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시리라고 이름 지은 목은 이색과 영양 남 씨 집성촌 이야기
필리핀 이푸가오에서 봉사단원으로 있을 때 내게 타갈로그어를 가르쳤던 선생님이 계셨다. 매주 수업을 잘 받다가 연말에 중요한 행사가 있어서 이번 주 수업을 미뤄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이유를 들어보니 문중행사의 사회를 맡았다고. 우리나라에서는 도시화로 사라져 가고 있는 풍습을 필리핀 시골에서는 대대적으로 거행하고 있었다. 나는 인생 내내 도시에서 살았기 때문에 같은 가문이 몇 백 명씩 모이는 걸 외국에서 처음 봤다. 교과서에서 봤던 문중행사, 문중회의가 우리나라만의 고유 전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시골에서는 문중회의가 매우 흔했다고 한다. 이는 경상북도에 같은 본과 성씨가 모인 마을이 다른 곳보다 많이 남아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영덕군 영해면도 그중 하나인데 괴시리, 인량리, 원구리 등에 있는 전통가옥 집성촌들이 증거가 된다. 오늘날 핵가족 사회로 바뀌고 건축물이 서구식으로 변하면서 전통가옥 집성촌과 문중회의를 보기가 힘들어졌다. 그래서인지 영덕군에 남아있는 기와집 집성촌들은 관광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영덕 집성촌의 역사는 어떠했는지 알기 위해 나는 괴시리 전통마을로 향했다.
왜 괴시리가 되었을까?
7번 도로를 타고 울진으로 넘어가기 전 918번 지방도와 만나는 분기점이 있다. 바로 영해면으로 들어가는 나들목이다. 나들목에서 왼쪽으로 가면 인량리와 원구리, 오른쪽으로 가면 괴시리로 향한다. 안내판을 따라 가면 영해중고등학교가 보이는데, 그 건너편에 옛 기와집들이 가득한 마을을 볼 수가 있다. 바로 괴시리 전통한옥마을이다.
이 마을이 왜 괴시리가 되었을까? 바로 괴시리 뒷산에 있는 목은 이색 기념관에서 찾을 수 있다. 목은 이색. 내가 이전에 동해안 대게를 그리워한 인간미 넘치는 시를 소개한 적이 있는데, 오늘 좀 더 그를 알고자 한다. 이색은 고려 말 유명한 성리학자인데 정몽주, 정도전, 권근, 길재 등의 인물들이 그의 제자였다. 즉 여말선초 정치권에서 활약한 신진사대부들의 스승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젊었을 때 학문에 워낙 뛰어나서 그런지 고려 진사시에 합격하고 원나라로 가 국자감에서 성리학을 연구한 다음 뛰어난 성적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원 벼슬까지 했다. 오늘날로 보면 뛰어난 내신과 수능 시험성적으로 서울대 들어갈 자격이 있었던 학생이 미국 하버드대에 수석으로 입학하여 차석으로 졸업한 다음 미국 고위 공무원직을 잠시 역임한 것과 비슷하다.
유학을 다녀온 후 고국으로 귀국할 때 어머니의 고향이자 자신의 생가인 영해 호지촌(濠池村)을 들렀는데, 호지촌이 원나라 한림학사 구양현의 고향인 괴시(槐市)와 매우 비슷하여, 목은이 고쳐 부르도록 한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동해에 접해 있는 산 바위 아래에서 물고기가 뛰노는 것을 보고 그 산을 상대라고 하고 '산 아래서 물고기를 봤다'는 관어대부라는 유명한 글을 남겼다고 한다. 그 흔적은 대진해수욕장 뒤쪽에 상대산이라는 지명과 복원된 관어대로 남아있다. 목은 선생의 고향을 향한 애정이 오늘날까지 남았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지명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선생이 성리학자라 상당히 보수적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하지만 전시관에서 그의 일생을 보니 그렇지 않았다.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까지 성리학은 고려시대 후기에 무신정권의 부패와 몽골의 간섭으로 누적되었던 폐단을 개혁하고자 한 학문 수단이었다. 이는 그가 공민왕 때 토지개혁, 국방계획, 교육 진행, 불교 억제와 같은 건의문을 여러 번 올린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또한 우왕 때는 오늘날 대학 총장에 대응하는 성균관 대사성으로 있었는데, 학제를 정비하고 학칙을 새로 제정했다. 그리고 정몽주와 다른 신진사대부와 함께 성리학 보급에 힘썼다고. 이때 정비한 학제와 학칙은 조선시대까지 오랫동안 이어진다.
하지만 그는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당대에는 관리로서의 자질은 떨어졌다고 평가했는데, 이미 세월이 지난 세종실록에서도 이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볼 때 정치감각은 뛰어나지 않았던 것 같다. 다만 교육가로서의 업적은 그가 만든 성균관 학제를 오랫동안 이어왔기에 당대에도 높게 평가했다. 오늘날 역사학자들도 성리학 보급과 교육가로의 업적을 중시하는 편. 그래서 영덕군에서는 2003년부터 2년 주기로 10월에 목은문화제를 열고 있다. 하지만 2018년 제9회 목은문화제는 태풍 콩레이로 피해를 심하게 입어서, 작년에는 코로나19로 인해 행사를 진행할 수 없었다(목은문화제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2010년 제5회부터 짝수해에 진행하고 있다.). 목은 선생을 기리는 축제를 올해나 2022년 10월에 다시 시작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목은 선생 기념관을 나서고 옛 기와집이 가득한 마을로 다시 돌아갔다.
영양 남 씨 이야기
목은 선생 기념관에서 내려와 마을 언덕 위로 가면 그야말로 장관이다. 마을 구조가 상당히 특이하게 생겼는데, 먼저 목은 선생 기념관으로 올라가는 길에 한옥들이 길을 따라 들어서 있는데 중마골이라고 한다. 그리고 중마골에서 들판을 향해 바라보면 좌측 윗말과 우측 아랫말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원래 이 마을은 1260년 고려 고종 때 합창 김 씨가 처음 잡은 뒤, 수안 김 씨, 영해 신 씨 일족이 선주민들과의 혼인으로 정착하다가 1630년 무렵 오늘날 창수면 인량리에 정착한 영양 남 씨의 일파가 괴시리에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룬다.
윗말로 내려가서 경주댁과 물소와고택을 거쳐 산 쪽을 바라보면 다른 고택보다 규모가 큰 건물을 볼 수 있다. 바로 영양 남 씨 괴시파 종택이다. 영양 남 씨가 괴시리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680년인데, 바로 남두원이 처음 정착한 곳이다. 괴시파 종택을 건립한 이는 바로 그의 첫째 아들인 남붕익. 괴시파에서 최초로 문과에 급제하여 영산 현감과 예조좌랑을 지낸 후 고향으로 내려와 산 것이다. 종택은 ㅁ자 형의 구조로 되어 있으며, 정면 8칸, 측면 5칸 반으로 사랑채에 대청이 돌출된 특이한 구조다. 가장 핵심이 되는 종갓집이라 이후 분가한 후손들은 이 집보다 화려하기 짓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 보니 다른 저택들보다 훨씬 더 화려하게 보인다.
남두원의 둘째 아들 남붕한은 선주민인 수안 김 씨와 혼인하고 분가했는데, 분가한 곳은 오늘날 대남댁 자리다. 대남댁이 바로 아랫말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남아있는 대남댁 건물은 손자인 남붕한의 손자 남준형 공이 설립했는데 사실 남준형은 남붕한의 친손자가 아니다. 왜 그럴까? 원래 남준형의 아버지 남명흠은 남붕익의 아들이다. 즉 남붕한이 아들이 없어 형 남붕익이 동생 집에 둘째 아들을 입적시켜 가문을 이은 것이다. 이를 통해 조선 후기 양반 가문들은 장자상속제를 받아들였고, 만약 아들이 없다면 조카를 입적시켜 가문을 이은 풍습을 강화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남댁 오른쪽에는 남준형의 둘째 아들 남극만이 분가한 해촌고택이 있고, 왼쪽에는 그의 증손 남공수가 세운 영은고택이 있다. 이를 볼 때 장자가 종갓집을 상속하고 다른 아들들이 가까운 곳으로 집터를 잡아 분가하면서 마을이 확장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준형 공은 괴시마을 주차장에서 바로 볼 수 있는 괴정을 창건했는데, 자신의 생조부(生祖父) 남붕익과 달리 여기서 오직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썼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농사일에도 매우 힘쓴 것 같은데 그의 시인 '삼(麻)을 심으면서'에 잘 드러나 있다. 농사와 가르침을 꾸준히 하며 검소하게 살았기에 당대 마을 주민들도 존경을 표했다고 한다. 그의 뜻이 이어져서 그런지 한국전쟁 전후에도 야학의 공간으로 활용되었다고. 괴정 앞에는 남준형 공이 늙음을 읊은 시와 목은 선생이 외가가 있는 영해를 그리워 한 시가 있다. 이 두 시를 보니 목은 이색의 꼿꼿한 성리학 정신이 남준형 공에게 이어지지 않았나 생각을 해 본다.
남준형 공의 검소한 삶을 본받아서인가, 그의 후손들도 일제강점기 때 1919년 3·18 영해만세운동에 참여하여 가문에 이름을 남겼다. 괴시파에서 이름을 올린 이들은 남계병(초명:남세혁), 남진두, 남효직, 남응하. 3·1 운동이 전국으로 퍼지자 병곡면, 축산면, 창수면 일대의 기독교도들과 지방유지를 포섭하고, 성내시장에서 2,000여 명의 시위군중 앞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쳤다고. 영해 경찰관 주재소에서 경찰을 급파하여 강제 해산시키려고 했는데, 이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일제 경찰들에게 독립만세를 외치도록 강요했다고 했다. 그야말로 모범 양반가문의 대단한 패기가 아닐 수 없다.
이 기세로 이들은 군중들과 조선인들을 억압하던 경찰관주재소, 면사무소, 우편소, 영해공립보통학교, 영해공립심상소학교 등을 습격하였다. 하지만 대구 포병 80연대와 포항헌병분대에서 출동한 군인과 헌병이 무력을 사용하여 이들을 해산시켜서 독립의 꿈을 안타깝게도 이룰 수 없었다. 만세운동으로 인해 네 분 모두 옥고를 치뤘는데, 남응하 공은 옥고의 후유증으로 1933년에 별세하시고, 남진두 공은 가혹한 고문으로 1919년 5월 10일 유치장에서 옥사했다고 한다. 괴시파뿐만 아니라 영해면 원구리, 창수면 인량리, 축산면 칠성리에 살던 남 씨들도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울진, 청송, 안동에서도 먼 친척들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고 하니. 영양 남 씨는 그야말로 올바른 전통이 깃든 양반 집안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뇌물, 갑질, 마약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재벌 집안들과는 달리 매우 비교되는 행보다.
한국전쟁 때에는 학도의용군들의 장사상륙작전, 구한말에는 신돌석 장군의 영릉의 진이 있다면, 일제강점기 때에는 영양 남 씨가 일가가 참여한 3·18 영해만세운동이 있다. 즉 괴시리의 영양 남 씨 가문은 이색의 꼿꼿한 성리학 정신과 신돌석 장군의 호국정신을 계승하고, 장사 학도의용군에게 이를 이어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영덕은 기개 있는 선비들의 고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석양 아래로 전통마을을 보니 매우 아름답다. 우리나라 전통 한옥의 건축미라고 할까. 아니 괴시파들의 호국정신이 기왓장에 깃들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오늘날 바쁜 도시인들은 자기 부모와 자식들을 챙기기 바빠서 먼 친척을 바라보는 게 어려운 현실이다. 집성촌도 이촌향도로 인해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 게다가 이제는 핵가족도 붕괴되어 1인 가구가 대폭 증가했다는 뉴스도 들리지만 이미 삶의 양식이 바뀌어서 옛날처럼 되돌릴 수는 없다. 다만 가족의 개념이 바뀐다고 해서 목은 이색의 꼿꼿한 성리학 철학 정신, 영양 남 씨 괴시파가 남긴 전통가옥들과 역사의 발자취는 절대 잊어서는 안 될 일이다. 올바른 전통을 유지하며 나라에 어려움이 닥치면 이웃과 함께 연대해야 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