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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우 Mar 12. 2021

장기읍성과 유배 문화체험촌

조선시대 최고 유배형지 중 하나였던 장기현

포항시 남구 장기면은 포항 남동쪽 동해에 면해 있다. 면 북쪽으로 구룡포, 서쪽으로 오천읍, 동쪽으로 동해가 있다. 다만 포항시내에서 많이 떨어져 있고, 시내에서 장기로 가는 800번 버스 배차간격은 50분이나 되어 시간을 잘 맞춰야 한다.


그래서인가. 조선시대 당시 장기현은 주요 유배지로도 유명했다. 조선건국 때부터 고종 32년(1895)까지 무려 117명이 유배되었는데, 그 중 우암 송시열 선생과 다산 정약용 선생도 있다. 장기면은 조선수도 한양에서도 멀리 있는 곳인데다가 동으로는 바다 서로는 산으로 막혀 있어서 유배지에 적합한 환경이었다.


또한 이렇게 고립된 지역은 국가방위시설을 구축하는데도 적당했다. 무려 고려시대부터 장기면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니까. 고려시대에는 거란과 여진의 침입을 막기 위해 흙으로 성을 쌓았다. 조선시대에는 동해안에서 노략질하던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아예 돌로 읍성을 건설했다. 도시가 발전하면서 읍성의 원래 형태는 사라졌지만,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성벽으로 옛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장기에 유배되었던 인물들의 자취와 읍성의 흔적을 보기 위해 포항 장기면으로 향했다.

     

장기읍성 유배문화 체험촌 - 위구르계 조선인 설장수,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

     

구룡포항에서 다시 31번국도로 돌아가 감포방향으로 향하자. 계속 내려가다 모포리를 지나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오천 방향으로 우회전하자. 길을 하천을 따라 쭉 가다보면 929번 지방도를 다시 만나는데, 여기서 장기면 방면으로 좌회전하자. 장기면 방면으로 계속 가다보면 장기유배 문화체험촌이 보인다. 만약 구룡포항에서 동해안을 보면서 운전하고 싶을 때는, 경북대 수련원으로 가는 길로 빠진 다음 하정삼거리에서 31번 국도와 합류하자.


유배 문화체험촌 주변을 보니 주변이 온통 산으로 가득하고, 민가와 시장도 눈으로 안 보인다. 직접 와서 보니 왜 조선시대 때 장기를 유배지로 선택했는지 알 것 같다. 유명 소설가와 철학가들이 시골 암자나 수도원에서 생각을 정리하며 책을 썼다는 얘기를 수없이 들었는데, 여기도 그런 사람들에게 가장 적당한 곳이 아닐는지? 하지만 나같이 도시의 편리함을 좋아한다면 여기서 얼마나 있을까나? 입구를 통과하면 장기 유배지가 어떠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조선시대 세종 때 <배소상정법>이 정비됨에 따라 장기는 한양에서 30개 역 밖에 있는 바닷가 고을에 해당되어 유배지로 자주 활용되었다고 한다. 오늘날 포항과 경주는 KTX로 연결되어 교통이 편리하지만, 그런 건 없었던 조선시대 때 유배형을 받은 이들이 여기로 오는 건 매우 고통스러운 여정이었다. 길은 영남대로를 이용했는데, 한양에서 용인과 죽산(안성)을 지나 충주 - 문경새재 - 상주 - 영천 - 경주를 거쳐 내려온 것. 충주부터 경주까지의 길은 오늘날 중부내륙고속도로로 내려와 상주에서 상주영천고속도로를 이용하고 영천에서 경부고속도로로 경주로 오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당시에는 장대터널이 없어서 산을 오르고 내리는 일을 반복해야 했기 때문에 체력소모가 심했다. 한양에서 장기면까지는 약 850리였는데, 걸어서는 9일에서 10일 소요된다. 조선시대 후기 기록에서 유배 시 하루 평균 80-90리를 가도록 규정했다는 것을 참고한 것이다.


장기 유배문화 체험촌 입구
장기 유배지는...


그리고 유배형은 사형 다음으로 무거운 형벌임을 명심하자. 유배를 가기 전 유배거리에 상관없이 죄인은 우선 장(丈) 100대를 맞는다. 물론 장 100대는 워낙 가혹한 형벌인지라, 정치 문제로 귀양을 갈 경우 장형을 면제해주었다고 한다. 장을 맞는 대신 벌금을 내는 경우도 있었고. 유배길 비용도 원래는 스스로 부담해야 한다. 물론 관직자의 경우에는 국가에서 말을 지급하지만, 재산이 넉넉지 않으면 가산을 다 털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돈 없는 양반의 유배길을 오늘날에 맞춰보면 장형을 당해 성치 않은 몸으로 자기 사비를 쓰며 특전사 천리행군을 하는 셈이다. 물론 말 타고 가는 이도 있었겠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다.


유배지 안내판을 보고 왼쪽으로 향했는데, 조선건국 이후 유배자 목록을 볼 수 있다. 그럼 장기에 처음으로 유배간 이는 누굴까? 문하시중 설장수인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마자 그를 유배형에 처했다. 이색과 우현보와 도당을 결성해 반란을 모의했다는 이유로. 재미있게도 설장수는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아버지를 따라 고려에 귀화한 위구르계 몽골인이다. 고려에 잘 적응해서 그런지 1362년 과거시험에 합격했고, 정도전과 과거시험 동기다. 오늘날로 보면 이탈리아계 미국인 가족이 한국으로 귀화한 후, 자녀가 성장하여 외교관 후보자 선발시험에 합격한 셈. 이후 이성계, 정도전과 공양왕을 옹립하여 9공신이 되어 승승장구했는데, 후에 정몽주가 급진 개혁파인 이성계와 정도전을 정계에서 축출하는 일이 생긴다.


문제는 공양왕이 정몽주와 고려왕권을 지키기 위해 왕세자와 설장수를 명나라 특사로 보내면서 급진 개혁파와 원수지간이 된 것. 이후 이방원이 정몽주를 암살하여 이성계가 다시 권력을 잡고 조선을 건국하면서 정도전이 설장수에게 반란을 모의했다고 뒤집어 씌웠다. 하지만 이성계는 설장수의 외교능력을 버리지 않아 6개월 만에 그를 복직시킨다. 명나라 사정에 매우 밝은데다가 몽골어와 중국어에 능통했기 때문이다. 외교기구인 사역원에서 일하면서 역관 선발시험을 개편하고 <직해소학>이라는 한어 교재도 편찬해서 조선 초기 역관제도와 외국어 교육을 정립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6개월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장기 사람들이 설장수를 볼 때 기분이 어떠했을까? 아마 우리나라 옛 시골 아이들이 외국인을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기분과 같았을 것이다.  


조선 시대 장기로 귀양 간 사람들
이런 이유로도 귀양살이 한다


그로부터 283년 후 주자학에 조예가 깊은 학자이자 정치가가 장기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된다. 이름은 송시열. 효종 때는 북벌론자, 현종 때는 예송논쟁에 자문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조선 중기 사림사상을 제대로 연구하려면 송시열이 펴낸 책을 연구하는 것이 필수다. 누구는 독선적이고 보수적인 성격인 송시열 때문에 조선 성리학이 교조주의에 빠졌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의외로 당대 사회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져, 대동법을 확대하고 양반들에게 군포를 징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성리학의 실천을 무엇보다 강조한 사람이기도 했고. 자기 잘못으로 인한 귀양살이로, 53년 동안 함께 한 아내의 마지막을 함께하지 못해 안타까운 마음을 담은 제문(祭文)도 썼다.


그럼 왜 송시열이 장기로 귀양을 왔을까? 바로 제2차 예송사건(갑인예송)에 휘말린 것이다.  효종 왕비 인선왕후가 사망했는데, 효종의 양어머니인 자의대비가 여전히 생존해 있었다. 그래서 자의대비가 상복을 얼마나 입어야 하는가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었는데,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은 인선왕후는 맏며느리가 아니라 9개월짜리인 대공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현종이 이를 반대하여 남인의 1년 설을 채택한 것. 그러다 얼마 안 되어 현종이 승하하자, 숙종이 송시열에게 예를 그르친 죄를 물어 변방으로 유배한 것.


장기에서는 거제로 유배지가 옮겨질 때까지 4년 동안 오도전의 집에서 머물렀는데, 전시된 집 주변을 보면 뭔가가 심어져 있다. 유배형을 받은 이의 죄가 무거우면 가시가 돋는 탱자나무를 거주지 주변에 심어서 감시를 강화한 것인데 이를 위리안치(圍籬安置)라고 한다. 상당히 높은 수준의 가택연금이지만 그래도 성리학에 명망이 있었던 사람인지라 집주인 오도전이 잘 대해줬다. 송시열에게 제대로 가르침을 받아 훗날 마을의 훈장이 되었다고. 오도전 뿐만 아니라 장기현 향림들도 우암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들은 훗날 죽림서원을 건립한다. 또한 오늘날 장기초등학교 부지에 은행나무를 심었다고 하는데 오늘날까지 살아있다. 이후 다시 한양으로 복귀할 수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송시열은 숙종이 후궁 장희빈이 낳은 아들을 왕세자로 지정하는 걸 반대하다가 결국 사약을 받았다.


우암 송시열 적거지 모형과 옛 장기현 지도
오도전의 집에 위리안치된 송시열. 가시돋힌 탱자나무가 무성하면 그야말로 가택연금이나 다름없다.


송시열이 장기를 떠난 지 122년이 지나 수원성을 설계했던 이가 천주교 박해사건에 휘말려 장기로 유배를 오게 된다. 바로 다산 정약용 선생. 다산 선생의 셋째 형 정약종이 천주교 책들과 주문모 신부 편지를 농짝에 넣어 옮기던 중 포졸에게 압수되어 체포당했는데, 이른바 책롱사건이라 한다. 당시 어린 순조를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한 정순왕후는 노론 벽파여서 정치 입장을 달리하는 남인들을 숙청하려고 했는데, 당시 남인들 중 천주교를 믿는 이가 많았다. 정약용 형제들도 남인들이라 책롱사건에 연루된 것. 약용, 약전 형제는 약종의 집에서 그들이 천주교와 연관이 없다는 증거문서가 발견되어 유배형으로 감형되었다. 셋째 형은 끝내 순교를 택하여 참수형을 당했는데,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서울에서 그를 복자로 승인했다.


정약용은 장기에 220일 동안 머물러 있었다. 장기에 있는 동안 시를 무려 130수나 지었다고. 하지만 지인들로 가득했던 송시열과는 분위기가 매우 달랐다. 아무래도 성리학과 벗어난 서학과 연루가 되어서 찬밥신세였지 않았을까? 그래서인지 다산 정약용이 살았던 곳은 우암 선생보다 더 초라하다. 게다가 친척 황사영이 천주교 박해를 막아달라고 외세군대를 끌어들이려는 편지를 보내다가 조정에 발각되어 서울로 압송된다. 이후 강진 18년 유배생활이라는 더 가혹한 형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암과 다산의 유배이야기 외에도 조선시대 형벌체험장과 민속놀이마당을 마련해 뒀다. 또한 우암적거지 구석을 보면 옛날 화장실이 어떠했는지도 볼 수 있다. 한지 뜨기, 단청만들기와 같은 체험프로그램도 있는데, 코로나19로 중단된 것 같다. 역사기록을 바탕으로 유배문화 체험촌을 만든 것은 상당히 기발한 생각이다. 유배생활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금 알 수 있었던 공간이었다. 


다산 정약용 적거지 모형
옛 화장실


20년 넘게 복원 중인 장기읍성

     

유배문화 체험촌을 나서고 장기면내로 들어가면 읍성로라는 길이 나온다. 상당히 구불구불한 길인데 바로 고려와 조선의 국방요충지인 장기읍성으로 가는 길이다. 근데 이 구불구불한 길이 다산선생이 장기현에 도착하여 관아에 하루 머물고 바로 쫓겨나 관리를 따라 내려온 길이다. 이후 마현리 구석골에 늙은 장교 성선봉 집을 거처로 삼았다고. 길을 따라 끝까지 올라가면 1994년 대한민국 사적 제366호로 지정된 장기읍성을 볼 수 있다.


읍성입구로 들어갔는데 아무래도 성문터로 보인다. 성문터 주변 성벽들이 아스팔트길로 많이 훼손되었는데, 옛 읍성 안에 주민들이 살고 있어서 그렇다. 주민들의 편의도 생각해야 하는지라 성문 복원이 쉽지는 않을 듯하다. 하지만 성벽 길은 매우 잘 정비되어 있었다. 성벽 옆에 ‘금(今)’으로 써진 깃발을 두어 실제 병사들이 주둔한 느낌도 들었고.


장기읍성으로 올라가는 길. 장기읍성 동문 터.


하지만 전문가의 눈은 그렇지 않나보다. 2007년 유홍준 당시 문화재청장이 여기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장기읍성을 직접 둘러보고 문제점을 혹독하게 지적했다. 문화재청과 포항시가 1998년부터 2004년까지 총 140억 원을 들여 성곽을 보수하기로 했는데, 청장이 방문할 당시 예산이 배정된 금액이 겨우 48억 원이었다고. 예산이 찔끔찔끔 지원되어서 매년 입찰을 새로해야 했는데, 잦은 입찰로 인해 시공업자가 수시로 바뀌면서 성벽돌의 일관성이 없어졌다고 비판했다. 게다가 유 청장이 다녀간 이후로도 성곽 윗 부분을 시멘트와 회백칠로 마무리한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성벽은 우여곡절 끝에 거의 다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성벽 옆에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 있었다. 입구 왼쪽편이 상대적으로 경사가 낮은 것 같아서 거기서부터 성벽둘레길을 걷기 시작했다. 성벽을 걷다보면 네모난 형태로 튀어나온 구조물이 나오는데 이를 치(雉)라고 한다. 이는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삼면에서 공격하기 위해 만든 방어시설이다. 읍성에 치가 무려 12곳이나 있는데, 험준한 지형을 바탕으로 남동쪽 바다로 들어오는 왜구들을 막기 위함이었다. 실제 걸어가보면 일정한 간격마다 치를 볼 수 있다. 다만 수원 화성처럼 성벽 위에 일정한 간격으로 작은 네모 모양으로 뚫려 있는 벽들이 보이지 않는다. 이를 여장(女墻)이라고 하는데, 낮은 담장으로 적으로부터 몸을 보호한 후 적을 효과적으로 공격하는 시설이다. 아쉽게도 경주문화재연구소 지표조사 때 여장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복원을 함부로 하기가 어렵다.


계속 가다보면 성벽 밖에 묘지들이 보인다. 묘지 주변에 반원형으로 말린 성곽이 있는데, 항아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옹성(甕城)이라고 한다. 옹성을 만드는 이유는 적들이 성문을 부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서다. 이는 적들이 통나무로 빠르게 돌격하는 것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또한 옹성과 성문 사이 공간이 매우 좁아서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적 인원들이 제한되어 침투한 적들을 쉽게 격퇴할 수 있다. 아무래도 여기는 서문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장기읍성 둘레길. 네모난 형태로 튀어나온 구조물을 치(雉)라고 한다. 다른 읍성과 달리 여장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장기읍성 서문터와 옹성
옛 서문의 흔적


서문을 지나 민가를 거치면 다시 성벽이 연결되는데 이번에는 문루가 멀리서 보인다. 바로 장기읍성 북문이다. 북문은 2013년부터 복원을 실시하여 2015년 6월에 중건되었다. 원래 장기읍성은 고려시대 때 거란과 여진을 막기 위해 흙성으로 구축했다. 그러다가 세종 때 석성으로 강화시킨 것. 아무래도 왜구 침입을 막기 위한 대책으로 보인다. 왜구침입을 막기 위해 세종은 이종무에게 대마도 정벌을 지시했을 정도였으니. 북문에도 서문처럼 옹성이 있고, 북문 앞에 장기 유배문화 체험촌으로 갈 수 있는 산책로를 볼 수 있다. 1km라고 하니 걸어서 한 15분 정도 걸리지 않을까?


북문을 지나 입구로 다시 돌아갈 때 내리고 오르는 길이 상당히 가파르다. 가파른 길 사이에 골짜기로 된 곳이 보이는데, 아무래도 수구(水口)가 있었던 곳이 아닐까? 성벽 내부에 스며드는 물들을 배수하기 위한 시설이라고 볼 수 있다. 2020년 8월에 5억 9천 만원에 가까운 예산으로 여기 주변에 대한 정밀발굴조사와 시굴조사를 실시한다고 한다. 이번 조사로 장기읍성의 배수원리에 대해 밝혀졌으면 좋겠다.


장기읍성 북문
멀리서 바라본 북문과 성벽. 북서쪽 산을 잘 활용한 방어시설임을 알 수 있다.
입구로 다시 돌아가는 길. 중간에 나무로 성곽이 끊어진 것처럼 보이는데 배수시설인 수구가 있었던 곳이다. 이곳 성벽을 활용해 동해에서 장기천을 타고 쳐들어오는 적을 막았다.


수구지를 지나 다시 읍성입구로 돌아왔는데, 읍성입구는 동문이다. 즉 읍성은 문이 3개가 있는 구조다. 동문에서 아스팔트 길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면 장기향교가 나오는데, 태종 때 처음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서 선조 때 다시 지었다고. 이후 정조 때 오늘날 장기초등학교 동편으로 옮겨 짓다가 장기읍성이 있던 객관자리에 다시 명륜당과 대성전을 지었다. 여기는 원래 사신이나 출장관원들이 머물던 숙소였던 것. 향교 근처에 지방관아의 중심 건물인 동헌도 복원계획에 있다고 하는데, 진척이 더딘 것 같다.


장기읍성은 서북쪽이 산악, 동남쪽이 하천에 접해있는 전형적인 배산임수형 구조다. 1991년에 읍성 지표를 조사했던 경주문화재연구소는 <장기읍성 지표조사보고서>에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 세 번째 유형은 산성형 위치에 쌓은 읍성으로, 위치는 산상인데 기능은 읍성이었던 예로서, 이러한 형식의 읍성으로서 가장 대표적이면서 보존된 것이 바로 장기읍성이라고 할 수 있고, 그 가장 전형적인 존재라 할 수 있다. …… 세 번째 유형의 것은 그리 많은 예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내륙인 황간읍성처럼 한쪽이 성벽을 이루고 한쪽이 안부(鞍部)를 거쳐 산으로 이어지는 테뫼식의 읍성이 있기는 하나, 장기읍성과 같은 전형적인 예는 이제껏 찾기 힘들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다면 오히려 장기읍성은 우리나라 읍성의 한 새로운 형식으로서 다루어야 할 중요한 자료가 된다.”


장기읍성 복원사업 중 지방관아의 중심부인 동헌을 복원시키는 계획도 있다. 게다가 낡은 가옥과 장기간 방치된 빈 주택지도 아직 정리하지 못했다고. 장기 유배문화 체험촌으로 가는 산책로가 정비되어 관광지 연계가 강화되긴 했지만, 읍성의 역사를 말해줄 문화해설관광사 배치도 아직 요원하다. 어쩌면 유홍준 전 청장이 혹독하게 비판했던 찔끔예산이 아직까지 이어지는 건 아닐지? 추가복원사업과 사후관리가 잘 이뤄져서, 장기면의 옛날 국방시설과 유배지가 살아있는 역사 공간이 되기를 기원해 본다.


유교 성현을 모신 장기향교 대성전. 원래는 객관이었다. 고종 때 마현동에 있었던 것을 다시 읍성 안으로 이전한 것.
장기향교 명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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