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서우 Mar 15. 2021

포항 냉수리 신라비: 국보 지정 30주년을 맞이하며

비석에 드러난 1,600여 년 전 신라 민사재판 판결문

약 1,620년 전 신라시대 포항에서도 재산다툼과 관련된 재판이 있었다. 물론 내용이 오늘날 길고 지루한 것 같은 판결문과 비교하면 매우 간결하고 엉성하게 보이긴 하지만, 갈문왕을 비롯한 중앙귀족들까지 마을로 와서 재판을 했다는 내용을 보면 조정에서 심각하게 여겼던 사건이었던 것 같다. 판결 내용은 신라의 실무자가 비석에 기록했는데, 한동안 잊히다가 1988년에 어느 한 농부가 비석을 발견해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신라시대 재판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궁금증을 풀기 위해 나는 포항시 신광면으로 향했다.   


냉수리 신라비는 어떻게 세상에 나왔을까?

     

신광면은 포항시내에서 상당히 외곽에 있다. 하지만 포스코, 포항고속터미널, 포항오거리, 죽도시장정류장에서 20분 간격으로 오는 308번을 타고 종점까지 가면 된다. 자동차로 갈 때는 7번이나 28번 국도를 타고 흥해읍내까지 올라간 후 마산사거리에서 좌측으로 꺾어서 약 20분 정도 쭉 가면 된다.


신광초등학교에 도착하면 우측으로 면사무소로 들어가는 길이 보인다. 신라시대 민사소송 판결문이 기록된 냉수리신라비는 사무소 바로 앞에 있으며, 비석을 보호하기 위한 비각이 놓여 있다. 비각 가까이서 신라비를 봤는데 한자가 비석 앞뒤와 윗면에 적혀 있다, 카메라 렌즈를 확대해서 보니 몇몇 글자가 보였다. 앞면 오른쪽에서 첫 번째 줄은 한자가 흐릿했으나, 두 번째 줄부터 좀 뚜렷하게 보였다. 뒷면과 윗면의 한자들도 몇 글자 빼고는 잘 보이는 편이었다.


신광면 중심지. 오른쪽으로 가면 면사무소가 나온다
신광면사무소. 오른쪽에 정자가 보이는데 정자 안에 신라비가 있다


그러면 냉수리신라비가 어떻게 세상으로 나왔을까? 이 신라비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당시 경북 영일군 신광면 냉수2리에 살았던 이상운(당시 28세) 씨다. 당시 그가 소유했던 <장골밭>에 비석이 거꾸로 박혀 있었는데, 땅을 경작할 때 방해가 되어서 1989년 3월 30일 오전 10시경 돌을 파내서 아버지 이영우(당시 53세)와 함께 집으로 옮겼다고. 처음에는 그냥 평범한 돌로 보고 빨랫돌로 쓰려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비에 써져 있는 한자들을 보고 모사(模寫)한 후, 다음날 오후 4시 계명대 노종국 교수 연구실에 실물크기로 모사한 종이를 보였는데. 함께하던 김상현, 송보돈 교수 등이 한자들을 보고 깜짝 놀라서 이상운에게 문화재청에 절차를 밟아 신고하라 했다고 한다. 연구가 진척되고 1991년 3월 15일 문화재청이 비문의 가치를 인정하여 국보 264호로 지정했다. 


교수진들이 아니었다면 국보가 빨랫돌로 될 뻔했다. 또한 이상운 씨가 한자들을 보고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한 것도 칭찬해야 할 부분이다. 그럼 당시 교수들이 깜짝 놀랐던 한자들은 무엇일까? 워낙 옛날 글이라서 그런지 학자마다 판독법이 다르지만 그 중 하나를 골라 아래에 적었다. 비석 앞면에 있는 내용이며 아래 내용이 세로로 써져 있다.  


斯羅喙夫智王乃智王此二王敎用珍而

麻村節居利爲證尒令其得財敎耳     

癸未年九月卄五日沙喙至都盧葛文

斯德智阿干支子宿智居伐干支

尒夫智壹干支只心智居伐干支   

本彼頭腹智干支斯彼暮斯智

此七王等共論敎用前世二王敎

爲證尒取財物盡令節居利

得之敎耳別敎節居利若先

死後令其弟兒斯奴得此財

敎耳別敎末鄒斯申支      

此二人後莫更噵此財         


"신라의 탁부 사부지왕과 내지왕 두 왕이 교시를 내려 진이마촌의 절거리로써 증거를 삼아 그로 하여금 재물을 얻게 하라고 하셨다. 계미년 9월 25일, 사탁부의 지도로갈문왕, 사덕지 아간지와 자숙지 거벌간지, 탁부의 이부지 일간지와 지심지 거벌간지, 본피부의 두복지 간지와 사피부의 모사지 간지 이 일곱 왕들이 함께 의논하여 교시하였으니, 전세의 두 왕의 교시로써 증거를 삼아 재물을 모두 절거리로 하여금 얻게 하라고 하셨다. 또 교시하셨으니 절거리가 만약 먼저 죽으면 그 집 아이 사노로 하여금 그 재물을 얻게 하라고 하셨다. 다시 교시하셨으니 미추와 사진지 이 두 사람은 뒤에 다시는 이 재물에 대하여 말하지 말라고하셨다."

- 포항냉수리신라비 정밀실측보고서(2018) 133쪽 노중국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II(1992) 참조


사라(斯羅), 탁(喙), 사부지왕(斯夫智王), 내지왕(乃智王), 계미년 9월 25일(癸未年九月卄五日), 사탁(斯喙),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 아간지(阿干支). 거벌간지(居伐干支), 일간지(壹干支), 본피(本彼), 사피(斯彼)라는 단어들이 보인다. 사부지왕? 이전에 천전리 각석을 탐사할 때 심맥부지(진흥왕)의 아버지인 사부지갈문왕을 본 적이 있다. 탁, 사탁, 본피, 사탁은 신라 경주에서 성장한 6개 지역 정치체, 즉 6부(部)를 말한다. 계미년은 다수 학자들이 503년(지증왕 4년)으로 추정하는데, 이는 법흥왕이 율령을 반포(520)하여 중앙집권체제로 만들기 이전이라 당시 마립간을 중심으로 한 지역연합형 정치형태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럼 아간지, 거벌간지, 일간지는 무엇일까? 이전에 왕건 드라마를 유심히 봤으면, 견훤의 “이보시오, 파진찬”이라는 대사를 수없이 들었을 거다. 신라 17관등 중 하나로 네 번째로 높은 것이 파진찬이다. 두 번째로 높은 게 이찬인데, 일간지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아간지는 여섯 번째로 높은 아찬, 거벌간지는 9번째로 높은 급찬에 대응한다. 이는 지증왕 시절 관등을 어떻게 불렀는지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이러한 한자들을 보고 교수들이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만약 여러분들이 밭을 경작하다가 이런 글들이 새긴 비석들을 발견한다면 당장 문화재청에 신고하자.


냉수리 신라비 비각
비석의 앞면


냉수리 신라비의 내

     

그러면 냉수리 신라비가 세워진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날 신광면 냉수2리 자연부락 중 하나인 ‘돌마골’로 추정되는 진이마촌(珍而麻村)에 절거리(節居利), 미추(未鄒), 사신지(斯申支)라는 사람이 살았다. 그런데 이 셋 사이에서 어떤 재물로 인해 분쟁이 난 것. 그래서 분쟁을 판결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판결에 참여한 이들

     

사탁부와 탁부는 신라 왕실 김씨 가문으로 이뤄졌는데, 이 두 부(部)에서 인원이 많은 것으로 보아 중앙집권이전 부족회의의 특성은 유지했으나, 왕실인 김씨 가문이 의사결정을 할 때 주도권을 가졌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이는 <삼국사기>에서 지증왕이 군현제를 실시하여 왕권을 강화했다는 것과 관계가 있다. 다만 비석에 이들을 일곱 왕으로 표현하고 있어 매우 흥미롭다. 일곱왕의 의미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하지만, 대다수 학자들은 당시 신라 마립간은 다른 부(部)들의 간(干)들을 제압할 정도의 권력을 가지지 아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언급한다.


그럼 이 7인은 어떻게 판결을 내렸을까? 아무래도 지증왕 선대 두 왕인 사부지왕과 내지왕의 교시를 증거로 삼아서 절거리에게 재물의 소유권이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학자들은 주로 사부지왕을 눌지 마립간, 내지왕을 실성 마립간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만약 절거리가 먼저 죽으면 그 집 아이인 사노(斯奴)가(‘그 집의 동생 아사노’ 또는 ‘그 집의 동생 아들인 사노’로도 판독하기도 함) 재물을 가지고, 미추와 사신지는 다시금 이 재물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했다. 재물이 무엇인가에 대한 내용은 아쉽게 비석에 상세히 기록되지 않았지만 토지나 노비를 제외한 재화 또는 조세를 걷을 수 있는 권리라는 학자들의 견해가 있다. 


뒷면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만약 미추와 사신지가 다시 말썽을 일으키면 중죄를 준다고 교시했다고. 일부지 나마(奈麻: 11등급 신라관등) 등 전사인(典事人)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아무래도 지도로갈문왕을 비롯한 고위 관리 7명의 판결을 전달한 사람들로 보인다. 그리고 일이 완결되어 소를 제물로 잡아 의식을 취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주요 재판이 끝내고 시행한 중요한 제사 의식으로 보고 있다. 윗면에는 촌주 유지간지와 수지일금지가 그 해 일을 마쳐서 기록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비석의 뒷면
비석의 윗면


재미있는 건 비슷한 성격의 신라비가 포항에 하나. 울진에 하나가 있다. 전자는 국보 제318호 포항 중성리 신라비, 후자는 국보 제242호 울진 봉평리 신라비다. 포항 중성리 신라비는 2009년 월에 포항 북구 흥해읍 중성리에서 발견되었는데 현존하는 신라비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다수 학자가 501년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 중성리 신라비도 냉수리의 것과 비슷하게 북구 흥해읍에 거주하는 김헌도 씨(당시 46세)가 도로개설 공사현장에 치우쳐 있던 편평한 돌을 집으로 가져와서 비석을 씻는 도중 한문이 있는 것을 보고 포항시에 신고해서 알려졌다. 중성리 신라비의 대략적인 내용은 ‘빼앗은 재물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어라’인데, 역시 재산분쟁에 대한 판결문이다. 마찬가지로 당시 신라 6부와 신라관등명들이 나와서 신라 금석문을 비교연구할 때 소중한 자료이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내가 들렀던 흥해읍에서도 신라시대에 큰 민사소송이 있었을 줄이야. 울진 봉평리 신라비는 나중에 언급하도록 하겠다.


냉수리 신라비 판결문은 오늘날처럼 치밀하진 않지만, 재판을 하는 과정과 법흥왕 이전 정치권력이 어떠했는지가 잘 나타나 있다. 지증왕으로 추정되는 지도로갈문왕은 귀족 연합체인 6부를 완전히 제압한 형태는 아니었다. 즉 중요한 사안을 논의할 때는 지방 귀족 세력들을 무시할 수는 없던 시대였다. 이는 비석에서 판결을 한 7인의 고위인사를 칠인왕으로 표현한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리고 재판이 끝나고 소를 도살하는 의식을 행하였다는 내용도 있는데 당대 냉수리 재산상속 재판을 신라 조정과 귀족연합체가 상당히 심각하게 바라봤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다. 


이번을 냉수리신라비를 만나보며 왜 학자들이 신라 금석문 연구에 공을 쏟는지 다시금 깨달았다. 특히 냉수리 신라비는 신라 조정까지 간 중요 소송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와 중앙집권사회로 되기 전의 신라 당대 왕실과 귀족 간의 권력관계를 잘 말해주는 비석이다. 이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나오지 않는 내용이라 상대적으로 적은 삼국시대의 사회상을 보완할 수 있는 중요한 역사자료다. 이번을 계기로 앞으로 지역을 여행할 때 삼국시대 중요비석을 놓치지 않고 보겠다는 마음을 다지며 포항시 신광면을 나섰다.


포항 중성리 신라비.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