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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우 Apr 23. 2021

궁촌의 공양왕과 초곡의 황영조

고려왕조의 몰락과 몬주익의 영광이 깃든 궁촌과 초곡

삼척 근덕면에서 유명한 관광지로는 삼척레일바이크가 있다. 바이크를 타고 궁촌해수욕장에서 용화해수욕장까지 약 5.4km 구간인데 동해바다와 아름다운 철길터널을 감상할 수 있다. 4인 바이크도 있어서 삼척에서 가족여행할 때도 안성맞춤이다.


레일바이크를 타고 궁촌과 중간 휴게소인 초곡을 무심코 지나갈 수 있지만, 궁촌에는 공양왕릉, 초곡에는 황영조 기념관이 있어 나같이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여기를 빼놓을 수 없다. 궁촌은 고려 마지막 왕 공양왕이 삼척으로 유배되어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에게 목에 졸려서 죽음을 당한 비극이 서려있는 곳이다. 마을 주민들은 안타깝게 죽은 그를 추모하기 위해 마을 이름에 궁궐(宮)이라는 이름을 남겨 오늘날까지 전달했다.


반면 초곡은 1992년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의 고향이다. 그래서 바르셀로나에서 황영조가 금메달을 획득한 후 1998년 고향 초곡에 황영조 기념공원과 기념관을 설립하였다. 엊그제 바르셀로나에서 황영조가 역주하는 장면을 본 것 같은데, 내년이면 바르셀로나를 재패한 지 무려 30주년이다. 세월이 참 빠르다.


두 역사를 마주하기 위해 나는 궁촌과 초곡으로 향했다.


공양왕의 비극이 깃든 궁촌


궁촌도 역시 7번 국도 상에 있다. 궁촌 나들목을 내려가면 삼거리를 먼저 마주하게 되는데, 왼쪽으로 가면 궁촌, 오른쪽으로 가면 초곡이다. 나는 공양왕릉을 가기 위해 왼쪽으로 먼저 향했다. 삼척 레일바이크 궁촌정거장에 있는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조금만 더 가면 높은 곳에 무덤 몇 기가 보이는데, 이곳이 바로 공양왕릉이다.


공양왕릉은 두 군데가 있다. 하나는 내 앞에 있는 강원도 기념물 제71호인 삼척 공양왕릉.  다른 하나는 경기 고양시 덕양구 식사동에 있는데 사적 제191호로 지정된 공양왕릉이다. 무슨 사연이 있어서 공양왕릉은 왜 두 곳에 있다고 할까? 어느 무덤에 진짜 공양왕이 묻혀 있는지는 오늘날에도 알 수 없다고 하지만, 마지막 고려왕의 생애가 너무 비극으로 점철되어서 삼척과 고양에 남은 것일까?


공양왕릉 올라가는 길

공양왕은 고려 신종의 7세손이자 정원부원군 왕균의 아들이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으로 군사권을 장악하자 우왕을 폐위하고 그의 아들인 창왕을 내세웠다. 하지만 이성계는 창왕도 신돈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폐위한다. 두 왕을 폐위했지만 이성계와 그를 위시한 신진사대부들은 정통성 확보를 위해 고려왕조가 이성계에게 평화롭게 왕위를 선양하는 것을 꿈꿨다. 그래서 이성계와 사돈 관계였던 공양왕을 1389년에 추대하였다. 공양왕은 이성계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야 했는데, 고려사 세가 권 제45에서 그의 심정을 잘 알 수 있다.


王憂懼, 方夜不眠, 謂左右曰, “余平生, 衣食使令皆足, 乃今負荷如此其重, 不知所爲.” 遂泣.


왕이 걱정하고 두려워하여 밤이 되면 잠을 자지 못하고 좌우 신하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평생에 입을 것, 먹을 것, 일할 사람들이 모두 풍족한데, 이제 이렇게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으니,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다.”라고 하며, 마침내 눈물을 흘렸다.


공양왕이 즉위하자마자 폐위되었던 우왕은 김저에게 이성계 암살을 부탁하는데 암살 음모가 들통이 난다. 결국 이성계는 우왕을 강릉으로 창왕은 강화로 내쫓아 폐하여 서인으로 삼았다. 다음 달에 윤회종이 암살을 시도한 우왕과 창왕을 죽일 것을 상소하는데 정작 암살 대상이었던 이성계는 당장 시행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공양왕은 “우가 사람을 많이 죽였다”는 이유로 거침없이 상소를 받아들인다. 혹자는 공양왕이 이때부터 이성계를 견제하려고 하지 않았냐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아무래도 고려 왕실의 후손이었기에 무기력하게 권력을 넘기고 싶지 않았는가 보다. 그는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온건사대부파를 이용하여 이성계를 견제하였다. 이는 1392년 음력 3월에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사고가 난 다음 달에는 이성계 핵심인사인 조준, 정도전, 남은 등을 먼 지방으로 유배 보낸다. 하지만 며칠도 안 되어, 이성계가 멀쩡하게 돌아오고 이방원이 조영규를 시켜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살해하자(이방원과 정몽주의 대립을 보여주는 하여가와 단심가의 배경이기도 하다), 공양왕 아니 고려의 운명이 다하기 시작했다.


결국 1392년 음력 7월 12일 공민왕 제4비였던 왕대비 안 씨에 의해 폐위된다. 배극렴이 왕대비에게 왕을 폐해달라고 상소를 올린 것을 왕대비가 수락한 것이다. 사실상 실권이 없는 왕대비가 이성계 일파의 협박으로 양위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로써 고려의 운명이 끝나고 조선왕조가 시작한다. 


폐위당한 후 그는 비(妃),세자와 빈(嬪)과 함께 원주로 추방당한다. 얼마 안 가서는 공양군으로 강등당하고 간성군(오늘날 고성군 간성읍)으로 유배되다가 1394년 음력 3월 14일에 삼척으로 안치하였다. 하지만 왕이 된 이성계는 정몽주와 함께 자신에게 저항한 공양왕을 용서해줄 생각은 없었다. 결국 공양왕 삼부자는 중추원부사 정남진(鄭南晋)에 의해 목에 졸려 살해당한다(여기에 더하여 이성계는 고려 왕족인 개성 왕 씨를 몰살시켰다.). 


이것이 삼척에 공양왕릉이 남아있는 이유다. 실권은 사돈인 이성계에게 넘어갔지만, 그래도 500년 가까운 고려 왕실을 어떻게든 지키려고 몸부림쳤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허사가 되고 말았다. 무덤을 자세히 봤다. 처음에 여기 오기 전에는 공양왕 삼부자니까 3기가 있겠지라고 생각했지만, 4기다. 분명히 한 기가 더 있다. 나머지 봉분 하나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데, 공양왕을 모시던 시녀 혹은 공양왕이 탔던 말의 무덤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쓸쓸하게 최후를 맞아서 그런지 보통 왕릉에서 볼 수 있는 문인상, 무인상 등이 전혀 없다. 말 그대로 일반 사람의 묘와 같다. 공양왕 삼부자 무덤은 헌종 3년 가을 삼척 부사 이규현이 고친 뒤, 1977년 삼척군수와 근덕면장의 노력으로 새로 단장되었다고 한다. 후세들은 공양왕이 이곳에 유배되었던 것을 기념하여 오늘날까지 이곳을 궁촌리라고 부르고 있다. 


궁촌 공양왕릉. 무덤은 4기가 있다.
육면체 돌들로 장식이 있는 무덤. 공양왕은 여기에 묻힌 것일까?
아무런 장식도 없이 봉분만 남은 무덤 3기


하지만 공양왕의 후손들은 이곳이 아닌 사적 제191호 고양 공양왕릉에서 10월 경 공양왕 고릉제를 지내고 있다. 그 이유는 공양양비 노(盧)씨의 고향이 경기도 고양이기 때문이다. 실제 태조실록 11월 10일 자에 태조 이성계가 “공양군의 비 노씨의 밭에서 조세를 수취하지 말라”는 지시가 있다. 이는 공양왕비 노씨가 남편이 교살을 당했어도 당시까지 생존해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래서 고양에 있는 왕릉은 부부가 합장된 쌍릉의 형태로 이뤄졌다. 또한 태종 16년에 공양군을 다시 공양왕으로 삼고 임금이 사신을 통해 제물과 제문을 보내 능 아래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중요한 기록이 있다. 조선 왕실이 공인한 무덤이라 무덤 사이에 석등과 석호, 양쪽으로 문신상과 무신상이 있다. 그래서 1970년 국가사적으로 지정되는데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 하지만 공양왕이 어디에 묻혔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1977년 삼척 공양왕릉을 정비하면서 기초발굴조사를 시도하려고 했으나 마을 노인들의 반대로 실패했다고.


오늘날에도 그가 죽은 음력 4월 17일에 매년 삼척 공양왕릉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물론 공양왕 후손들이 주관하는 제사가 아니라는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고려 마지막 왕이 최후를 맞이했던 무대라서 그렇다. 음력 4월 17일(2021년 기준 양력 5월 28일) 점심 전후로 궁촌에서 레일바이크를 탄다면, 공양왕릉에 가서 제례를 꼭 지켜보고 가자. 실권은 없었지만 마지막까지 고려의 등불을 지키려고 했던 왕을 추모하는 것은 어떨까?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의 고향 : 초곡


궁촌이 고려 말의 비극으로 점철되어 있다면, 그 아래 초곡은 대한민국 올림픽 역사의 영광이 자리한 곳이다. 바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황영조 선수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궁촌을 나서고 다시 왔던 길로 가자 그러면 금메달 광장휴게소가 보이는데, 해변도로를 따라가자. 커브길을 계속 가다 보면 황영조 기념공원으로 들어가는 길이 보인다.


황영조 기념공원으로 들어가기 전 철길을 볼 수 있는데 삼척레일바이크의 중간 지점이다. 철길 왼쪽으로 터널이 보이는데 올림픽 오륜 밑에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라고 써져 있다. 몬주익은 바르셀로나에 있는 광장을 말하는데 그곳에도 황영조를 기념한 부조가 있다. 공원오륜 옆에는 결승점에 들어오는 황영조의 사진이 있다. 


일명 황영조 터널. 삼척 레일바이크 구간 중 하나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우리나라 선수들은 금12, 은5, 동12를 획득했다. 이는 이전에 치러진 88서울올림픽 성적과도 버금가는 성적(금12, 은10, 동11)인데, 바르셀로나 올림픽으로 한국선수들의 활약이 홈그라운드의 이점이 아니었음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이 오늘날까지 올림픽 강국으로 유지한 계기가 되었다. 게다가 올림픽 첫 금메달을 사격 공기 소총 50m의 여갑순, 마지막 금메달을 마라톤의 황영조로 장식한 대회이기도 하다. 


공원으로 올라가면 오른쪽에 황영조 기념관이 있다. 황영조의 생애, 우리나라와 세계 마라톤의 역사가 담겨 있다고 한다. 아쉽지만 시간이 다 되어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나는 초등학교 시절 그의 역주를 TV로 똑똑히 본 기억이 있다. 황영조는 1970년 3월 22일 삼척시 궁촌에서 태어나 중학생 때까지 살았다. 우리나라에서 역사에 기록된 마라토너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어마어마한 폐활량인데, 제주도 출신 해녀인 어머니 이만자 여사의 영향이라고 해야 할까? 실제 동료 마라토너인 아틀랜타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이봉주 선수도 황영조의 폐활량을 부러워했다고 한다.


당시 황영조의 나이는 22살. 한국 선수 둘과 일본 선수 하나가 선두권을 유지하면서 뛰고 있던 장면이 내가 오늘날까지 기억하는 첫 씬이다. 한국 선수 둘은 황영조와 김완기, 일본 선수는 모리시타 고이치다. 30여 km를 지나서는 김완기 선수가 선두권에서 이탈한다. 이후는 황영조와 모리시타와의 한일 대결이었는데, 언덕 내리막길부터 황영조가 거리를 벌리고 선두로 치고 나오기 시작한다. 몬주익 경기장에 들어올 때는 두 손을 번쩍 들고 관중들에게 화답하고 결승선을 가장 먼저 끊었다. 기록은 2분 13초 23. 이렇게 하여 그는 올림픽 폐막식에서 마지막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부상으로 인해 결승점 통과 후 태극기를 들고 세리머니를 하지 못하여서 우리나라 언론에서 안타까워했던 일이 있다.


황영조만 기뻐한 게 아니었다. 마침 바르셀로나에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을 재패한 故 손기정 옹도 몬주익 경기장에 있었다. 재미있게도 이 날은 8월 9일이었는데, 56년 전 그가 금메달을 획득한 날과 같은 날짜였다. 손기정 옹이 뛰던 시절은 안타깝게도 일제강점기였다. 그래서인지 동메달리스트인 故 남승룡 옹과 시상대에 올랐을 때 두 손을 들고 기뻐하던 황영조와는 달리 고개를 푹 숙였다. 게다가 일장기를 시상식 때 수여한 묘목으로 가렸다고. 이후 동아일보에서 손기정 가슴에 있던 일장기를 삭제해 사진을 실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손기정 일장기 말소사건'이다. 56년 전 태극기를 달 수 없어 슬퍼했던 그를 황영조가 폐막식 때 태극기를 올리면서 위로해 준 것이다. 경기가 끝나고 황영조 선수가 손기정 옹과 함께 한 사진이 있는데 그야말로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압축하여 요약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박물관 건너편에는 결승선을 끊는 황영조의 동상이 있는 기념탑이 있다. 1998년에 세웠는데 당시 황영조는 이미 은퇴한 상태였다. 그의 마지막은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이었는데 20세기 초 우리를 핍박했던 일본 본토에서 한국 마라톤이 최고라는 것을 알려준 쾌거였다. 기념탑 앞에는 집 모양으로 된 나무 건물에 동그란 구멍이 있는데 정면을 보면 오륜기가 있는 집을 찾을 수 있다. 황영조가 살던 집이다. 집 주변으로 아름다운 초곡항이 보인다. 


1992년 바르셀로나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황영조를 기념한 탑.
황영조의 옛 집과 초곡항. 오륜기가 보이는 집이 어린 시절 황영조의 기억이 깃든 곳이다.


하지만 히로시마 금메달 이후 황영조는 돌연 은퇴를 선언한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30세도 안되어 은퇴하는 그를 보고 ‘자기 관리를 못했다’, ‘게으른 천재다’라고 맹비난했다. 21세기에 접어들어서는 음주운전과 사생활 문제로 자신의 명예를 실추시키기도 했고. 다만 일찍 은퇴한 것은 세월이 흘러서야 밝혀졌는데, 바로 족저근막염을 앓고 있었던 것. 이미 올림픽 때부터 앓고 있었다고 한다. 올림픽 직후 일본에서 수술을 받고,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이후로 다른 쪽 발바닥마저 수술했다고. 금메달이라는 화려한 무대 이면에는 부상투혼이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그는 후학 양성을 위해 힘쓰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황영조와 이봉주를 이을 마라톤 후계자가 나오지 않고 있다. 게다가 아프리카 선수들이 상당히 우세인 세계 마라톤 상황이라 쉽지가 않다. 그래도 손기정 옹 이후 무려 56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금자탑을 세운 황영조가 있기에 한국 마라톤이 다시 부흥하길 기대하며 공원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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