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서우 Jun 25. 2021

고성 DMZ박물관과 통일전망대

한국전쟁이 터진 지 71주년... 언제쯤 철조망이 사라질까?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무려 71년의 세월이 흘렀다.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난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으로 멈췄지만, 남북 사이에는 군사분계선이 놓이게 되었다. 남북 간 충돌을 막기 위해 군사분계선에서 남북 2km에 비무장지대를 설정하였지만, 비무장지대에 삼엄한 경비는 70년 가까운 세월인 오늘날까지도 여전하다.


60-70년대에는 북한의 무장공비의 도발이 빈번했었다. 청와대를 기습해서 대통령을 암살하려고 했던 1.21사태, 북한 측 무장공비가 무려 120명이나 침투했던 울진-삼척 무장공비 사건. 심지어는 공동경비구역에서 주한 UN군 장교를 살해했던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도 있었다. 도발뿐만 아니라 서울로 향하는 여러 길에 땅굴까지 파서 국민들을 경악시킨 사건들도 있었다.


90년대~21세기에는 60~70년대보다 도발의 규모가 줄어들고 남북정상회담이 열렸지만,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연평해전,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사건을 일으켜 북한의 도발은 여전했다. 최근에는 정부에서 북한 도발을 억제하여 평화 프로세스로 이끌려고 노력하고 있으나, 여전히 DMZ는 70년 전처럼 철조망으로 매우 삼엄한 가운데 있다. 고성의 통일전망대로 들어가려면 통일안보공원에서 출입신고를 해야 한다.


언제쯤 같은 민족 사이의 대결이 멈출 수 있을까? 70여 년 동안 여전한 철조망들은 언제쯤 없어질 수 있을는지? 그리고 속초의 아바이들과 전국의 실향민들은 언제쯤 고향을 복잡한 절차 없이 구경할 수 있을지? 조금이라도 개선되고 있는 남북관계가 언젠가 물꼬가 트이고 통일로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고성의 통일전망대로 향했다.

     

고성 통일전망대 가는 길


고성 통일전망대는 7번 국도 가장 최북단에 있다. 아니 오늘날 한반도 현실을 반영해 우리 평범한 사람들이 갈 수 있는 최북단 지역이라고 하는 게 맞다. 1971년 제정된 일반국도노선지정령에서 7번 국도의 종점은 함경북도 온성군 유덕면이라고 되어 있으니까. 전망대로 향하다 보면 출입신고를 하라는 현수막을 볼 수 있는데, 반드시 따르자.  


내 차의 기름이 떨어져 혹시나 해서 주유소를 찾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출입신고소 오른편으로 하나가 있었다. 군사분계선 남쪽에 있는 최북단 주유소인데 군사지역에 가까운 데다가 시가지에서 멀어서 그런지 리터당 가격이 다른 곳보다는 가격이 높은 편이었다. 그래도 통일전망대를 가다가 긴급하게 주유를 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 이를 참고해 통일전망대 주유소에서 나처럼 사진을 남겨보자. 언젠가 최북단의 지위를 함경북도 온성군 두만강변으로 넘기기를 희망하며.


대한민국 최북단 주유소에서


통일전망대 출입신고소로 들어갔다. 출입신고소로 들어가기 전 물건을 팔고 있는 상인들이 보이는데, 가장 눈에 띈 건 전투식량과 북한술을 파는 곳이었다. 청송 백두산 령지술, 들쭉술, 강계산 머루술뿐만 아니라 북한 화폐와 우리나라 대통령 취임 기념우표 등을 팔고 있다. 북한술을 우리가 소량이라도 수입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설탕과 물물교환으로 맞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남북경총통일농사협동조합이 북한 개성고려인삼무역회사와 계약을 체결해서 물물교환이 가능한데, 남북 직거래가 아닌 남포에서 중국 다롄을 경유해서 들어온다. 우리가 설탕을 보내는 이유는 유엔제재를 피하기 위해서다.


북한술을 뒤로하고 통일전망대 창구에서 출입신청서를 받아 작성했다. 나는 홀로라서 내 이름과 차량만 기록하면 되지만, 동승자가 있으면 동승자 이름과 나이를 빠지지 않고 써야 한다. 이를 작성하고 창구로 간 다음 통일전망대 출입료 3,000원과 주차료 5,000원을 더한 8,000원을 지불하면 된다. 참고로 통일전망대로 가는 대중교통은 없다. 만약 자차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면 속초나 고성에서 카셰어링 서비스나 렌터카를 이용하도록 하자.

출입신고소 상점에 진열된 북한술들
통일전망대 출입신고소 전경(좌)과 신고서 양식(우)


출입신고소를 지나서 7번 국도를 따라가면, 헌병들이 나를 맞아준다. 헌병들에게 출입신청서를 제출하면 커다란 통일전망대 출입증과 신청서의 남은 복사본을 나에게 준다. 그리고 차에 있는 인원이 실제 내가 작성한 것과 맞는지 확인한 후 이상 없으면 민통선을 통과해 통일전망대로 출발할 수 있다.


7번 국도를 타고 더 올라가니 북으로 가는 큰길을 막아놓았다. 큰길 좌측으로 동해선철도남북출입사무소라는 글자가 보이는데, 2006년 3월 15일에 완공된 제진역이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으로 제진역에서 북한 감호역까지 열차 시험운행이 이뤄진 기억이 난다. 하지만 제진역이 아직 남쪽 철도와 연결이 안 되어서 고립되었기에 경의선 남측 최북단역인 도라산역보다 상황이 더 열악한 편이다. 그나마 올해 말부터 강릉부터 제진역까지 연결하는 동해북부선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이렇게 되면 군사분계선의 방해가 있긴 하지만 최소한 부산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철도를 연결할 수 있게 된다.


통일전망대로 가려면 우측 편에 있는 작은 길로 가야 한다. 우측에 있는 길로 쭉 가면 DMZ박물관으로 들어갈 수 있다. 중학교 수학여행 때 통일전망대를 온 일이 있었지만, 이곳은 이번에 와서 처음 들어봐서 한 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망대 가기 전에 박물관을 관람하기로 하고 핸들을 좌로 돌렸다.


DMZ(비무장지대) 박물관


DMZ박물관에 도착하자마자 보이는 것은 목선들이었다. 내가 강릉 평화공원에서 봤던 것보다는 훨씬 더 실제에 가까웠다. 처음 나를 맞았던 목선은 북한 전마선이라고 하는데, 전마선은 육지와 배 혹은 배와 배 사이의 연락을 맡은 작은 배라고 한다. 21세기 들어서 북한 주민들이 목선을 타고 귀순했다는 뉴스를 수도 없이 들었다. 통일공원에서 정비한 목선과 달리 며칠 동안 엄청난 파도를 이기고 내려온 흔적이 바로 드러나 보인다.


목선 뒤로는 평화통일이라는 현판 위에 대형 스피커와 전광판이 보인다. 국군 심리전단에서 시행한 대북 확성기 방송과 전광판이다. DMZ에 주둔한 북한군과 인근에 거주하는 북한 주민들을 대상으로 했다고. 북한 당국보다 더 정확한 뉴스를 전달하고 군인들이 좋아할 만한 여자 가들의 노래들을 선곡하여 들려줬는데, 정권에 위협요소가 되어서 그런지 북측에서 상당히 예민하게 반응했다.  2018년 남북정상회담 후에는 남북 상호비방금지 원칙에 따라 방송이 중단한 상황이다.


대북 전광판과 확성기 방송. 2004년 남북장성급회담에서 상호비방금지를 합의한 후 이곳으로 옮겨졌다.
북한전마선(좌)과 이탈주민이 사용한 목선 윗부분(우)


DMZ박물관 들어가기 전에 몇 가지 조형물이 인상 깊었는데, 하나가 이현정 작가가 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다. 문구가 상당히 인상 깊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하자. 사랑하자. 만나자.’라고 적혀 있다. 남북관계가 상당히 경색된다고 하더라도 평화 기조는 항상 유지해야 한다는 교훈을 남기는 글이다.


그 앞으로는 옛 베를린 장벽의 일부를 떼온 것과 철책이 하나 보인다. 장벽에는 사람이 도약하는 모습과 수도관에서 흘러나오는 물과 그 아래 군중들을 그린 그림이 있는데, 독일 측에서 작가들의 그림들로 가득한 베를린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East Side Gallery)에 있는 장벽 일부를 우리에게 기증한 것이다. 오른쪽 철책은 옛 서독과 동독 사이에 삼엄하게 놓여있던 것이다. 독일 통일 전 분계선의 역할을 한 것이다.


이현정 작가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를린 장벽과 동서독 철책의 일부. 독일 측에서 우리에게 기증했다.
나의 눈길을 끈 조형물


박물관에 들어가면 1950년 6.25 전쟁부터 1953년 7월 27일의 휴전협정까지의 역사자료가 있다. 오늘날 DMZ가 생긴 이유가 바로 UN군, 중국 인민지원군, 북한군이 서명한 휴전협정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이에 서명하지 않았는데, 당시 이승만 정권이 공산주의자를 완전히 몰아내어 통일을 이룩하려는 의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우리나라의 의사를 무시한 미국과 포로 송환협정을 조인하자 북한으로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를 35,000명을 석방하는 강수를 둔다. 하지만 휴전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어 정전협정은 결국 조인된 채로 오늘날까지 이른다. 이로 인해 군사분계선 남북 2km로 만든 구역이 바로 비무장지대(DeMilitarized Zone)이다.


무장을 하지 않는 곳이라고 하지만, 남북 DMZ 내에는 70년 동안 철책과 서로를 감시하는 군인들로 가득하다. 우리가 들어가려면 출입증을 제시해야 하고, 촬영이 허가된 구역에서만 사진을 찍을 수 있다. 또한 온갖 종류의 최신 무기들이 배치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전쟁부터 지금까지 매설한 지뢰들로 가득하다. 즉 통일이 되더라도 DMZ 내에서는 검증이 된 길로만 다녀야 한다는 이야기다.


1953.7.27 휴전협정 서명시간(좌), 휴전협정 후 외신보도(우)
냉전의 유산 DMZ
DMZ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지뢰가 묻혀 있다.


DMZ와 관련된 전시물을 모두 구경하면, 80년대까지 우리와 비슷한 처지였던 독일의 분단 역사 전시물을 볼 수 있다. 동독의 국민차였다가 통일 이후 서독과 기술력 차이로 애물단지가 된 트라반트, 옛 냉전시기 동서독 경계지역 모형과 철책, 그리고 동·서독 군인들의 제복과 순찰복 등이다. 분단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과 국경초소들은 그 일부만 남아 관광객들을 끌어모으고 있고, 애물단지 트라반트도 체험상품으로써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통일을 위해 여러모로 노력을 했다. 한 때 개성공단을 운영해서 남북 간 산업협력을 한 적도 있다. 중간에 이산가족 상봉도 있어서 국민들의 눈시울을 적신 적도 있고. 게다가 박왕순 피살 사건이 있기 전까지 금강산도 정부 허가만 받으면 관광이 가능한 시절도 있었고. 하지만 아직까지 남북의 대립 양상도 여전하다. 평화를 바라는 공간을 지나니 남북이 어떻게 삐라로 심리전을 치렀는지에 대한 역사가 나온다. 심리전뿐만 아니라 최근 남북연락사무소 폭파사건처럼 남북관계가 잘 되어가는 듯싶다가 북의 도발로 또 관계가 냉각되는 행태가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박물관 밖에 전시 조형물이 하나 보이는데 오른쪽의 답답한 철책 터널을 빠져나오면, DMZ라는 조형물이 전시된 왼쪽의 공원으로 빠져나오는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답답한 철책 터널은 언제쯤 끝을 맺을 수 있을까?


옛 동독의 국민차였던 트라반트
옛 동서독 사이에 있던 철책. 사진에서 남쪽이 서독, 북쪽이 동독이다.
한 때 통일을 대비했던 개성공단의 생산품들(좌)과 평화를 기원한 쪽지들(우)
80~90년대 대북(좌), 대남(우) 심리전단. 일명 '삐라'로 부른다.
오른쪽 답답한 철책(우)을 빠져나오면, 탁 트인 공원(좌)이 보인다. 언제쯤 남북 모두 출입증 없이 비무장지대의 자연을 누릴 수 있을까?


통일전망대에 올라가서


DMZ박물관을 뒤로하고 민간인이 갈 수 있는 7번 국도의 최북단으로 향했다. 통일전망대로 들어가기 전에 낡은 기차가 하나 보이는데, ‘대한민국 마지막 커피 전문점’이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정확하게 말하면 ‘대한민국 최북단’이지만. 그 앞에는 금강산 휴게소라고 쓰여 있는데, 여기서도 북한 술들을 팔고 있다.


휴게소를 뒤로 하고 완만한 길로 전망대로 가다 보면, 망배단(望拜檀)라고 새겨진 비석이 보인다. 실제로 함경도나 북한 강원도에서 온 실향민들이 명절에 이곳을 찾아온다고 한다. 망배단 뒤로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상, 성모 마리아상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상이 통일을 기원하며 서 있다. 그 옆에는 낙산사에서 본 것과 비슷한 높이의 해수관음상이 자비로운 얼굴로 우뚝 서 있고. 그럼 개신교는? 통일전망대 옆에 아예 교회가 세워져 있다. 교회 예배실에 자유롭게 들어가 통일을 기원하는 기도를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관세음보살은 언제쯤 민족의 기도에 응답해주실까?


대한민국 최북단 커피전문점
명절 때 실향민들이 고향을 그리며 찾아오는 망배단
통일의 염원은 종교를 초월한다.


해수관음상을 지나면 흰색의 이층 건물이 하나 보인다. 바로 1984년에 준공된 옛 통일전망대다. 그 옆에는 2018년에 세워진 현대 감각을 지닌 고성통일전망타워가 있다. 새로운 통일전망대가 세워진 이후 옛 전망대는 여전히 개방되지 않고 있다. 통일전망타워 신축 이후 기념품 매장으로 탈바꿈하다가 북한전문음식점으로 리모델링하여 올해 개관한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코로나19 정국인지라 조심스러운가 보다.


새로 지은 고성통일전망타워로 올라가 전경을 봤다. 산자락과 해변 사이에 눈에 띄는 것은 해안철책과 동해선 그리고 금강산으로 향하는 도로다. 금강산도로 산자락 꼭대기에 건물이 하나 보이는데, 동해안 최북단 군 관측소인 금강산 전망대다. 코로나19 상황이 아니면 DMZ 평화의 길 고성 A코스로 방문하여 금강산을 더 가까이 볼 수 있는 곳인데, 현재는 안전상 운영하지 않는다.


옛 통일전망대와 2018년에 준공된 고성통일전망타워


그리고 정면으로 전망대 앞으로 민둥산이 보이는데, 옆에 있던 손님이 이렇게 말한다.


“산에 나무가 있느냐 없느냐로 남북을 알아볼 수 있네.”


그렇다. 저 멀리 보이는 민둥산은 바로 금강산 구선봉이다. 구선봉 옆을 자세히 보면 민가들이 보이는데, 대남선전을 위한 위장마을인 ‘입석리마을’이다. 하지만 위장마을의 선전보다는 북한의 열악한 경제사정과 에너지 자원이 부족한 현실을 잘 보여주는 헐벗은 금강산 자락이 더 눈에 띈다. 나무로 빽빽한 우리 산들과도 너무 비교가 된다. 기후변화가 요즘 세계 최우선 이슈라고 생각한다면, 당장 남북이 금강산 녹화사업에 팔을 걷어붙여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전망대 꼭대기로 올라가는 길에는 남고성, 북고성 관광명소라고 써진 게 내 눈에 띈다. 그렇다 고성군도 남북으로 딱 분할되었다. 원래 고성군은 일제강점기 전까지 북측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고성군과 남측이 수복한 조선시대 간성군으로 나눠져 있었다. 조선시대 경계와 비슷하게 분단이 이뤄진 것이다. 북측 고성군 관광명소로 유명한 곳은 전망대에서 봤던 구선봉과, 해금강 그리고 관동팔경 중 하나인 삼일포가 있다. 옛 사대부들은 삼일포, 화진포와 청간정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시를 지었는데, 오늘날 나는 그러지 못해 매우 안타까울 마음이다.


통일전망대를 뒤로 하고 하산하는 길에는 고성지역전투 충혼탑과 6.25전쟁 기념관이 있다. 한국전쟁이 터진 지 70년이 넘게 지났음에도 전쟁의 상처가 깊이 파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인해 남북관계는 오늘날에도 온탕과 냉탕을 왔다 갔다 해서 전문가들이 앞일을 예측하기 힘들게 하고 있다. 나도 북한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도발을 해오면 마음이 급속히 냉각되니까. 하지만 DMZ박물관에서 본 이현정 작가의 메시지를 잊어서는 안 된다. 남북의 다름을 떠나서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본 북녘. 오른쪽부터 해변, 철책, 동해선, 금강산으로 향하는 7번 국도가 보인다.
구선봉 옆으로 보이는 평지는 바로 위장마을인 '입석리마을'이다. 위장마을의 위용보다는 민둥산 구선봉의 처량함이 더 눈에 띈다.
남고성 북고성의 관광명소. 고성군도 남북으로 완전히 두동강 났다.
고성지역전투 충혼탑(좌)과 6.25전쟁체험 전시관(우)
한국전쟁에서 돌아오지 못한 전사자. 유해발굴의 실적은 찾아야 할 전사자의 1%에 머무르고 있다.



이전 22화 고성 화진포의 별장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