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과메기하면 누구나 포항 구룡포를 떠올린다. 청어나 꽁치를 짚끈에 꿰어 3~10일 동안 찬 바닷바람에 말린 건데, 초고추장에 찍어 생미역에 먹으면 맛있다. 쪽파, 마늘, 또는 청양고추와 함께. 조선시대에도 포항 과메기가 기록에 나오는 것을 보면, 역사가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구룡포 뒤편으로 특이한 집들이 있다. 바로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어부들이 살았던 가옥이다. 1883년 조일통상장정이 체결되면서 일본의 가난한 어민들이 조선 동해 어장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과메기로 유명했던 구룡포도 지난 번 내가 소개한 방어진과 함께 일본어업인들에게 매력적인 어업기지였다. 이로 인해 일본인들이 거주하면서 조선시대 벽지 어촌이었던 구룡포가 번화하게 된 것. 하지만 이들이 활용한 어업선진 기술은 옛 기술로 살아간 조선인 어부들의 삶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광복 후 일본인이 떠나자 집들이 텅 비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일본인들이 지은 빈 집들은 적산가옥, 즉 적들이 만든 집으로 지정하여 압류하고 봉쇄했다. 일제강점기에서 겨우 벗어났는지라 가옥을 보존할지 유지할지에 대한 논쟁도 심했다. 그러다가 2010년 포항시가 인수하여 가옥을 잘 정비해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로 다시 만들었다. 오늘날 근대문화유산이 왜 중요한지를 깨달았고, 우리의 아픈 역사도 후손들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인식이 생겨서 가능했던 일이다.
근대 구룡포의 발자취를 찾기 위해 연오랑 세오녀 테마공원에서 다시 31번 국도를 탔다.
구룡포와 일본식 가옥
31번 국도를 타고 범포교차로까지 가면 또 다른 929번 지방도로 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이게 바로 구룡포로 빠지는 길. 왜 또 다시 929번 지방도가 다시 나오는지 궁금해서 지도를 보니, 바로 연오랑 세오녀 테마공원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들어가 호미곶을 거쳐 구룡포로 빠져 나오는 일주도로이기 때문이다. 즉 포항 지도에서 오른쪽에 톡 튀어나온 부분을 바다를 따라 달리는 도로라 보면 된다.
30년 전 내가 가족들과 함께 포항공항에서 내려 구룡포를 갔을 때는 구불구불한 길의 연속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매년 여름 아버지께서 경북대학교 수련원에서 미식축구 심판교육을 받으셨다. 심판교육을 받았던 아버지 지인들의 아들, 딸들과 바닷가에서 재밌게 놀았다. 그래서 구룡포는 나에게 특별한 곳이다. 30년 만에 찾은 31번 국도가 다시 잘 닦여서 신호등 없이 구룡포로 들어가는 범포교차로까지 갈 수 있다. 일본인 가옥거리를 가려면 929번 지방도를 타고 구룡포 아라장터의 주차장까지 가자.
아라장터 주차장에는 과메기를 파는 상인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길가로 가면 대게와 물회 맛집들로 가득하다. 왼쪽 구룡포항으로 좀 더 가면 모리국수집들이 있는데, 아귀, 새우, 홍합, 콩나물로 만든 국물에 칼국수를 넣어 만드는 구룡포 향토음식이다. 오늘날 구룡포는 한 마디로 포항 전통음식이 다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코로나19가 끝나면 점심에 모리국수를 먹고 구룡포를 천천히 돌아본 다음에 저녁에 과메기나 물회 정식을 즐기는 걸 추천한다.
아라장터 주차장에서 건널목을 지나면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라고 써져 있는 전통양식 문을 볼 수가 있다. 바로 여기가 시작점이다. 코로나19에도 사람들이 많이 왔는데, 아무래도 2019년 백산예술대상 TV부문 대상을 수상한 KBS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이 사람들을 여기로 이끈 게 아닐까? 입구 오른쪽 편 간판이 동백꽃 필 무렵 드라마 촬영지가 어디였는지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계단으로 올라가기 바로 전 오른쪽 길로 가자. 잘 정비된 일본인 가옥들을 볼 수가 있는데, 카페들로 가득하다. 좀 더 가면 구룡포 추억상회라고 있는데, 어린 시절 학교 매점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아폴로, 라면땅, 달고나와 같은 불량식품들을 볼 수 있다. 추억상회 뒤편을 보면 게시판에서 지도 하나를 볼 수 있는데, 바로 일제가 1930년 작성한 경상북도 구룡포시 거리지도다. 당시 구룡포 해안가로와 건물이 어떻게 분포했는지 잘 나타내는 역사자료인데, 구룡포를 따라 달리는 929번 지방도가 일제강점기 때 도로를 바탕으로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당시 일본인들이 살았던 집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리고 누가 살았는지에 대한 내용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일본인 가옥거리 입구
일제강점기 시절 구룡포 마을. 당시 건물상호명이 어땠는지 알 수 있다.
옛 일본인 가옥들. 왼쪽에 추억상회가 있다
추억상회 안. 학창시절에 먹던 불량식품(?)을 볼 수 있다
집들은 단층으로 이뤄진 우리나라 전통가옥과 달리 2층 구조로 되어 있는데, 1층 상점, 2층 다용도실로 이루어졌다. 또한 우리나라 집의 배치는 길의 위치와 상관없이 남향배치를 중시하는 데 반해, 일본 집들은 큰 창문들이 좁은 도로에 향해 있다. 또한 같은 편에 위치한 집과 집 사이의 틈이 좁아 도로가 집으로 닫혀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추억상회를 지나가면 상당히 큰 규모의 저택이 나온다. 원래 여기는 일본인 대지주의 집이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구룡포 근대역사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12월 포항 코로나19 집단감염 여파로 문은 굳게 닫혀 있다. 1920년대 이집의 주인은 가가와현에서 온 하시모토 젠기치(橋本善吉). 구룡포에서 매제와 함께 4척의 선박을 운영해서 사업이 크게 성공했다고 한다. 부자여서 그런지 일본에서 건축자재를 직접 조달해서 이 집을 지었다고. 당시 가난했던 조선인 어부들은 으리으리한 집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구룡포 근대역사관. 대지주 하시모토 젠기치의 집이었다.
근대역사관 왼쪽 길로 가서 다시 왼쪽으로 꺾어서 계속 올라가다 보면 계단 아래로 출입문이 보인다. 여기서 사람들이 정말 많이 사진을 찍는데, 역시 동백꽃 필 무렵에서 나오는 장면을 사람들이 따라서 찍고 있다. 심지어는 삼각대를 가져와서 찍는 사람들도 많다. 2019년에는 내가 요르단에 있어서 드라마를 볼 수 없었지만, 주인공들이 계단 아래로 구룡포 항구를 바라보는 장면이 사람들의 기억에 많이 남았나 보다. 계단 꼭대기에서 언덕 위로 올라가면 땅에서 솟아 하늘로 올라가는 9마리의 용들을 표현한 조형물이 있다.
계단에는 돌기둥들이 좌우로 나열되어 있는데, 원래는 구룡포 조성에 기여한 일본인들의 이름이 새겨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시멘트로 발라서 이름을 없애고 돌기둥을 거꾸로 돌려 세웠다고. 오늘날 새겨진 이름들은 6.25전쟁 희생자를 기린 충혼각을 세우는데 후원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충혼각은 9마리 용들을 표현한 조형물에서 계단으로 조금 올라가면 나온다. 이곳은 원래 일본 거주민들을 위한 신사가 있었는데, 6.25전쟁 때 희생된 사람들을 기념한 시설로 해방된 구룡포 주민들이 바꿔놓았다.
계단 꼭대기에서 찍은 구룡포 광경
9마리의 용
계단 양쪽에 있는 돌기둥. 오늘날에는 충혼각을 세우는데 후원한 사람들을 새겼다. 뒷면에는 구룡포 마을을 조성한 일본인들의 명단이 있었는데 해방 후 시멘트로 발라버렸다.
충혼각 뒤로는 구룡포 과메기문화관이 있는데, 코로나19로 문을 닫아서 아쉬웠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마을 벽화를 보면서 다시 내려가면 일본식 가옥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가옥을 자세히 보면 일제강점기 시절 어떤 용도로 쓰였던 건물인지 당시 건물 한자명으로 잘 나타내고 있다. 더 가면 까멜리아라는 건물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역시 동백꽃 필 무렵에서 동백이가 운영한 술집인지라 사람들이 사진을 많이 찍는 곳이다. 그러나 동백꽃 필 무렵보다 28년이나 앞서서 일본가옥거리에서 찍은 드라마가 있는데, 바로 채시라, 최재성, 박상원 주연의 여명의 눈동자. 90년대 초 오늘날에는 상상할 수 없는 시청률 50% 국민드라마였다.경동약재라고 쓰인 건너편 일본식 건물에 여명의 눈동자 주요장면들을 사진으로 전시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4.3사건, 6.25전쟁이라는 격동의 역사를 보여준 여명의 눈동자였기에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를 촬영지로 선택했으리라. 마찬가지로 구룡포도 격동의 세월을 보냈다. 구한말 작은 어촌에 일본인 어부들이 들어와 발전된 기술로 포항의 어업권을 장악했다. 조선인들 상당수는 이들 아래서 노동자의 신분으로 있었다. 당시 전체인구의 2%도 안 되는 일본인들이 어획소득의 절반을 가지고 갔다고 하니. 구룡포의 조선인들이 얼마나 분개했을 터. 그래서 해방이 된 후 구룡포 사람들은 일본인들의 흔적을 시멘트로 발라서 지운다. 그리고 우리 방식의 어업으로 구룡포를 재건했다.
지금은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많은 일본인 가옥거리 관광지로 보일 수도 있겠다. 게다가 동백꽃 필 무렵의 촬영지니 더 유명해졌을 터. 드라마로 유명해져서 구룡포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건 구룡포 사람들에게도 큰 기회가 된다. 하지만 조선인 어부가 겪었던 일제강점기의 슬픔도 잊어서는 안 된다. 오죽했으면 해방된 조선 어부들이 시멘트로 발라서 일본인들의 흔적을 지우려고 했을까? 일본인 가옥을 보존한 이유는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인들이 겪었던 아픔을 알려주려기 위해서라는 것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