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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우 Mar 30. 2021

신돌석 장군 유적지

장군이 영릉의진을 지휘하며 꿈꿨던 세상

영덕 남쪽에 위치한 남정면 장사리에는 6.25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이 있다. 반면 북쪽 영해면에 가까운 축산면 도곡리에는 이보다도 더 반세기 전에 있었던 의병들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 있는데, 바로 신돌석 장군 유적지다. 평민 의병장, 태백산 호랑이. 대한제국 시기 항일 의병활동에 인생을 바친 인물이다. 장사상륙작전의 학도병들처럼 그도 19세 앳된 나이에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했다.


신돌석의 의병활약으로 인해 그와 관련 된 야사가 수없이 많다. 하지만 그의 실제 생애는 어떠했을까? 7번 국도를 타고 신돌석 장군 유적지로 향했다.


신돌석 장군 유적지

     

속초 방면으로 7번 국도를 타면 918번 지방도로 나가는 길이 보인다. 안내표지판에 신돌석 장군 유적지로 가는 방향이 자세히 나와 있는데 이를 그대로 따라 가면 된다. 신돌석장군 기념관과 유적지는 국가보훈처와 영덕군에서 장군의 애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1999년에 세웠다. 그가 순직한지 무려 91년 만이다. 유적지 입구에 들어서면 한자로 써진 큰 돌이 보이는데, 이렇게 써져 있다. 비석에는 세로로 4자씩 7줄로 이뤄졌으나, 아래에 7언시 양식에 맞춰 쓴다.  


登樓遊子却行路      

可歎檀墟落木橫      

男兒二七成何事      

暫倚秋風感慨生      


누각에 오른 나그네 갈 길을 잊은채

단군의 옛 터가 쇠퇴함을 한탄하네

스물 일곱 사내가 이룬 일이 무엇인가 

가을 바람 불어오니 감개만 솟는구나


1904년 울진 평해 월송정에서 나라가 기울어가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지은 신돌석 장군의 한시다. 2008년 장군의 순국 100주년을 기념하여 세웠다고 한다. 1904년 몇 월에 이 시를 읊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이 때는 일본의 주권침탈이 더욱 노골화되는 시기였다. 2월에는 러일전쟁이 터졌다. 전쟁의 승리를 위해 일본은 대한제국과 공수동맹을 체결하는데 바로 한일의정서다. 의정서 제4조에 대한제국의 안전을 위하여 일본이 군략상 필요한 거점을 정황에 따라 차지하여 이용할 수 있다고 되어 있는데 사실상 일본이 우리나라 영토를 마음대로 쓰겠다는 내용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8월에는 제1차 한일협약이 체결되는데, 일본인 1명을 재정고문으로 외국인 1명을 외교고문으로 삼는다는 내용이 있다. 즉 대한제국 외교권과 경제권에 일본이 마음대로 개입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가 바로 메가타의 화폐개혁이다. 조선인의 백동화를 화폐 질에 따라 불평등하게 교환하여 조선의 상업자본이 몰락하고, 일본 제일은행 엔화가 공식화폐가 되어 일본이 조선경제를 집어삼킨 원인이 되었다. 자신의 조국이 일본에게 저항도 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빼앗긴 채 무너져 가는 모습을 보며 통탄하는 마음으로 지은 시가 아닐까? 통탄하는 마음을 뒤로 하고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의병활동을 하여 조국을 살리려고 했다. 


신돌석 장군의 한시 비석


장군의 영정을 모신 충의사


시가 쓰인 비석을 지나 왼쪽 계단으로 올라가면 전통건물들이 보이는데, 첫 번째 문 양쪽으로 동재와 서재가 있다. 그리고 두 번째 문을 지나면 ‘충의사(忠義祠)’라는 현판이 써진 건물이 보인다. 건물 안에 들어가면 중앙으로 우리 근현대사 교과서에서 익숙하게 볼 수 있는 장군의 영정이 있다. 영정은 신돌석 친척 중에 그를 많이 닮았다는 인물을 모델로 그렸다고 한다. 흰 옷과 호랑이 가죽으로 만든 옷은 대한제국 병사들의 화려한 군복과는 매우 대조된다. 정규군과 비교하여 빈약한 무장으로 일본의 식민지 야욕에 저항하고 싸웠던 그와 영덕 일대 민중들의 일생을 압축하여 담은 영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장군 영정의 오른쪽 편에는 위패를 여럿 모셔놓았는데, ‘영릉의병진 창의장명록(寧陵義兵陣 倡義將名錄)’이라고 적혀 있다. 아무래도 영덕 지역에서 의병으로 참여한 이들을 추모한 게 아닐까? 영덕군에서는 매년 6월 13일 신돌석 장군숭모위원회 주관으로 장군과 위패에 새겨진 의병들을 위한 숭모제향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 때 영덕을 방문할 일이 있으면 잊지 말고 찾아가자.


신돌석 장군의 영정. 장군의 친척에서 가장 닮은 사람을 모델로 그렸다고 한다


영릉의병진 창의장명록. 장군 휘하에는 평민 뿐만 아니라 선비와 유생들도 포함되어 있다. 


태백산 호랑이와 영릉의진


충의사를 나오면 순국의사 신돌석장군 기념비와 의병대장신공유허비가 있는데, 영덕군 각지에 신돌석장군을 추모한 비들을 성역으로 된 이곳으로 이전한 것이다. 기념비와 유허비를 지나 계단으로 내려가면 또 다른 전통건물 하나가 보이는데 바로 신돌석 장군의 일생을 볼 수 있는 기념관이다. 


신돌석 장군의 원래 이름은 태호(泰浩), 자는 순경(舜卿)이다.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 장군의 후손이지만, 조선시대 때 그의 조상은 대대로 향리가문이었다. 우리가 신돌석 장군을 평민출신 의병장이라고 배우는데, 엄밀히 말하면 그는 양반 다음 가는 계급인 중인 출신이다. 평민은 자를 가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세가 기울긴 했지만 향리가문이었기에 서당에서 글을 익힌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것이 그가 의병을 이끄는데 중요한 자산이 되지 않았을까?


그가 처음 의병에 몸을 담게 된 건 1895년 일본 자격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인 을미사변이 일어났을 때였다. 게다가 김홍집 내각에 의해 강제로 시행된 단발령에 전국에서 반발이 심했는데, 이 두 가지 사건이 맞물려서 전국에서 일어났던 의병이 바로 을미의병이다. 신돌석도 19세라는 어린 나이에 영해의진에 참여하는데, 영해의진은 7월 남한산성에서 활약을 한 김하락의진 그리고 안동의진과 합세하여 일본군과 7월에 이틀간 전투를 벌였다. 첫날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으나 다음날 남천쑤전투에서 패했다고. 쓰라린 패배를 당했지만 영해의진은 9월까지 항전하다 고종이 단발령을 취소하고 의병해산권고 조치를 내리면서 훗날을 기약하게 된다. 해산 후에 전국의 인물들을 만나 구국방안을 논의하는데, 그 중에는 대한광복회를 조직한 박창진과 훗날 의병장이 되는 이강년, 민긍호도 있었다. 짧은 기간의 의병활동이었지만 을미의병 활동이 이후 신돌석을 태백산의 호랑이로 만든 기초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가 1905년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기를 잡고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다. 이젠 일제가 노골적으로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하는데, 이에 맞서 전국적으로 의병이 다시금 일어난다. 바로 을사의병이다. 신돌석은 아우 신우경과 300여 명의 농민으로 의병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바로 충의사에서 본 영릉의진이다. 영릉의진에는 신돌석보다 신분이 높은 유생들과 양반들도 참여했다. 몇몇 사람들은 양반보다 한 단계 낮은 신돌석과 높은 양반들과 갈등이 있었다는 야사를 언급하는데, 오히려 계급과 관계없이 모두 일사불란했다고 한다. 영릉의진의 목표는 일본이 동해안에 만든 교두보를 파괴시키는 것이었는데, 삼척과 울진의 관아 일본인 이주지와 관련 기관을 습격하였다. 기념관 위쪽 중앙에는 울진 우편취급소 공격을 재현한 미니어처가 있다. 우편취급소를 습격한 이유는 울진에 전초기지를 건설하려는 일본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일제의 의병탄압(왼쪽), 의병과 일제가 사용한 무기들(오른쪽)
울진 우편취급소 공격 미니어처


의병들의 활발한 저항활동으로 일제 통감부가 대규모 토벌대를 파견했는데, 장군은 완전히 무장한 외국 정규군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항전하였다. 일제는 기관총을 3개나 갖춘 중대병력으로 신돌석 토벌대까지 꾸렸는데, 장군은 태백산맥을 요새삼아 토벌군을 기습하는 작전으로 맞서 싸워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이러한 영릉의진의 활약 때문에 장군은 1907년 서울 진공작전을 추진한 13도 창의군 경상도 대표인 교남 창의대장에 추대된다. 당시 의병대장들이 대부분 양반출신이어서 13도 창의군 의병장들이 신돌석의 실력을 높게 평가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신돌석은 경북 산악지역에 근거지를 뒀기에 경기도와 서울로 진출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후 일본군들의 끈질긴 추격과 귀순한 의병의 죄를 묻지 않는다는 ‘귀순법’이 발표되면서 전국의 의병이 크게 위축된다. 신돌석의 영릉의진에서 투항한 병사도 무려 53명이었다. 그래서 남은 의병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의진을 해산하게 된다. 국내에서의 의병활동이 어려워지자 장군은 만주에서 투쟁을 할 것을 각오했는데, 안타깝게도 옛 부하였던 김상렬 형제 집에 머물렀다가 1908년 살해당한다. (왜 장군을 살해했는지는 자료에 따라 차이를 보이는데, 어떤 자료는 형제들이 일제가 내건 현상금에 유혹당해서 어떤 자료는 형제들에게 의병에 다시 합류할 것을 권하다가 이에 대한 다툼이 벌어져서 그렇다고 한다. 게다가 일본 측 사료에서는 장군을 살해한 용의자 이름이 일치하지 않아 오늘날까지도 장군의 죽음은 미궁에 빠져 있다.) 게다가 태백산에서 신출귀몰했던 30살 의병장의 최후가 너무나 허망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의 구국운동은 후세에도 높게 평가하여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이후 그를 국립현충원에 다시 안장하였다. 만주로 망명했으면 김좌진 장군과 청산리에서 크게 활약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더 나아가 장년의 나이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기여하고 노령의 몸으로 광복 후 정부 수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을 수도 있어서 너무나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신돌석 의진 참모장 박수찬의 아들 박덕술이 부친에게 들은 이야기를 기억하고 남긴 의병대장신공유사(義兵隊將申公遺事)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훈장 왼쪽으로 장군을 폭도주범으로 조사한 일제의 보고문들과 매우 대비된다. 참고로 경상북도 관찰사 박중양은 친일반민족행위자다. 


신돌석 장군의 인생은 대한제국의 의병들을 그려낸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태백산편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미스터 션샤인 방영 이후로 우리나라 시청자들이 대한제국 의병 역사에 더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이 관심을 바탕으로 하여 영남 의병장 신돌석 장군의 생애도 더 깊게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기념관 남서쪽에 신돌석 장군의 생가가 있다고 하여서 여기 온 김에 그의 고향도 보러 갔다. 생가가 있는 곳은 바로 도곡2리. 도곡2리 마을회관 정면으로 초가집이 두 채가 있는데. 왼쪽에 있는 한 채는 보수공사 중이다. 2021년 2월 10일에 공사가 완료된다고 하는데, 복원에 신중을 기해서 그런가, 언제 끝날지 종잡을 수 없다. 원래 초가집은 장군의 부친인 신석주가 1850년에 세웠으나, 1940년 일본 관원들이 우리나라 독립의지를 꺾기 위해 불태웠다고. 이후 1942년 기와집으로 다시 지었다가 1995년에 현재 초가집으로 복원한 것이다. 오른쪽 생가에는 등록문화재 제394호인 ‘불원복 태극기’사진이 눈에 띄었다.


신돌석 장군 생가지 왼쪽 초가집. 내가 갔을 때 보수공사 중이었다.
생가 오른쪽 초가집. 중앙에 불원복 태극기 사진이 눈에 띈다


생가 반대편 도곡2리 마을은 태양열 전지로 가득한 주택들이 있다. 아무래도 환경 친화마을로 군에서 추진하는가 보다. 더 놀라운 것은 도곡2리가 2019년부터 치매보듬마을로 지정받았다는 것이다. 장군이 본인의 고향이 약자들을 배려하는 마을이 되었다는 사실에 하늘에서 기뻐하지 않았을까? 장군의 고향에서는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교통사고와 보이스 피싱 예방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며, 가족이 홀로 치매환자를 돌보는 것이 아닌 지역사회 전체가 도와주는 방향으로 마을을 만들어 간다고. 실제로 주민들이 교육을 받고 치매환자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에서 벗어나고 어떻게 도와야 할지 알게 되었다고 한다. 


오늘날 장군의 고향이 치매보듬마을이 된 것처럼, 신돌석 장군이 치열하게 의병활동을 한 이유가 총칼의 억압을 없애고 강자와 약자 상관 없이 누구나 근심치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닐까? 아니 어쩌면 그의 구국정신이 있었기에 어떻게 우리가 이러한 세상을 만드는 게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단군의 옛 터가 쇠퇴하여 평생 의병투쟁에 몸담을 수밖에 없었던 운명. 30세 청년의 나이에도 의병장이라는 짐을 장군은 묵묵히 담당했었다. 이제 우리가 나라의 평화와 즐거움을 유지하며 그가 졌던 운명의 짐을 덜어내야 한다.


2019년 장군의 고향인 영덕군 축산면 도곡2리는 치매보듬마을로 지정되었다.  이것이 신돌석 장군이 꿈꿨던 세상이 아닐까?


장군의 고향 도곡2리 마을. 옛 일제의 총칼의 위협은 사라진지 오래다. 오늘날은 마을 전체가 치매환자들을 보듬어 주는 곳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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