 많은 변형이 있었다고 한다. 지정되고 나서 밀짚과 갈대로 된 초가집으로 다시 복원한 것이라고. 워낙 마을 주민과 문화재청에서 복원과 전통 보전을 위해 노력해서 그런지 유네스코에서는 2013년에 세계 최고의 모범 유산 26개 사례 중 하나로 선정했다고 한다. 마을의 보존이 오랫동안 잘 지속되길 바라며 마을을 나섰다.


독락당, 옥산서원과 이언적

     

마을을 나서고 이언적이 저술에 매진했던 독락당을 찾아가기로 했다. 독락당은 양동마을에서 28번 국도로 다시 나와 옥산천을 따라 난 길로 우회전해 들어간 다음 계속 직진하다 보면 나온다. 하지만 길을 들어가기 전 정혜사지 십삼층 석탑이라는 관광안내 표지가 눈에 띄어서 그곳을 먼저 가기로 했다.


정혜사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8세기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되어 19세기까지 이어진 절이라고 하는데, 오늘날에는 석탑만이 남아있다. 내가 주로 봤던 통일신라 삼층석탑 형태와는 완전히 다르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형태라 상당히 독특한 형태라고. 그래서인지 국보 제40호로 지정되었다. 탑을 보니까 1층이 상당히 크고 높은데 비해, 2층부터 13층까지는 매우 작은 몸돌과 지붕돌로 이뤄져 있다. 아무래도 삼층석탑에 질린 설계사의 일탈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국보 제40호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이언적은 양동마을에 본가가 있음에도 13층 석탑 아래에 따로 독락당을 지었다. 이유는 중종 27년(1532) 김안로 등용에 반대했다가 오히려 김안로가 외척이 되어 권력을 잡자 좌천되었기 때문이다(실제로 김안로는 권력을 잡은 후 공포정치로 악명을 떨쳤다.). 좌천이 된 신분이라 양동마을에 자신이 머물면 가족들의 화를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양동마을에서 떨어진 이곳에 독락당을 지어서 저술활동을 이었다. 독락당 안으로 들어가 보니 여느 유명인의 고택과 마찬가지로 각종 현판들로 가득했다. 가장 눈에 띄는 현판인 옥산정사(玉山精舍)는 퇴계 이황이 썼다고 한다.


독락당 오른편으로 보면 자그만 문이 하나 있는데, 이 문을 지나면 바로 옥산천 계곡으로 갈 수 있다. 북서쪽으로 신라시대 13층 석탑이 있는 절이 있고, 동쪽으로는 마음을 시원케 하는 계곡이 잘 어우러져 있어서 이언적이 이황에게 큰 영향을 미친 성리학 문집을 여럿 남길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파직 때문에 마음이 뒤숭숭했을 터인데, 이를 극복하고 자연을 벗 삼아 글에 집중할 수 있었을 테니까. 이언적의 탁월한 위치 선정은 오늘날에도 이어져오고 있는데, 독락당 정자인 계정 옆에 시원한 계곡을 즐기러 오는 관광객들로 여전하기 때문이다.


독락당. 이언적은 여기서 저술활동을 했다.
독락당의 정자인 계정과 그 아래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 이언적도 좋은 터를 보는 눈이 있었나 보다.


독락당에서 저술활동에 힘쓴 지 5년 후, 다시 벼슬로 나아가 이조, 예조, 형조 판서를 거친 후 좌찬성까지 올라가게 된다. 하지만 윤원형 일당이 사림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평안도 오지인 강계에서 유배되어 6년 동안 저술활동에 힘쓰다가 결국 숨을 거두게 된다. 사림과 훈구의 갈등으로 인해 발생한 사화를 그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후손들은 그의 성리학 학술업적과 덕행을 인정했나 보다. 그래서 이언적이 세상을 떠난 지 19년이 지난 선조 5년(1572), 경주 부윤 이제민과 도내 유림인 독락당에서 남쪽으로 도보로 15분 떨어진 곳에 그를 추모하는 옥산서원을 지었다. 옥산서원도 마찬가지로 서쪽으로 흐르는 옥산천에 걸쳐 있는데, 이곳도 경관이 좋아서 서원 옆에는 계곡 물놀이를 즐기는 관광객들로 가득하다. 계곡에는 수많은 너럭바위들로 가득한데, 마음을 씻고 학문을 구한다는 ‘세심대(洗心臺)’다.


세심대 전경. 옥산서원 유림들도 무더운 여름에 계곡에서 물놀이를 했을까?
서원 정문인 역락문


서원 정문인 역락문과 그 뒤에 있는 누각인 무변루를 지나면 정면으로 구인당, 왼쪽으로 암수재, 오른쪽으로 민구재가 보인다. 특히 구인당은 서원 강학 공간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인데, 강의와 토론이 열린 곳이다. 구인당에 있는 옥산서원 현판이 눈에 띄는데, 추사 김정희가 유배 가기 직전에 쓴 것이다. 현판 옆을 보면 ‘만력갑술 사액후이백육십육년기해실화개서선사(萬曆甲戌賜額後二百六十六年己亥失火改書宣賜)’라고 적혀 있는데, 기해년 헌종 5년(1839년)에 구인당이 화재로 소실되고 다시 지은 후 쓴 편액이라고 할 수 있다. 추사가 쓴 현판 뒤에는 원래의 사액 글씨가 써져 있는데, 16세기에 아계 이산해가 쓴 것이다. 구인당 현판과 무변루 현판은 조선 중기 서예가 한석봉이 썼다고. 구인당은 말 그대로 조선 서예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옥산서원의 전성시대는 이황의 학통을 이은 영남 남인이 정권을 잡은 17세기라고 볼 수 있다. 당시에는 영남에서는 안동 도산서원과 함께 쌍벽을 이뤘다. 그러다가 숙종의 갑술환국으로 정권이 몰락하면서 영향력이 약해지는가 싶더니, 영조와 정조가 이언적의 학문에 관심을 보이면서 다시금 중흥기를 이끌게 된다. 하지만 정조 사후 옥산서원의 결말은 그다지 좋지 못했는데, 여강 이 씨의 적자 후손들과 서자 후손들이 대립하는 향전이 오랫동안 지속되어서 명예를 실추하게 된다. 실제로 이들 사이에 물리적 충돌까지 빈번히 일어났다고. 그나마 흥선대원군이 얼마 남지 않은 남인들을 세도정치에 대항할 세력으로 삼으면서 서원철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또한 무첨당과의 인연이 있어서 서원을 지켰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아직 조선 초기 건물 형태로 오늘날까지 우리들에게 이어져 오고 있다.


역락문 뒤의 누각인 무변루. 무변루 현판은 한석봉의 글씨다.
옥산서원 강학 공간의 핵심 구인당. 정면에 있는 옥산서원 현판은 추사 김정희가 남긴 글씨다.
구인당 대청마루. 구인당 현판 역시 한석봉의 작품이다.
해립재와 양진재. 오늘날 사립학교의 교무실에 해당한다.
옥산서원의 원래 사액글씨. 아계 이산해가 썼다.


이언적의 흔적이 깃든 경주 안강. 양동마을과 옥산서원 주변 드넓은 평야지대에서 여강 이 씨와 경주 손 씨는 지역뿐만 아니라 중앙정부에서도 대활약을 했다. 이들의 전통이 여전히 잘 지켜져서 그런지 양동마을과 옥산서원은 오늘날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남아 관광객들이 사랑하는 곳이 되었다. 특히 옥산천과 조화를 잘 이룬 독락당과 서원에서 유림들이 더운 여름에 물놀이로 머리를 식히지 않았을까? 오늘날에는 전국에서 온 관광객들이 그 역할을 이어받았다.


하지만 안강읍도 세월을 이기지 못했는지 젊은 층들의 인구가 줄어든 대신 노령층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2016년에는 3만 명 선도 무너졌다. 마을 내에도 젊은이가 없고 노령층이 대다수라 옛 풍수가의 예언처럼 마을에서 세 번째 현인이 나올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아니 어쩌면 이들이 세상을 떠나면 마을을 어떻게 유지해나갈지도 고민해야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 옛 조상들이 물려준 문화유산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래도 문화유산이 대대손손 이어지기를 그리고 안강에 현인이 나오길 기원하며 옥산서원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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