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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우 Apr 20. 2021

해신당 공원과 어촌민속 전시관

미역 따다 파도에 밀려 희생된 애랑이와 그의 원혼을 풀어준 어민들

강원도 삼척에는 19금 공원이 있다고 한다. 이름하여 삼척시 원덕읍 갈남2리 신남마을에 있는 해신당 공원. 대중들에게는 수많은 남근 조각상들로 유명해서 그렇단다. 하지만 우리 생각과는 다르게 청소년과 어린이도 입장이 가능하다. 다른 관광지와 마찬가지로 이들은 해신당공원 관람 시 할인받을 수 있다. 해신당공원은 건전한 성교육 현장인가? 아니면 남근과 관련된 삼척 신남마을의 사연을 들려주는 곳이라서 그런가?


나는 남근보다는 오히려 ‘해신당(海神堂)’이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해신당은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수호하는 신을 모신 곳이다. 옛날에는 일기예보, 인공위성, GPS가 없었다.  때문에 옛 삼척 신남마을 사람들은 바다를 수호하는 신이 어부들을 지켜준다고 믿었을 터.  마치 서양에서 성 안드레아를 어부의 성인으로 존경하는 것과 비슷하다. [성 안드레아는 예수의 제자가 되기 전에는 어부였다. 예수의 제자였던 형 베드로와 요한, 대(大)야고보 형제와 함께.]


신남마을 사람들이 해신당을 지은 이유는 무엇일까? 7번 국도를 따라 삼척 신남항으로 향했다.  


해신당과 남근조각공원


7번 국도를 타고 남삼척을 지나가면 신남마을로 가는 나들목이 나온다. 신남마을은 상당히 한적한 어촌마을이라 낚시를 좋아한다면 정말 추천하고 싶은 곳이다. 신남길을 타고 내려와 왼쪽 끝까지 가면 해신당공원 입구를 볼 수 있다. 입장료는 성인 1명 기준으로 3,000원이다. 3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그 외 동절기 11월 1일부터 2월 마지막 날까지는 오후 5시까지 이용할 수 있다. 참고로 매월 18일은 휴관이니 이를 잊지 말자.


공원으로 입장하면 큰 아름드리나무가 반겨준다. 무려 500년 전 해신당 전설과 함께한  향나무라고 한다. 향나무를 지나 오른쪽으로 가면 새끼줄이 하나 놓여 있고, 그 앞에 사당으로 보이는 건물이 있다. 바로 해신당이다. 새끼줄이 쳐진 이유는 사당을 세속과 구분한 다음 신성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렇다. 또한 아기를 낳을 때 새끼줄을 치는 것처럼 부정을 방지하는 이유도 있다.


해신당 영정에는 전통옷을 입은 한 여인을 모시고 있다. 이전에 영덕에서 신돌석 장군 사당에서 늠름한 영정을 바라볼 때와는 평범한 여인의 느낌이다. 여인 영정 좌우로는 수많은 남근들이 있다. 남근이라니? 신돌석 장군 기념관에서 본 장군의 초상과 한자로 가득한 위패를 유교식으로 엄숙하게 모신 것과는 너무나 대조된다. 신성한 공간에서 아예 성(性)을 대놓고 드러내고 있으니까. 


해신당 공원 입구에서 맞이하는 500년 향나무
해신당 앞 새끼줄. 새끼줄을 너머 영정이 모셔진 곳까지는 신성한 영역이다.
해신당 안 여인의 영정. 수많은 남근들이 봉헌되어 있다.


해신당을 뒤로하고 공원으로 향하면 아예 차원이 다른 크기의 수많은 남근상이 반겨준다. 21세기 작가들이 만든 작품인데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남근을 대포 포신(砲身)으로 표현한 작품이었다. 권오중 작가가 기획한 <시커먼스>라는 작품인데 남근 대포 앞에 기암괴석과 그 앞에 있는 연못으로 자연과 조화시켰다는 내용이다. 사람의 손이 많이 들어간 대포 바퀴, 사람 자체를 나타내는 남성 인체의 부위, 그리고 그 아래 자연을 표현한 기암괴석과 연못. 인공에서 시작해서 자연으로 끝나는 느낌이다.  


그 앞에 같은 작가가 기획한 남근이 또 하나 있는데, 작품명이 <힘>이다. 웅장한 이미지를 표현했다고. 두 작품을 바다가 보이는 방향으로 바라보니 남자의 힘이 바다가 보이는 자연과 함께해서 수많은 창조물을 만든다는 내용인가? 작가의 속마음을 알 수 없으니 내 마음대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작가의 작품을 뒤로하면 수많은 남근조각들을 볼 수 있다. 산신령의 형태를 갖춘 것도 있고, 나체로 표현한 비너스상과 비슷한 것도 있고, 장승처럼 생긴 것들도 있다. 워낙 다재다능한 21세기 작가들이 남근을 유쾌하게 표현하여서 19금 공원이라는 말이 무색해질 정도다(해신당 공원은 청소년과 어린이(!) 입장도 가능하다). 다른 나라에도 남근을 가지고 예술과 해학으로 승화시킨 공간이 있을까? 학교에서는 신중하게 다뤄야 하는 인간의 성(性)을 해학으로 잘 표현한 작가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왼쪽) 권오중 작가의 <시커먼스>. 남근을 대포 포신으로 표현했다. (오른쪽) 같은 작가의 <힘>
입구의 남근상들과 신남마을의 바다


남근공원을 지나 양쪽으로 하얀 돌에 새겨진 우스꽝스러운 남근상이 있는 계단으로 올라가자. 그러면 오른편에 검은색의 남근상들이 보이는데, 바로 여기에 해신당 전설이 자세히 새겨 있다. 해신당 공원에 전시된 전설은 다음과 같다.


① 마을에 장래를 약속한 처녀 해랑이와 총각 덕배가 살고 있었다.

② 어느 봄날 애랑이가 마을에서 떨어진 바위에서 미역을 따고 있었다.

③ 그런데 큰 파도가 덮쳤다. 덕배가 배를 띄워 구조하려고 했지만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서 불가능했다. 애랑이는 덕배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다가 파도에 쓸려 죽었다.

④ 애랑이가 죽은 바로 다음날부터 마을에 고기가 잡히지 않았다. 

⑤ 마을 사람들은 애랑이의 원혼이 깃들었다고 해서 정성스레 고사를 지냈지만 고기는 여전히 잡히지 않았다.

⑥ 어느 날 저녁 한 어부가 고기가 잡히지 않는다는 화풀이로 바다에서 소변을 봤다. 그다음 날 마을 어부들이 고기를 잡으러 갔는데, 유일하게 소변을 본 어부의 배만 고기로 가득 찼다.

⑦ 고기를 가득 잡은 어부에게 이유를 묻자 전날 저녁에 바다에 소변 본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러자 다음날 모든 어부들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바다에 오줌을 누었는데, 모든 어부들이 고기를 가득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⑧ 이후 마을에서는 산 끝자락에 처녀 애랑신을 모시고 남근을 깎아 제물로 바치기 시작했다. 혼인 못한 애랑이의 한을 풀어주는 제사는 오늘날에도 정월대보름과 음력 시월 오(午)일에 지낸다. 오(午)는 십이간지의 '말'을 상징하는데, 말의 남근이 가장 크기 때문이라고……(오늘날에도 이 풍습은 여전하다)


해신당 안에 있던 여인은 바로 애랑이었다. 하지만 역시 구전인지라 여러 가지로 변형되어 내려온다. 총각 덕배 대신 애랑이 아버지가 그 역할을 대신하기도 하고, 애랑이 스스로가 누구의 도움도 없이 미역을 따러 갔다고도 한다. 그리고 어부들의 소변 이야기 대신 어느 한 노인의 꿈에 애랑이가 나타나 제사를 지낼 때 청춘의 한을 풀 수 있도록 남근을 깎아 바쳐달라고 부탁했다는 변형도 있다. 


여러 가지 변형이 있지만, 미역 따다가 파도에 삼켜 안타깝게 죽은 애랑이의 원혼을 풀어주기 위해 남근을 바쳐오고 있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일부 사람들이 신남마을이 남근숭배 신앙으로 유명하다고 말하는데, 남근은 죽은 애랑이의 원혼을 풀어주기 위한 봉헌물이지 숭배 대상이 아니다. 십이지신상으로 이뤄진 남근상과 옛 성 풍속을 전시해놓은 초가집도 있는데 해신당 전설에서 부수적인 내용으로 봐야 한다. 


그럼 해신당 전설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공원 안에 있는 어촌민속전시관을 보면 답을 찾을 수 있다. 

우스꽝스러운 남근상
남근 공원에 전시된 다양한 모습의 남근상들과 그 아래 신남마을
십이지신 남근상
미역 따다가 파도에 희생된 애랑이 동상. 십이지신 남근상 아래에 있다.


어촌민속전시관과 삼척 어부들의 삶

     

공원에서 내려오는 길에 어촌민속전시관을 들렀다. 전시관에 들어가면 옛 어촌 풍경과 무당이 풍어제를 하는 모습이 전시되어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82-1호 동해안별신굿이다. 어민들의 풍어와 안전 그리고 마을의 평화를 기원하는 축제다. 오늘날에도 신남마을은 아까 말했던 것처럼 음력 10월 오(午)일에 해신제를 매년 거행하고 있다. 그러면 왜 우리 조상들은 별신굿을 했을까?


세계 최초로 프랑스는 1854년 11월 14일에 기상국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9년 후 세계 최초로 신문에 일기도를 싣기 시작했다. 최초의 인공위성은 1957년 10월 4일 구소련이 발사한 스푸트니크 1호다. 일기예보의 역사는 아무리 길게 잡아도 200년도 채 되지 않는다. 게다가 오늘날과 같은 인공위성을 이용한 일기예보 역사는 겨우 60년에 불과하다. 이것을 다 갖추어도 오늘날에도 어부는 매우 험난하고 고된 직종에 속한다.


국가무형문화재 제82-1호 동해안별신굿 모형


날씨 정보와 GPS 없이 고기를 잡으러 가는 건 오늘날에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될 행동이지만, 옛날에는 그런 지식조차 없었으니 그나마 하늘에 진심을 다해 제(祭)를 지내는 것이 위험을 줄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게다가 지식의 부재로 인해 바닷가에서 금기사항과 지켜야 할 사항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중 몇 가지만 들겠다.


① 아버지와 아들은 한 배에 타지 않는다.

② 쇠붙이를 조업 중 바다에 버리는 것은 배의 침몰과 연관되므로 금지된다.

③ 시체를 조업 또는 항해 중에 보게 되면 정중히 모셔야 후환이 없고 풍어가 든다.

④ 배의 건조 후 첫 출어 시 부부 행위를 금하며 머리와 손톱을 깎지 않는다.

⑤ 출어 중 집안에 아기를 낳게 되면 3∼7일간 집에 발을 들이지 않는다.

⑥ 출어 시 떠나는 남편이나 자식은 남는 가족에게 인사하지 않으며 가족 또한 아무 말 없이 떠나보낸다.


해신당 전설의 진실은 바로 여기에 있다. 바다를 나가는 어민들은 애랑이처럼 여러 가지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죽은 애랑이를 사당까지 지어 정중하게 모시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고. 이 외 오늘날에는 이해할 수 없는 금기사항이 많은데, 온갖 비극을 겪은 어촌이어서 그런지 규칙들이 더욱 복잡해진 것이다. 기상을 관측하는 과학기술과 어군탐지기가 발전했어도 어부들은 항상 안전에 유의해야 한다.


어촌의 각종 금기사항들


그런데 조선시대 조정에서는 삼척을 좀 특이한 곳으로 본 것 같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4권 삼척도호부에 이런 내용이 있다.


[風俗] 信巫鬼 人性多巧。


[풍속] 무당과 귀신을 믿는다. 사람의 성품이 대체로 교활하다.  


조선의 기득권층인 사대부들은 성리학을 법도로 삼았다. 그런데 삼척 사람들은 무당과 귀신을 믿으니 이들이 봤을 때는 계몽이 덜 된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사람의 성품이 교활하다는 내용도 어민들의 험난한 삶을 공감하지 못해 조정에만 있던 사대부들이 멋대로 기록했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선진국 사람이 개발도상국 사람들의 이해하기 어려운 풍속을 미개한 것으로 오해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다행히 오늘날 어부들의 생활양식이 많이 연구되어서 별신굿을 어촌의 중요한 문화로 보고 있다. 또한 어촌이 있는 지자체들이 주관하여 별신굿을 모두가 함께하는 성대한 축제로 이어나가며 전국의 관광객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미신을 믿지 않더라도 별신굿은 우상숭배가 아니라, 인공위성과 GPS를 몰랐던 조상들이 하늘에 만족을 주기 위한 최선의 행위였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동해안별신굿을 괜히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한 것이 아니다.


옛 삼척 어민들의 삶을 나타낸 디오라마
옛날과 오늘날의 어선들


어민들의 삶이 담긴 전시관을 지나면 세계 성풍속 박물관이 나온다. 남근공원의 연장선으로 6대륙의 성 민속을 비교해 놓았다. 박물관을 나서면 바다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는데, 애랑이를 애타게 찾는 덕배 동상을 볼 수 있다. 덕배 동상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해변을 바라봤는데 각기 다른 크기의 바위들이 조화롭게 잘 어울려서 그런지 매우 아름답다. 


해변에서 정면으로 보면 외롭게 떨어진 바위 하나를 볼 수 있는데, 바위에 뭔가 희미한 푯대가 보인다. 바로 애랑이가 미역을 따다가 희생된 곳인데, 주민들은 이곳을 애바위라고 부른다. 오늘 파도도 옛 망양정에서 정철이 노래 불렀던 것처럼 가뜩 고래가 성을 내는 듯하다. 해녀들이라도 날씨와 파도에 유의하지 않으면 자칫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미역 따기는 오늘날에도 손이 많이 가고 고된 일이다.


애랑이를 해신당까지 지으며 모신 이유도 다 이유가 있다. 으리으리한 서원과 충렬사와는 달리 해신당은 애랑이뿐만 아니라 기상 악화로 희생당한 이름 모를 어부들을 추모하는 곳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서인지 나같이 평범한 사람이 범접할 수 없는 유명한 위인을 모신 사당들과 신돌석 장군 기념관보다 더 친근하게 다가오는 느낌이 든다고 할까.  


또한 결혼하지 못한 애랑이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오늘날에도 남근을 신당에 봉헌한다. 결혼이 선택이 된 오늘날에는 이게 뭔가 싶겠지만, 옛 어민들의 입장에서는 불행하게 희생된 애랑이를 위로할 가장 최선의 방법이지 않았을까? 게다가 오늘날 작가들은 산 뒤편으로 거대한 남근을 깎아 올리고 있다. 오늘날 험한 바다에서 맛있는 생선과 해조류를 생산하는 어민들의 안전을 기원하면서 한 조각 한 조각 최선을 다해 깎는 것이 아닐까? 일기예보가 없었던 시절 희생된 어부들을 추모하고 오늘날 어민들의 안전을 기원하며 해신당 공원을 나섰다.

애랑이를 애타게 찾는 덕배의 동상
해신당 공원 앞 해변
해변가에서 찍은 애바위. 애랑이는 애바위에서 미역을 따다가 파도에 휩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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