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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우 Jul 02. 2021

고성 왕곡마을

남녘에서 보기 힘든 북방식 양통집 마을에서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오봉리에는 정겨운 초가집들로 가득한 고성왕곡마을이 있다. 남녘에 남아있는 거의 유일한 북방식 한옥 집성촌이라는 희소성 때문에 2000년 1월에 국가민속문화재 제235호로 지정되었다. 마을 전체를 보면 우리나라 대다수 전통마을들과 같이 차가운 북서풍이 다가오는 북서쪽은 산으로 가로 막혀 있고,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남동쪽은 활짝 열려있는 구조다.  


그런데 집 하나하나를 보면 내가 다녀왔던 으리으리한 기와집들로 가득한 괴시리 전통마을, 선교장과는 많이 다르다. 오히려 지붕아래 집 구조는 우리나라 초가집에 가깝다. 그리고 지붕도 기와로 된 집들과 볏짚으로 된 집들이 서로 섞여 있어서 오히려 나 같은 서민에게 더 가깝게 다가오는 느낌이 든다. 사대부들의 서재와 누정이 남아 있는 기와집이 가득한 전통마을과 달리 이곳은 마을 앞에 논밭으로 가득해 마을 주민의 생활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을 이길 수 없었는지, 이곳에 살던 젊은 세대들은 도시로 다 이주하여 현재 스무 집 이상이 빈 집이라고 한다. 그래서 마을 주민들을 보면 노년층이 많다. 다행인 것은 전쟁의 참화를 피해 옛 모습을 간직한 마을에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왕곡마을의 전통가옥에 매력을 느껴서 민박에 머물고 가는 관광객들도 있다고 한다. 앞으로 주민들과 관광객들이 서로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을 만들 수 있을까?


한반도 남녘에 사실상 유일하게 남아있는 19세기 북방식 가옥마을을 보기 위해 고성 왕곡마을로 향했다.


송지호와 고성 왕곡마을


청간정을 뒤로 하고 다시 7번 국도를 따라가자. 차로 한 20분 정도 타면 왼쪽으로 호수가 보이는데, 고성군에 있는 석호 중 하나인 송지호다. 송지호에는 전설이 하나 있는데, 이곳은 1,500년 전 정거재라는 사람이 소유한 비옥한 땅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지나가던 고승이 정거재에게 시주를 청했는데, 시주걸망에 쇠똥을 담게한 후 고승을 밖으로 내쳤다고 한다. 이에 고승은 문간에 놓여있는 쇠절구를 금방아 쪽으로 집어 던졌는데, 그 곳에서 물이 솟아 정 부자의 집이 완전히 잠겼다. 물론 고승을 푸대접한 정거재 자신도 물귀신이 되었다는 무시무시한 전설이다.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옛 집 흔적이 호수 밑에 발견되어야 하는데, 전설은 전설일 뿐이다. 사실 오늘날 우리들은 석호가 경포호, 청초호, 영랑호처럼 바다의 만 입구에 모래가 쌓여서 바다로부터 분리된 민물호수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그래도 내가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더라도 다른 사람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교훈을 담은 전설을 송지호가 담고 있다. 송지호는 영랑호보다도 덜 개발된 곳이라 자연의 모습을 더 간직하고 있다. 철새가 올 때 전망대에 올라가면 장관이라고...


송지호 전경. 왼쪽 사진 정면으로 보이는 정자는 송호정이다.
호수 데크에 있는 벤치와 송지호 관망타워


송지호를 뒤로 하면 왼쪽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는데, 길을 계속 따라가다 보면 초가집으로 가득한 마을을 볼 수가 있다. 바로 북방식 가옥들로 이뤄진 고성왕곡마을이다. 북방식 가옥이 마을형태로 된 것은 남녘에서는 사실상 고성 왕곡마을이 유일하다고 한다. 왕곡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마을 대장군과 여장군이 나를 반겨 준다. 오늘날의 감각으로 새겨서 그런지 친근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다.


마을입구에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비석이 5개나 세워져 있다. 오른쪽에는 ‘양근함씨사세오효자지정려(楊根咸氏四世五孝子之旌閭)’라고 적혀있는데, 어린이를 가르치던 동몽교관(童蒙敎官) 함성욱이 부친이 위독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서 아버지가 7일 동안 더 생존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인흥과 인홍도 부친 함성욱이 위독하자 똑같이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서 하루 더 살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함성욱의 손자인 덕우가 병든 부친 인홍에게, 그리고 증손자 희용이 병든 부칙 덕우에게 자기 조상들이 한 것처럼 같이 하여 아버지를 며칠 간 더 연명하게 했다는 이야기다. 


4세대 동안 5명이 효행을 행했다는 것을 조선 조정에서 기념하고 세운 것이 바로 1820년 건립한 5인의 효자비다. 오늘날 내가 보는 효자비는 1984년에 다시 함씨 가문에서 다시 세운 것이다. 오늘날에는 아버지가 연세가 많아 병세가 위독하면 자녀가 병원을 보내드리는 것이 당연하지만, 옛날은 의술이 발전하지 않아 아버지의 임종을 보기 전 저렇게라도 하고 싶은 아들들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4세대 동안 이어진 5명의 효행으로 조선조정에서는 1820년 효자비를 건립했다.


효자각과 흰 기와집으로 이뤄진 민박집을 지나면 기왓집이 하나 보인다. 19세기말 양근 함씨 함배근과 향목리에서 시집 온 부인과 결혼한 후 지은 큰상나말집이다. 그런데 내가 봤던 괴시리 고택의 ㅁ자형태의 집과는 다르다. 오히려 삼척 도계에서 본 너와집의 형태와 비슷하게 지었다. 여기 큰상나말집도 강원도의 추위를 막기 위해 너와집처럼 북방식 ‘ㄱ’자형 양통집 가옥으로 지은 것이다. 마루가 밖으로 개방되고 사랑방, 안방과 부엌이 분리된 남방식 전통가옥과 달리 이곳도 도계의 옛 집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방, 부엌과 외양간이 모두 다 한 건물 안에 있다. 외양간이 안에 있는 이유는 추위와 맹수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일제강점기 이전에 우리나라 산에 호랑이가 가득했음을 다시금 명심하자.


큰상나말집을 지나 위쪽으로 초가집과 기왓집들이 가득하다. 역시 위쪽도 으리으리한 기와집으로 이뤄진 괴시리 마을과 경포호 일대 하얀색으로 가득한 양반 고택들과는 달리 오히려 우리 피부색처럼 된 초가집이라 더 정겹다. 지붕이 기와로 이뤄진 곳이 일부 있지만 대다수는 초가다. 어찌 보면 조선 후기 강원도 북부 서민들이 살았던 집과 삶을 잘 표현한 곳이 왕곡마을이 아닌가 싶다. 양반 고택에서 볼 수 있는 서재와 사당보다는 오히려 주변 논과 밭이 더 눈에 띄어 서민들의 일상을 잘 보여주는 마을이라고 해야 할까나. 


큰상나말집 전경. 너와집, 굴피집의 ㄱ자형태와 비슷하다.
 ㄱ자 꺾인 부분 내부에는 옛 외양간과 부엌이 있다. 역시 너와집, 굴피집과 비슷한 구조다.
윗마을 전경. 차가운 북서풍을 막기 위해 뒷산을 등진 구조다.


위로 가보니 눈에 띄는 가옥이 둘이 있는데, 큰백촌집과 작은백촌집이라고 한다. 백촌에 설던 김태선 씨가 이사하여 작은백촌집에 살면서 이렇게 불렸다고 한다. 그리고 큰백촌집에 산 김태근 씨와는 형제간이라고. 작은백촌집은 비교적 최근인 1945년에 지어졌다. 반면 큰백촌집은 역사가 무려 200년이나 되었다. 경주 김씨 집안의 며느리인 능선 구씨가 자녀들과 이곳에 초가집을 짓고 살았는데, 대를 이어 후손들이 살다가 70년대 중반에 도시로 이사했다고. 현재도 큰백촌집은 초가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역시 이 두 집도 외양간이 ‘ㄱ’자 꺾여진 곳에 있다.


그런데 왕곡마을 가옥구조를 보면 공통점이 하나 발견된다. 가옥 뒤쪽으로는 담을 높게 쌓았다. 그런데 가옥 앞쪽으로는 담장이 없는 특수한 구조인데, 북쪽으로 담을 쌓은 이유는 뒷 산자락과 함께 차가운 북서풍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또 다른 이유는 갑작스러운 비로 일어날 수 있는 산사태에 대비하기 위함이라고. 그리고 집 하나하나마다 장작이 상당히 많이 쌓여있는데, 온돌을 오늘날까지 쓰기 때문이다. 집집마다 굴뚝에는 항아리가 올려져 있는데, 연기를 오래 머물게 하여 난방의 효율을 높일 뿐만 아니라, 불티를 항아리에 가두어 화재도 예방할 수 있다고. 



큰백촌집, 초가지붕으로 이뤄져 있다(좌)


작은백촌집,  비교적 최근인 1945년에 지었다(우). 왼쪽 굴뚝 위에 항아리가 있는데 난방효율을 높일 뿐만 아니라 불티로 인한 화재도 예방할 수 있다.


왕곡마을 집 뒤로는 담장이 비교적 높다. 이유는 북서풍과 산사태 시 토사를 막기 위함이다. 반면 남쪽에는 담이 없다.


양근 함씨와 강릉 최씨의 집성촌


마을 중앙으로 내려와 왼쪽 길로 가면 다른 가옥보다 좀 더 눈에 띄는 집이 있다. 게다가 팔작지붕으로 된 흰 전통집이라 옛날에는 다른 집보다는 급이 높았다는 추측을 하게 된다. 바로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78호인 함정균 가옥이다. 급이 높은 집이긴 하지만 전체 집 구조는 다른 집과 비슷하게 ‘ㄱ’자 구조의 양통집로 이뤄졌다.  


집은 19세기 중엽에 지어졌지만, 집주인인 함정균은 이곳에서 21대째 살고 있다고 한다. 3대를 100년으로 계산한다면, 적어도 700년 전에 양근 함씨가 이곳에 내려와 살았다는 소리가 된다. 그렇다. 고려 말 공양왕의 최측근 중에 함부열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조선왕조 건국에 반대하여 간성 지역에 내려와 산 것이 왕곡마을 역사의 시작이다. 얼마나 새로운 정권이 싫었으면 이 산골로 내려왔을까?


함정균 가옥 본채(좌)와 사랑채(우)


함정균 가옥을 지나 오봉1리 마을회관을 건너 아래쪽 마을의 전통한옥들을 살펴보았다. 아랫마을도 역시 북방식 ㄱ자 양통집으로 이뤄져 있다. 그런데 윗마을과는 뭔가 다르다. 아랫마을을 대표하는 집들은 석문집, 한고개집이다. 석문집은 한국전쟁 후 강릉 최씨 문중의 최창현이 부인과 분가하여 지은 집이다. 한고개집은 19세기 말 강릉 최씨(최종명의 선조)가 강원도 이북 고산군 행현마을에서 살던 처녀와 결혼해 살던 집이라고. 즉 윗마을이 고려시대부터 이어진 양근 함씨와 200년 전 이주한 경주 김 씨의 마을이라면, 아랫마을은 100년 전 이주한 강릉 최 씨의 마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집을 보고 아래로 내려오면 정미소가 보인다. 뭐 정미소는 어디를 가나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 정미소는 1968년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20세기 중반 정미소 시설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당시 농촌문화와 정미역사를 잘 보여준다고. 게다가 기계가 보존이 잘 되어 정비만 한다면 가동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래서 군에서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받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석문집(좌)과 한고개집(우). 아랫마을은 주로 강릉 최씨 가문들의 터전이다.
왕곡마을 정미소. 20세기 중반 정미소 시설물이 그대로 남아있기에 군에서는 국가등록문화재 지정을 추진하고 있다.


그리고 정미소와 큰상나말집을 비롯한 왕곡마을의 전통 가옥들이 영화 <동주> 촬영지로 쓰였다. 그 이유가 북방식 가옥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서 북간도 자택의 무대로 활용할 수 있었다고. 실제 북간도 조선인 가옥형태도 고성의 것과 상당히 비슷하다고 한다. 그래서 왕곡마을에서 촬영한 씬이 영화의 20%를 차지한다고.     

<동주>를 연출한 이준익 감독과 문화재 전문가들이 인정한 고성 왕곡마을. 우리 남녘에는 흔치 않은 북방식 양통집 구조를 볼 수 있다. 북서풍을 막기 위한 높은 뒷담과 따뜻함을 맞이하기 위해 모든 것이 열려 있는 남쪽 마당. 삼척 도계의 너와집, 굴피집과 함께 강원도 산간 조상들의 지혜가 담겨 있는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왕곡마을 주민들은 이제 노년층이 대다수다. 문명의 이기를 이기지 못해서인지, 이들의 대다수 자손들은 도시로 이주해서 빈 집들이 많다. 그나마 마을에서 민박집으로 관광객들에게 체험 프로그램을 제공하면서 관광지로서 활력을 찾아가고 있다. 하지만 남아 있는 이들이 모두 세상을 떠날 때를 대비하여 이 마을을 어떻게 보존할지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빈 양통집을 잘 활용하여 민속체험공간으로 남길 수도 있고, 일부 집은 현대인들의 취향에 맞게 기본 틀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개수하는 방법도 있겠다. 더 나아가 왕곡마을의 가옥 구조가 현대건축의 발전에 기여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옛날 고성 서민들은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고 싶다면 왕곡마을을 꼼꼼히 둘러볼 것을 추천한다.


진부집. 경주 최씨 동복이 왕곡마을 함씨 집안에서 일하다가 진부에 살던 송월봉과 결혼하여 살던 집이다.
진부집을 나서며 바라본 왕곡마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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