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팔경(關東八景). 통천의 총석정, 고성의 삼일포, 간성의 청간정, 양양의 낙산사, 강릉의 경포대, 삼척의 죽서루, 울진의 망양정, 평해의 월송정을 말한다. 정철의 <관동별곡>을 통해 국어시간에 수도 없이 들었을 거다.
관광지들이 다양해진 오늘날에는 관동팔경이 한물간 관광지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 선비들에게는 인생을 살면서 꼭 가야하는 강원 영동지방 필수 관광 패키지였다. 조선시대 선비들과 비교해서 나는 양양 낙산사와 강릉의 경포대만 가봤기에, 동해안 여행을 하는 김에 내 고향 부산에서 가장 가까운 곳인 평해 월송정부터 간성 청간정까지 다 가보기로 했다. 아쉽게도 통천의 총석정과 고성의 삼일포는 북한에 있기에 통일이 되거나 남북관계가 상당히 개선되어야 관광이 가능하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왜 월송정에 가보려고 했을까? 이들을 이해하기 위해 나는 경북 울진 평해면으로 향했다.
월송정과 이곡의 시
월송정도 동해안에 있으니까 7번 국도 상에 있다. 후포와 평해 나들목을 지나면 고성방향 기준으로 오른쪽에 월송리로 나가는 길이 나온다. 나가서 월송사거리에서 9시 방향 월송정로로 따라 가자. 그러면 한국원자력 마이스터고등학교를 지나는데, 학교를 지나자마자 바로 우측으로 꺾으면 월송정으로 바로 갈 수 있다. 관동팔경월송정이라고 쓴 일주문이 나를 환영해 준다.
관동팔경으로 들어가기 전 왼쪽에 어떤 건물이 보이는데, 바로 평해 황(黃)씨 시조제단원이다. 시조인 황락이 이곳에 상륙하여 터를 잡은 곳을 기념한 성역 시설이라고 한다. 황락은 중국 후한 사람인데 유리이사금 5년(서기 28년) 베트남으로 사신으로 가던 길에 풍랑을 만나 떠돌아다니다가 평해 월송리 굴미봉 아래 월송봉에 상륙하여 신라에 귀화했다고 한다. 신라 초기의 기록이라 엄밀한 검증이 필요하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황씨 후손들은 전한 시대 중국인의 유전자 특성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평해 황씨 시조제단원을 지나면 드디어 월송정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온다. 원래 월송정은 여기서 남서쪽으로 450m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말기에 미군폭격기의 목표가 된다는 이유로 일본해군이 함부로 헐어버렸다고 한다. 그러다 해방 후 1969년 재일교포가 철근콘크리트로 지었는데 옛 모습과 같지 않아 다시 헐고 1980년에 내가 선 장소에 다시 복원했다. 근데 뭔가 이상하다. 조상들이 말한 작은 정자가 아닌 화려한 누각이라서 그렇다. 오늘날 월송정의 크기는 정면 5칸 측면 3칸이다. 하지만 단원 김홍도와 겸재 정선이 그린 월송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조상들의 남긴 기록을 뒤로 한 채 멋대로 복원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오늘날의 월송정. 작은 정자 대신 큰 누각이 서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 크기다. 월송정 현판은 복원할 때 최규하 대통령이 친필로 새겼다.
김홍도 금강사군첩의 <월송정>, 정면 3칸 측면 2칸 크기로 오늘날 것보다 작다. ⓒ 한국데이터진흥원
겸재 정선의 <월송정>. 김홍도가 그린 것과 크기가 같다. ⓒ 간송미술문화재단
그리고 월송정 주변은 내가 이전에 갔던 다양한 모습의 낙산사와 달리 누각 하나만 떡 하니 있다. 월송정을 설명하는 전시관조차도 없다. 왜 그럴까 다시금 생각해봤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강원도 평해군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참고로 울진은 1963년에 강원도에서 경상북도 관할로 바뀌었는데, 비교적 최근 일이다.)
越松亭。在郡東七里。蒼松萬株,白沙如雪。松間螻蟻不行,禽鳥不棲。諺傳新羅仙人述郞等遊憩于此。
“월송정(越松亭). 고을 동쪽 7리에 있다. 푸른 소나무가 만 그루이고, 흰 모래는 눈 같다. 소나무 사이에는 개미도 다니지 않으며, 새들도 집을 짓지 않는다. 민간에서 전하여 오는 말이, ‘신라 때 신선 술랑(述郞) 등이 여기서 놀고 쉬었다.’ 한다.”
즉, 월송정을 볼 때는 주변의 푸른 소나무과 고운 흰 모래로 이뤄진 해변을 주목해야 한다. 즉 여기 있는 자연 그대로를 즐겨야 한다는 소리. 원래 장소가 옛날과는 다르지만 월송정 주변의 빽빽한 소나무들과 인간 때가 덜 묻은 모래사장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그리고 나서 월송정을 노래했던 시들을 인용하는데, 그 중 이곡의 시가 내 눈에 띈다.
월송정 앞 바닷가의 푸른 소나무들
訪古秋風馬首東 喜看鬱鬱蔭亭松
幾年心爲尋眞切 千里糧因問道舂
厄絶斧斤經漢魏 材堪廊廟擬夔龍
倚欄不覺沈吟久 拙筆難形萬一容
고적을 찾으러 가을 바람 속에 말 머리를 동쪽으로
울창하게 그늘진 정자의 소나무 보는 기쁨이여
진경을 찾고 싶어 몇 년이나 마음을 졸였던가
도를 묻기 위해 천 리의 양식을 미리 찧었다네
한위(漢魏)를 거치면서 부근(斧斤)의 재앙이 끊어졌나니
낭묘(廊廟)를 감당할 재목으로 기룡(夔龍)에 비견되었다오
난간에 기대 나도 몰래 오래 침음하였나니
졸필이라 만에 하나도 형용하기 어려워서
ⓒ 한국고전번역원, 이상현 (역), 2007
이곡이라. 누군지 어렴풋이 기억난다. 바로 국어시간에 차마설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던 이름이다. 말을 빌려 탔던 경험을 바탕으로 인간의 소유에 대한 성찰을 드러낸 글로 유명하다. 하지만 내가 괴시리에서 봤던 성리학자 목은 이색의 아버지였다는 것을 이번 월송정을 조사하면서 처음 알게 되었다(사실 괴시리 목은 이색 기념관에 이색의 족보를 보면 그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때 깊이 보지 못했다.). 그도 원나라 과거에 급제하고 고려에 와서는 유학의 이념으로 현실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던 사람이었다. 역시 부전자전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여행을 엄청 좋아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 때도 얼마나 월송정이 유명했기에 천 리의 양식을 미리 찧어서라도 제 발로 갔을까? 또한 도끼의 재앙이 끊어졌다는 말을 할 정도면 수도와 달리 끝이 없는 울창한 울진의 소나무 숲을 보고 매우 감동한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월송정 주변 소나무의 질이 뛰어나 정사를 돌보는 건물의 재목으로 극찬했는데, 어느 정도냐면 순임금을 보좌했던 기와 용처럼 뛰어난 신하처럼 울진 소나무의 명성이 조정에도 알려졌나보다. 경치 또한 빼어나 난간에서 넋을 읽고 글쓰기 실력이 부족해 더 이상 못 적겠다는 내용이다.
월송정 주변에 가득한 소나무
아들과 마찬가지로 원나라 과거를 급제했다면 글재주가 상당히 뛰어났을 텐데 얼마나 감동했으면 이렇게 적었을까? 요즘 우리나라 생태 관광에서 유행하는 것이 자연휴양림인데 직장인들의 스트레스를 푸는데 좋다고 한다. 이건 700년 전 격무로 스트레스 받은 고려 관료에게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자연이 오랜 정무로 지친 자신에게 큰 위로가 되었는지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었나보다.
소나무 숲과 고운 모래
왜 이름이 월송정이 되었는지에 대한 유래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술랑 혹은 지역구전에서 신라의 4명의 선인(전설의 화랑으로 보기도 한다)이 울창한 소나무 숲에서 달을 보며 놀고 갔다고 해서 월송(月松). 두 번째는 이곡의 <동유기>에서 4명의 선인이 여기를 유람하다가 우연히 이곳을 지나갔다고 해서 ‘소나무를 지나갔다’는 의미의 월송(越松). 세 번째로는 옛 중국 월나라의 가져온 소나무의 씨를 심었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고 했는데, 기원전 춘추전국시대까지 가야 하는지라 신빙성이 떨어져 보인다. 하지만 셋 다 핵심은 ‘소나무’다. 전설의 화랑이 온 게 실제 있었던 일이라면 신라 때부터 내려오는 유구한 휴양림인 셈. 오늘날에는 금강송 숲길을 울진을 대표하는 휴양림으로 보고 있지만, 옛날에는 월송정 소나무 숲이 그 역할을 했다.
월송정 누각에 올라가봤다. 누각 위에 보면 수많은 현판이 걸려있는데, 월송정에 다녀간 사람들이 남긴 글로 보였다. 선조 때 3년 동안 유배생활을 한 아계 이산해의 ‘월송정기’ 현판도 보인다. 그도 월송정 주변이 빽빽한 소나무 숲과 나무 옥가루와 같은 모래 뿐이라서 새들이 깃들지 못하고 개미나 땅강아지가 다니지 못한다고 말했는데, 역시 소나무 숲과 아름다운 해변이 핵심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절제 김종서가 쓴 '백암거사찬(白巖居士贊)'이라는 글도 눈에 들어온다. 바로 4군 6진하면 떠오르는 사람이다. 충청·전라·경상도 도순찰사(都巡察使)였던 그가 이곳에 방문하여 기우자 이행을 기리는 글을 썼다. 이행은 정몽주를 살해한 조영규를 탄핵한 사람이다. 고려 충신이었는지라 그는 목은 이색처럼 조선조정에 참여하지 않고 예천동에 은거했다고 한다. 은거하는 와중에도 정몽주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태조에 의해 울진으로 귀양을 갔다.
세월이 흘러 정몽주와 대립한 조선 개국공신 당사자들이 세상을 떠나서 그런지 김종서가 고려를 지키려 했던 이행을 대놓고 추모한 것이 흥미롭다. 마지막에 있는 "바닷가의 푸른 소나무처럼, 소나무 위에 걸린 달처럼 선생의 기백과 결의는 천추만세에 이르도록 빛날 것이다(海上有松松上有月千秋萬歲兮髣髴相見其精神)."는 문구가 눈에 띄는데, 여기서는 푸른 소나무와 정자에서 바라보는 달이 핵심이다.
아계 이산해의 월송정기
기우자 이행을 기린 김종서의 글 <백암거사찬>
이번에는 바다로 나갔다. 개발이 되지 않은 해변이라 옛 기록 그대로 모래가 눈 같이 희다. 바닷가에서 월송정 방향으로 바라보는 소나무들도 일품이다. 옛 조상들의 뜻대로 여기도 생태공원으로 지정해서 관리해야 하는 건 아닐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런지 소나무 숲 사이에 설치된 운동기구들이 눈에 거슬린다.
이전에는 관동팔경 중 하나로 외워야 했던 월송정이었지만, 직접 와 보니 왜 조선 사람들이 팔경 중 하나로 선정했는지 알 것 같다. 고려와 조선의 관료들이 울진 소나무 숲에서 업무를 잊고 풍류를 즐기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 고려관료들은 개성, 조선관료들은 한성에 거주했는데, 수도 주변 지역의 나무들은 국정운영을 위한 종이와 수도에 사는 관료와 주민들의 땔감을 만들기 위해 수없이 베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곡이 ‘도끼의 재앙이 끊어졌다’고 한 게 아닐까? 생태관광이 도시화로 인한 부작용으로 인해 21세기에 더욱 각광을 받고 있다고 하는데, 그의 시를 보면 이미 그 때부터 생태관광 개념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과 벗 삼기 좋은 곳이 월송정이라는 것을 정자 안의 시문들이 말해주고 있는 것은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