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진 전설, 외국인 선교사, 남북 독재자의 역사가 깃든 곳
7번 국도를 타고 고성군의 중심지인 간성읍을 지나 통일전망대를 가는 길 오른쪽에 큰 호수가 보인다. 바로 남녘의 최북방 석호인 화진포다. 두 호수가 화진포교 아래에 흐르는 물길로 연결되어서 그런지 둘레길이 다른 석호보다 더 긴 것처럼 보인다. 화진포도 송지호처럼 주변 개발이 덜 되어서 그런지 석호 본연의 모습을 나름 잘 간직하고 있다.
근대 화진포 역사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이 많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외국인 선교사들이 심신이 지칠 때 삼았던 휴양지가 화진포였다. 원래 선교사들이 주로 휴양지를 찾던 곳은 당시 의료선교가 활발했던 원산이었는데, 일제가 원산 선교사 휴양지를 비행장으로 전환하고 폐쇄하면서 화진포를 대체지로 제안했기 때문이다. 이때 세워진 유명한 별장이 바로 중세 유럽 미니어처 고성처럼 지은 화진포의 성이다.
선교사들의 휴가별장들은 이후 남북 정치 권력가들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화진포의 성은 한 때 김일성 가족의 별장이기도 했다. 화진포의 성으로 올라가기 전에는 1920년대에 지어진 작은 별장이 하나 있는데, 이승만 정권의 2인자로 알려졌던 이기붕 별장이다. 호수 건너편으로는 1954년에 세워진 이승만 별장이 보인다. 선교사들의 휴식처는 한국전쟁 전후로 남북 권력자들의 휴양지로 변모했다.
남북 권력자들이 머물렀던 별장은 이제 안보전시관과 통일전시관으로 탈바꿈하였다. 그리고 한 때 화진포 바다 쪽에 있었던 철책이 철거되고 민간인들이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게 되면서 이제는 명실상부한 고성의 관광지가 되었다. 석호의 아름다운 자연과 해방 전후 현대사의 자취가 남은 화진포로 가 보자.
화진포 전설과 이승만 별장
간성읍내를 지나 7번 국도를 따라 통일전망대를 향해 가면, 길 표지판에 화진포라는 흰색 글씨가 갈색 바탕에 새겨있다. 말 그대로 길 따라 들어가면 왕복 2차선 길이 있다. 2차선 길을 따라 소나무 숲으로 가득한 언덕을 넘어서 계속 가다 보면 왼쪽 소나무 숲 사이로 호수가 보이기 시작한다. 왼쪽 편에 보이는 호수를 따라가다 보면 넓은 주차장이 보이는데, 주차장 입구에 ‘이승만초대대통령별장’이라는 표시가 선명하다.
이승만 별장에 들어가기 전 화진포 광경을 보았다. 왼쪽 편과 오른쪽 모두 호수가 보인다. 그리고 그 사이로 특이하게 생긴 다리가 놓여 있는데, 바로 화진포의 남북 두 호수의 경계선을 나타내는 화진포교다. 동서로 넓디넓은 호수가 보이니까 초대 대통령이 왜 이곳에 별장을 세웠는지 이해가 갔다. 참고로 이승만 별장을 들어가기 전 매표소에서 5,000원을 내고 표를 구입해야 하는데, 구입하면 이승만 별장뿐만 아니라 이기붕 별장, 김일성 별장 그리고 생태박물관에 입장할 수 있다.
별장으로 올라가기 전에 한 여인의 동상이 보이는데, 바로 화진포 설화의 주인공이다. 원래 화진포에는 “이화진”이라는 부자가 살았다고 한다. 이 부자는 상당히 구두쇠에 성격도 고약했는데, 하루는 스님이 시주를 왔는데, 이화진은 스님에게 곡식 대신 소똥으로 시주를 주는 고약한 짓을 저질렀다. 수모를 겪은 스님은 당황하지 않고 말없이 돌아갔다고.
하지만 이화진의 며느리는 심성이 착했나 보다. 그래서 스님을 찾아서 곡식을 주어서 자기 시아버지를 용서해 달라고 했다. 스님은 며느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를 따라오되, 무슨 소리가 나더라도 뒤를 돌아보지 말라.”라고. 하지만 언덕에 올라갈 때 며느리는 집안이 걱정되어서 그런지 결국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그러자 이화진의 논밭이 모두 물로 뒤덮여 있었다. 물로 뒤덮인 순간을 보자마자 며느리는 스님의 명을 어겨서인지 그만 돌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화진포 물난리 후 살아남았던 마을 사람들이 돌로 변한 며느리를 안타깝게 여겨서 고총서낭신으로 모셨다고 한다. 그 이후로 농사도 잘 되고, 전염병도 사라졌다고.
앞에 스토리는 어디선가 본 내용이다. 그렇다. 화진포 아래 송지호의 정거재 전설과 이야기가 유사하다. 고성군에서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장난으로 만든 전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런 유사한 전설이 우리나라에만 무려 100군데 넘게 있다고 한다. 이런 유형의 형태를 ‘장자못 설화’라고 하는데, <조선읍지>에도 이러한 형태의 전설이 기록되어서 상당히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비극의 삶을 살았지만 마을 사람들에게는 평화를 선사한 며느리 동상을 뒤로하고 이승만 대통령 별장으로 올라갔다. 별장을 보니 근대식 한 일(一) 자형 건물이다. 이 건물은 1954년에 지었는데, 이승만이 이곳으로 휴양을 왔을 때 낚시를 하고 자연을 즐기기도 했다. 하지만 3·15 부정선거 여파로 터진 4·19 혁명으로 인해 이승만 정권이 몰락하자. 자연히 이 별장도 정권이 끝난 후 버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육군에서 버려진 별장을 관사로 사용하다가 1999년 7월 다시 옛 모습으로 복원하여 이 대통령과 관련된 자료와 유품을 전시하여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별장 안에는 이승만 부부가 휴가를 즐겼던 모습과 별장에 있던 유품들을 전시했는데,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별장을 뒤로하고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는데, 그 위로 또 다른 한 일자형 건물이 있다. 이승만 대통령 화진포 기념관이라고 쓰여 있는데, 그의 생애를 나타낸 전시관이라고 보면 된다. 전시관을 보니 내가 옛날 필리핀 일로코스 지방에서 봤던 독재자 마르코스 별장과 비슷한 느낌이다. 두 별장 모두 좋은 부분만 골라서 두 독재자의 삶을 미화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유족들이 치욕스러운 역사를 남기고 싶지 않아서 그런 조치를 한 것 같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의 한국 전쟁 중 민간인 대량학살(보도연맹사건), 독재, 야당 탄압과 민주주의 유린으로 인한 후유증 그리고 이로 인해 터진 4.19 혁명과 정권 몰락의 역사는 오늘날 학교 교과서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배우는 부분이다. 공개를 꺼려하는 유족들을 설득하는 일이 쉽지는 않겠지만, 역사학자들 아니 학교 역사교과서가 이미 말하고 있는 이승만 정권의 어두운 진실도 기념관에 제대로 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기붕 별장과 화진포의 성
이승만 별장을 뒤로하고 아치 양식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화진포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가자. 그러면 왼쪽으로 화진포 생태박물관이 보이는데, 생태박물관을 들어가기 전에 들어가는 입구가 있다. 왼쪽으로 꺾어 내가 산 통합입장권을 매표소에 보여주면, 김일성 별장과 이기붕 별장을 보러 갈 수 있다.
주차장 왼쪽에 양쪽이 날개처럼 꺾인 그릇의 형태로 된 돌로 만든 별장을 볼 수 있는데, 바로 이기붕 별장이다. 별장으로 들어가기 전 이기붕에 대한 기록이 남겨져 있는데 여기는 이승만 기념관과 달리 이기붕이 부통령 자리에 당선되기 위해 무리수를 감행한 3.15 부정선거와 이로 인해 민중들이 들고일어난 4.19 혁명이 명확히 언급되어 있다.
심지어는 전쟁 이후 자유당 총무부장에 임명된 후, 정치깡패들을 이용해 자유당 정권을 유지한 권력의 2인자였다는 어두운 내용까지 있다. 결국 업보는 말년에 다 뒤집어쓰는 게 진리인지, 이기붕 일가는 4.19 혁명 이후 피신해 있던 경무대에서 맏아들 이강석에 의해 전 가족이 권총 자살했다. 권력의 욕심은 결국 자기 가문을 끊어버리는 화를 불렀다.
이기붕 별장은 원래 1920년대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아무래도 선교사들의 요양 장소로 이용하지 않았을까? 그러다가 해방 이후 고성군이 38선 이북에 위치하면서 북한 공산당 간부의 휴양소로 이용되었다고. 그러다가 한국 전쟁이 끝나고 화진포 일대를 수복하자 이기붕의 부인이었던 박마리아가 사용하기 시작했다. 박마리아는 실제로 고성을 자주 방문했다고. 박마리아라... 이 전시관에는 이기붕의 부인으로만 명시되어 있지만, 사실 김활란, 모윤숙과 함께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라는 친일 단체에서 황국신민, 내선일체를 외치며 정신대 모집 활동을 했다. 그래서 친일인명사전에도 수록된 인물이다. 별장 내부에는 박마리아가 주로 이용한 별장에는 접견실, 집무실과 침실이 전시되어 있다. 이승만 별장과 다르게 자유롭게 촬영 가능하다.
이기붕 별장을 나서면 해변이 바로 보이는데, 바로 화진포해수욕장이다. 그런데 바다를 바라보는 것에 거북이상이 보이는데, 거북이 상 너머 섬이 하나 보인다. 이름은 금구도. 금색의 거북이가 깃든 섬이다. 옆에는 금구도가 광개토대왕릉으로 추정된다는 안내판이 남겨 있는데, 나는 이 안내판을 치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선 인용한 자료가 1차 사료가 아니다. 게다가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도 기록되지 않았다. 또 다른 문제는 무덤 형태인데 고구려 무덤의 형태는 주로 장군총과 같은 돌무지무덤이다.
게다가 광개토대왕 당시 고구려의 수도는 국내성이다. 신라 수도 경주와 가까운 문무대왕릉과 달리 내가 서 있는 화진포는 수도 국내성(현 중국 지린성 지안시 일대로 추정)에서 상당히 먼 곳에 떨어져 있다. 게다가 당시 화진포는 오히려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지대에 가까웠다. 왕릉을 국경지대 근처에 조성한다? 뭔가 이상하다. 그래서 그냥 거북이상, 가을동화 촬영지, 리센룽 총리 방문지 안내판만 남겨도 충분하다.
거북이상을 뒤로하면 언덕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온다. 계단을 올라가면 돌로 옛 서양 고성(古城) 저택처럼 보이는 건물이 하나 있는데, 누구는 성처럼 생겼다고 ‘화진포의 성’, 누구는 한 때 북한의 권력자 김일성이 머물렀다는 이유로 ‘김일성 별장’이라고 부른다. 별장 계단으로 올라가기 전 눈에 띄는 사진이 하나 있는데, 어린 시절 김정일, 여동생 김경희 그리고 소련군 정치사령관 소장 아들 등과 함께 찍은 것이다.
원래 김일성 별장은 외국인들 선교사들의 휴가 공간이었다. 1937년 일본 군부가 원산에 있던 선교사 휴양촌을 비행장 부지로 활용하려고 철거하면서 대신 제공한 장소가 화진포 일대였다. 휴양지 이전에 관여했던 선교사는 캐나다인인 셔우드 홀이었는데, 결핵 치료의 재원 마련을 위해 1932년 크리스마스 씰을 도입한 인물로 유명하다. 실제 조선의 결핵예방을 위해 평생을 바쳤던 인물이기도 하고. 연말에 학교에서 판매했던 기억이 났는데, 내가 우표처럼 모았던 기억이 난다. 씰 구입으로 모은 기금들이 결핵예방에 쓰이는지도 모른 채로. 우리나라 씰이 들어오기 전 캐나다에서도 20세기가 시작하자마자 이미 질병 퇴치를 위한 씰을 발행했는데, 셔우드 홀이 이를 벤치마킹해 조선에 도입한 것 같다. 셔우드 홀이 도입한 크리스마스 씰은 오늘날에도 매년 발행하고 있다.
셔우드 홀은 휴양지를 지을 건축가를 모집하고 있었는데, 찾은 사람이 바로 독일인 건축가 베버(H. Weber)였다. 베버는 히틀러 공포정치를 피해 조선에서 망명 중에 있었는데, 셔우드 홀이 화진포 해변에 휴양지를 지을 것을 지시한다. 그 결과 지은 게 오늘날 내가 바라보는 작은 고성의 모습이다. 힘든 망명 생활에서 아무래도 고향에 있는 옛 건물들을 그리워하며 지었다는 느낌이 팍팍 든다.
선교사의 휴가 공간으로 쓰였던 화진포의 성은 고성군이 북으로 편입되면서 북의 권력자였던 김일성 손에 넘어가게 된다. 이쯤 되면 화진포는 남북이 모두 인정한 여름 휴양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일성 가족들은 오늘날로 보면 아직 초등학생도 안 된 자식들과 여기에서 휴양을 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화진포의 성도 이후 우리가 수복하였는데, 전쟁이 상흔이 심하게 남아 1964년에 보수된 후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1층 전시실을 지나 2층으로 가면 벽난로와 책상, 침대를 전시한 곳이 있다. 아무래도 셔우드 홀의 개인 공간을 나타낸 것이 아닐까 모르겠다. 벽난로를 뒤로 하면 둥글게 튀어나온 방이 보이는데, 창문 너머 보이는 푸른 화진포 바다와 금구도가 나의 눈을 맑게 만든다. 아무래도 선교사들과 바다를 바라보며 마음의 안정을 얻었던 공간이 아닌가 싶다. 3층 옥상으로 가면 돌로 촘촘하게 만든 성곽이 보인다. 사방이 트여 있어서 정면에는 화진포 해수욕장이 보이고 왼쪽을 보면 화진포와 이승만 별장이 보인다. 그야말로 장관이 아닐 수 없다.
이화진의 욕심으로 물로 뒤덮인 화진포. 게다가 중의 말을 지키지 못해 돌로 변한 며느리까지. 하지만 비극 이후 화진포는 논밭을 비옥하게 하는 용수로 기능했다. 뿐만 아니라 화진포의 아름다움은 근현대까지 이어져 외국인 선교사들의 휴양공간이기도 했다. 심지어 해방 후에는 남북 지도자 모두가 사랑했던 명소이기도 했고. 김일성이 좋아했던 화진포의 성과 1954년 지은 이승만 별장은 화진포교를 사이로 서로 마주 보고 있다.
하지만 이승만과 김일성 모두 결말이 좋지 못했다. 남쪽의 독재자는 3.15 부정선거로 무리하게 권력을 탐하다가 4.19 혁명으로 무너졌다. 북쪽의 지도자는 그보다 더 오래 살았지만, 무자비했던 독재와 숙청 그리고 개혁개방의 거절은 결국 90년대 초 ‘고난의 행군’과 이로 인한 북한의 경제 침체와 몰락으로 이어졌다. 천혜의 자연에서 한 때 휴가를 즐겼던 두 독재자의 별장은 90년대까지 민간에 통제되다가 이후 점차 개방되기 시작하여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관광명소로 탈바꿈했다.
화진포에서 내가 얻은 교훈은 구두쇠 이화진과 분단 이후 두 독재자의 길을 걸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셋 다 모두 자기 욕심으로 인해 파탄의 길을 걸었다. 또한 독재자들의 별장이 있다는 이유로 한 때 화진포는 출입금지 구역이었다. 게다가 북한과 가까워서 철책으로 가득하기도 했고. 하지만 20세기가 지나 독재자들을 역사로 보내면서 화진포는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마치 전설의 화진포와 서낭신으로 분한 며느리가 땅을 비옥하게 하고 마을의 평화를 가져왔던 것처럼. 이제부턴 화진포에 구두쇠를 들이면 안 된다. 아니 어쩌면 화진포의 두 호수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할지도 모르겠다. “욕심부리지 말고, 넓은 화진포 호수처럼 열린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