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로부터 1,864년 전, 신라 제8대 아달라 이사금 4년 정유(157). 포항 영일만 근처에 한 부부가 살았다. 부부의 이름은 연오(延烏)와 세오(細烏). 어느 날 남편 연오가 바닷가에 나가 해초를 따고 있었는데, 갑자기 바위 하나가 연오를 태우고 일본으로 가 버렸다. 일본에서는 연오를 범상치 않은 인물로 보고 그를 왕으로 삼았다. 남편이 돌아오지 않아 그를 사방팔방 찾았던 세오는 연오가 벗어놓은 신을 봤는데, 거기에 바위가 있었다. 올라가니, 바위가 세오를 태우고 일본으로 갔다. 바위를 타고 온 세오를 보고 일본 사람들이 놀라 연오에게 보고했는데, 세오는 왕이 된 연오와 다시 만나고 귀비가 되었다.
실화 일리는 없다. 다만 뭔가 의미심장한 이야기다. 신라에서는 어부로 성실하게 일한 후, 일본으로 가 자수성가로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를 각색한 것일까? 아니면 신라에서 먹고살기 힘들어 일본으로 이민 갔는데, 현지인 친구들을 잘 만나서 인생 꽃 피었다는 이야기인지? 설화로만 전해져서 우리는 구체적인 사항에 대해 추측을 할 수밖에 없다. 다만 <삼국유사> 저자 일연은 전래되는 설화로 신라인들의 일본 이민 이야기를 후손들에게 전해주고 싶었으리라.
최근 영일만에 이 이야기를 담은 연오랑 세오녀 테마공원이 있다고 하여 찾아갔다. 내가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공부할 때, 강사 선생님께서 적극 추천하신 이유도 있고. 연오와 세오의 비밀을 알기 위해 나는 부산포항고속도로를 타고 공원을 찾아갔다.
연오랑 세오녀 테마공원
부산포항고속도로를 타고 남포항 나들목 종점까지 가자. 종점에서 31번 국도를 만나는데, 구룡포 방면으로 빠져나가자. 끝까지 가면 삼거리형 나들목이 나오는데, 포항시청 방향으로 나가자. 바로 다음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서 호미곶으로 향하는 929번 지방도를 타고 5분 정도 가면 연오랑 세오녀 테마공원이 나온다.
오늘날 연오랑 세오녀 테마공원처럼 지자체에서 역사서를 바탕으로 한 관광지를 많이 조성하고 있다. 특별히 <삼국유사>를 바탕으로 한 공원들이 성공하는 사례가 많아서 역사가 관광수입을 만들 수 있다는 걸 현실로 만들고 있는데, 기록으로 전해져 오는 이야기로 지방자치단체가 관광사업을 제안하여 국가에서 반영하는 일은 매우 고무적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역사 테마공원을 착공하기 전 고증과 스토리텔링 연구를 철저히 해야 한다는 건 두말할 것도 없다.
입구에 들어서면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를 벽화로 반겨준다. 아이들이 잘 볼 수 있도록 만들어놓았다. 이야기를 잊어버렸다면 반드시 벽화를 보고 오기를 추천한다. 벽화 왼쪽에 기암절벽이 있는데 산마루 정자로 가는 계단이 있다. 높은 곳에서 드론 없이도 공원 전경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계단을 올라갔다. 산마루 정자에 도착했지만 앞에 빽빽한 소나무가 시야를 가려서 공원 전경을 도저히 볼 수 없어 아쉬웠다.
연오랑 세오녀 소개 벽화. 왼쪽 계단은 산마루 정자로 올라가는 길이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내려오니 초가집들이 보인다. 당시 신라시대 서민 집들을 표현한 것 같은데, 뭔가 의문이 든다. 초가 뒤를 보면 짧은 굴뚝이 있다. 그러면 신라시대 초기에도 온돌을 썼는지에 궁금했다. 나처럼 역사에 일천한 사람이 연오, 세오가 살던 시대에 온돌이 있었는가에 대한 결론은 내리지는 못하겠다. 다만 오늘날까지 활용하는 초가 굴뚝은 지붕이 타기 쉽기 때문에 상당히 길다. 굴뚝이 짧다는 게 아쉬웠는데, 고증대로 굴뚝을 제대로 바꾸었으면 한다. 또한 대장간 건물 앞에 도자기들이 보이는데 당시 신라 것인지 잘 모르겠다. 차라리 초기 신라 영일만 서민들이 쓴 토기들을 보여주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중앙에는 연오세오댁이 있는데 초가 안에는 베틀이, 밖에는 어망이 있다. 어망이 있는 이유는 아무래도 “연오가 바다에 나가 해초를 땄다”는 것에서 착안한 것 같다. 그리고 베틀이 있는 이유는 세오가 비단을 짰다는 이유다. 연오세오댁 내부 형태는 삼국유사 이야기에 따라 적절하게 배치된 것 같다. 좌우로 도기야댁과 영일댁이 있는데, 원래 여기는 굴렁쇠, 줄넘기, 윷놀이, 제기차기와 같은 민속놀이를 무료로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하지만 코로나19 때문에 운영을 못하는 것 같다.
공원에 조성된 신라마을. 초기 신라 시대에도 초가가 이러했을까?
(왼쪽) 민속놀이를 즐길 수 있는 도기야댁 (오른쪽) 연오세오댁. 연오세오댁 왼쪽 방에는 베틀이, 중앙에는 어망이 있다.
귀비고 전시관
신라 마을을 나서면 귀비고 전시관이 있다. 입구에는 큰 바위가 있는데, 일본으로 간 연오와 세오가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는 의미에서 자신들을 옮긴 두 바위를 합쳐 쌍거북바위 만들었다는 전설을 말해준다. 귀비고 전시관은 작년 4월에 개관했는데, 공원이 완공되고 무려 3년이 지나서였다. 그래서 귀비고 전시관이 완공되기 전 일부 지역기자들이 왜 이 공원을 만들었는지 알 수 없다며 비판한 기사가 많았다.
하지만 귀비고 전시관이 완공되고 나서는 이제야 제대로 된 테마공원을 갖췄다는 평가가 주를 이뤘다. 먼저 입구에서 연오랑 세오녀 설화와 당시 일본의 역사 기록과 잘 대조하여 잘 설명했다. 일본 <고사기>와 <일본서기>에서 나오는 아메노히보코와 스사노오모미코토 신화와 연관이 있기 때문. 먼저 아메노히보코와 스사노오모미코토는 신라에서 왔다고 한다. 두 번째로는 아메노히보코의 아내인 아카루히메와 스사노오모미코토의 누이인 아마테라스가 바로 태양을 상징한다. 세 번째로는 세오와 아마테라스가 직물을 짰다는 내용이 있다는 것이다. <삼국유사> 연오랑과 세오녀 이야기 후반부를 보자.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광채를 잃었다. 일관(日官)이 나아가 아뢰기를, “해와 달의 정기가 우리나라에 있었는데 지금 일본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이러한 괴변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두 사람을 찾으니 연오가 말하기를 “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시킨 일입니다. 지금 어찌 돌아갈 수 있겠소. 그러므로 나의 비(妃)가 짠 고운 명주가 있으니 이것을 가지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될 것입니다.” 하면서 이에 그 비단을 주었다. 사신이 돌아와서 아뢰자, 그 말대로 제사를 지낸 이후에 해와 달이 그 전과 같이 되었다. 그 비단을 왕의 창고에 잘 간직하여 국보로 삼고 그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하였다. 또 하늘에 제사를 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하였다."
여기서 왜 전시관 이름을 ‘귀비고’라 했는지 알 수 있다. 이 둘이 떠나자 신라에서 해와 달이 광채를 잃었다고 한다. 시기가 다르긴 하지만 <삼국사기>에서 아달라 이사금 13년 1월에 일식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뿐만 아니라 길선의 반란, 백제와의 싸움, 폭우 지진, 기아와 같은 자연재해 등이 수록된 것으로 볼 때, 신라가 아달라 이사금 당시 혼란에 빠졌다는 걸 상징적으로 말해준다고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그래서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신라 조정에서 세오가 만든 귀비고 명주를 가지고 제사를 지냈다고 보는 이도 있다. 또한 일본 신화에도 베틀을 짰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을 보아 연오랑 세오녀 설화와 연관하여 혼란하던 시대에 누군가가 일본에 망명하여 직물 기술을 전해주지 않았을까? 내가 볼 때 연오와 세오는 단순한 어민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아무래도 당시 신라의 첨단기술과 일월 신앙을 일본에 전파한 중요인물이 아니었을까? 심지어 세오의 ‘가늘 세(細)’라는 한자에도 실(絲)이 들어가 있으니. 연오와 위에 있는 일본 신화 주인공들을 엮어서 신라인들이 직조와 함께 철기기술까지 일본에 전파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전시관에 제철문화, 직조문화, 제천문화와 벼농사문화에 대한 내용이 있는데, 초기 신라의 선진기술과 신앙이 일본으로 전파되었음을 말해준다. 이는 신화 비교뿐만 아니라 고고학에서도 증명하는 내용이니까. 재미있게도 포항의 오늘날 주력사업이 제철업이 아닌가? 1,850년 전에도 포항이 철과 연관이 있었다는 게 인상 깊다. 신라 때는 우리가 일본에 철을 전파했지만, 반대로 1970년대에는 우리가 일본 선진기술을 적용해 포항제철을 설립했으니 뭔가 묘하다.
귀비고 전시관 전경들. (왼쪽) 신라 일월신화를 기록한 한일 고서들. (가운데) 일본으로 간 신라인이 전해준 문화들 (오른쪽) 동아시아 일월신앙 소개
일월 신앙의 전래에 대해서도 잘 전시했다. 바로 삼족오에 대해 전시한 것. 20년 전 드라마 주몽이 시작할 때 나오는 새가 삼족오라 이제는 누구나 다 안다. 삼족오는 태양 안에 사는 세 발 달린 까마귀를 상징하는데, 한중일 모두가 공유하는 상징이다. 중국에는 양사오 문화, 한국 고구려 고분 벽화와 일본 건국신화와 연관이 있다는 것. 그러고 보면 연오, 세오 이름의 오(烏)는 까마귀를 의미한다. 게다가 직물을 짠 걸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일월제를 주관하는 제사장이었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리고 이 일월 신앙이 이들의 기술 전파와 함께 일본까지 전래된 것.
이는 왜 여기가 태양을 맞이하는 영일만(迎日灣)이 되었는지도 잘 말해준다. 실제로 일제강점기 전까지 오늘날 오천읍 해병대 제9118부대에 있는 일월지에서 매년 9월 중양절에 제사를 지냈다는 옛 기록이 있다. 제사는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 잠시 잊히다가 1995년에 영일만축제로 다시 부활했는데, 2007년 일월문화제로 명칭을 변경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매년 10월에 축제가 진행되는데, 올해 코로나19가 진정되면 꼭 가봐야겠다.
일월정과 한일관계
귀비고를 나오면 옆에 한국과 일본의 정원들을 꾸며 놓았다. 아무래도 한일 교류의 역사를 상징하기 위해 조성해 놓은 것 같다. 정원 위에는 배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나루쉼터가 있는데, 아무래도 관광객의 편의를 위해 만든 것 같다. 옛 신라 가야 고분에서 6세기에 제작한 고대 배 모양 토기가 있는데, 뱃몸이 홀쭉한 토기와 비교하면 너무 퍼져있다. 배 앞에는 커다란 나침반이 있는데, 블라디보스토크, 도쿄, 상하이 등 한중일 주요 도시의 방위(方位)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잘 설명해 준다.
(왼쪽) 한국뜰 (가운데) 일본뜰 (오른쪽) 나루쉼터
또 하나의 관광객 편의시설은 바로 일월정이다. 영일만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는데, 파도치는 모습이 장관이다. 그리고 건너편에는 포스코 포항제철소가 보인다. 연오, 세오는 고대 초기 신라와 왜와의 교류, 포스코는 오늘날의 한일 교류를 상징한다. 게다가 철기문화를 서로 주고받았다는 것이 뭔가 묘하다. 두 교류 모두 양국 모두 경제적으로 크게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고대나 오늘날이나 양국 제조업 규모를 확대시켰음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연오와 세오의 순조로운 일본 정착과 모국 신라를 도운 이야기와 달리 오늘날 한일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2019년 우리나라 대법원에서 일본제철 강제징용 소송 배상 판결로 일본 정부가 우리나라에 핵심소재 수출을 제한하는 무역보복조치를 강행했다. 이로 인해 한국인들은 일본 제품 불매운동을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계속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 정치권이 조선인 위안부와 강제징용 역사를 여전히 부인하고 있어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이 아직까지 제국주의 잔재를 청산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일본이 북한보다 앞으로 더 큰 위협이라고 말한다.
한일 양국 사이 갈 길이 요원해 보이지만, 이제라도 일본이 잘못된 제국주의 찌꺼기를 청산하고 연오와 세오 이야기를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잘못한 역사 그 자체가 영원히 일본에게 열등감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옛 나치의 만행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들이 잘못한 역사를 청산하여 EU 국가들에게 신뢰를 얻은 독일의 사례가 있지 않은가? 연오랑과 세오녀 테마공원이 한일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역사교육의 장이 되길 바라며 길을 나섰다.
일월정과 바다
일월정 바다 건너로 포항제철이 보인다. 1,850년 전 신라인들은 일본에 철기를 전해주었다. 그리고 1970년대에는 일본의 도움으로 포항제철을 설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