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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우 Apr 13. 2021

성류굴: 자연과 역사의 조화

신라 화랑, 진흥왕, 이곡의 흔적이 깃든 동굴

천연기념물 제155호 울진 성류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관광객에게 개방된 석회동굴이다. 고등학교 과학시간에 지하수와 빗물에 스며든 이산화탄소가 석회암을 녹여서 동굴을 만든다는 원리와 이에 대한 화학식을 배웠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동굴 안에는 고드름처럼 생긴 종유석과 밑바닥에서 뾰족하게 튀어나온 석순, 그리고 종유석과 석순이 합쳐져 만든 석주들도 있다고. 처음에는 관광객들이 성류굴을 보는 이유가 바로 종유석, 석순, 석주들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싶어서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성류굴은 오랜 역사가 깃든 동굴이기도 하다. 삼국유사 제3권 탑상 제4 명주오대산보질도태자전기(溟州五臺山寶叱徒太子傳記)에서 신라 정신대왕(신문왕으로 추정)의 태자 보천이 장천굴에서 수구다라니를 외우며 도를 닦았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대다수 학자들은 장천굴을 성류굴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이색의 아버지 이곡이 가정집 제5권 동유기에서 성류굴을 탐사한 내용을 상세히 적었다. 조선시대에도 김시습과 수많은 문인들이 성류굴에 대한 시를 남겼고,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는 그림을 남겼다.


게다가 2015년에는 동굴 입구에서 계해년 3월 8일로 시작하는 신라시대 금석문을 발견했고, 2019년에는 제8광장에서 진흥왕과 수많은 화랑들이 방문했다는 내용이 있는 각석문이 보고되었다. 성류굴 관광은 적어도 1,500년 가까운 역사를 가졌다고 과언이 아니기에 이번 역사문화기행에 포함했다.

     

입구에서 제5광장 용신지까지


성류굴 입구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 번째로는 이전의 망양정과 마찬가지로 근남면 시가지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간다. 그리고 왕피천을 만나면 좌측으로 꺾자. 하천을 따라 그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건너편으로 울진종합운동장이 보이는데, 다리를 통과하지 말고 계속 직진하면 성류굴 북쪽 입구가 나온다. 또는 금매교차로에서(부산방향 하행은 노음교차로) 내려와 매화천 길을 따라 왕피천이 만나는 지점까지 가면 성류굴휴게소가 보이는데, 여기가 바로 성류굴 남쪽 입구다.


나는 남쪽 입구에서 성류굴로 향했다. 휴게소에서 왕피천을 따라 약 250m 정도 걸으면 성류굴 입구가 나온다. 성류굴 입장료는 어른 1명 기준으로 5,000원. 동굴을 지나갈 때 몸을 낮추고 들어가야 하는 곳이 많아서 안전모 착용을 반드시 해야 한다. 동굴 전체 길이는 약 870m인데 그중 270m의 구간이 관광객에게 열려 있다. 1963년 5월 7일에 석회암 동굴 중 최초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후 국가에서 관광객에게 최초로 개방한 동굴이기도 하다.


입구 바로 옆에는 한자가 써져 있는데, ‘현령 이희호, 아들 조경, 정광문, 이동석(縣令 李熙虎 子祖慶 鄭匡文 李東錫)’으로 보이고, 나머지 이름 하나는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았다. 울진 현령 이희호? 어디서 본 이름이다. 그렇다. 바로 1860년 망양정을 오늘날 위치로 옮긴 현령이다. 자신이 방문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이름을 크게 써 놓은 건가? 아니면 공무상 이곳을 방문했다는 흔적을 남긴 것인가?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요즘 높은 사람이 이렇게 하다가는 큰일난다. 이름을 남기고 싶거든 방명록에 쓰면 되니까.


성류굴 입구. 파란색 네모에는 울진현령 이희호 일행의 이름이, 빨간색 화살표에 신라시대 암각명문이 있다.


왼쪽에는 2016년에 발견된 신라시대 암각명문이 있는데 '계해년 3월 8일에 신라 왕경의 관리 대나마가 성류굴에 와서 크게 먹고 놀면서 어떤 행위를 했다'는 내용이다. 동굴에서 신라시대 흔적을 발견했다는 이유로 지역언론에서 화제였다고 한다. 계해년이 언제인지는 아직까지 분분한데, 박홍국 위덕대 교수가 석각을 발견한 후 논문을 쓴 경북대 이영호 교수는 문무왕 3년(663)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추정하고 있다. 대나마는 포항 냉수리 신라비에서 본 신라의 10번째 관등이다. 대나마 벼슬아치가 이곳에 와서 왜 먹고 놀았는지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24절기 중 하나인 곡우에 풍년을 기원했다는 축제가 열려서 그랬다는 의견과 대규모 종교행위가 이루어졌다는 견해 등이 있다. 


입구로 들어갔는데 몸을 숙여야 할 정도로 좁다. 머리를 조심하며 비좁은 입구를 지나면 공간이 다시금 넓어지는데 제1광장 연무동 석실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무술을 연마하던 장소라고 한다. 입구는 좁지만 안이 오늘날 터널처럼 넓어서 이곳을 벙커로 쓰기에 적합했을 터. 하지만 왜군들이 출구를 막아버려 식량을 구할 수 없어서 의병들과 피난민들이 굶어 죽었다는 안타까운 사연이 있다. 조명이 없었던 시절 어두운 곳에서 횃불로 생명을 버터야 했던 이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제1광장 연무동 석실. 임진왜란 시절 왜군이 입구를 막아 안에 있던 의병들과 피난민들이 굶어 죽은 아픈 역사가 있다.


임진왜란 역사가 깃든 공간을 지나고 다시 좁은 입구를 지나면 상당히 아름답고 거대한 기둥이 나를 반겨준다. 기둥에는 3.1 기념탑이라고 써져 있다. 높이가 무려 8m인 석주인데, 석주는 동굴 위에서 고드름처럼 생성된 종유석과 아래에서 뾰족하게 튀어나오면서 생성된 석순이 합쳐서 생성된 것이다. 그리고 옆을 보니 나는 벌써 제4광장 탑실까지 건너왔던 것이다. 


제4광장을 지나 길을 따라 계속 가면 거대한 종유석들이 장관인 제5광장을 볼 수 있다. 그런데 10광장 방면 오른쪽을 보면 종유석이 작은 고드름 형태가 아니라 상당히 큰 커튼 여러 줄을 걸어놓은 느낌을 준다. 이를 베이컨 시트라고 한다. 구전에 따르면 여기서 신라 보천태자가 수도에 열중하고 있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태자가 옛 성류굴의 이름인 장천굴에서 수구다라니를 외우다가 굴의 신령을 만나는 내용이 나오는데, 2천년 된 굴의 신령이 수구다라니에 감격하여 보살계를 받고 사라졌다는 내용이 나온다. 아무래도 이 굴 주변에 절이 세워졌음을 암시하는 내용인데, 실제로 동굴 입구 주변으로 절의 흔적으로 추측되는 기왓조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베이컨 시트로 가득한 곳에서 태자가 도를 닦으며, 토착굴신을 믿는 성류굴 주변 주민들을 교화시키는 준비를 했을는지도 모르겠다. 


제4광장 3.1 기념탑. 천정의 종유석과 바닥의 석순이 자라 합쳐진 석주 형태다.
제5광장 용신지. 입구로 나가는 방향으로 사진을 찍어서 베이컨 시트가 왼쪽에 있다.


제8광장의 신라인들

     

제5광장을 나와 로마의 궁전으로 들어가면 다리 위로 동굴을 건너게 된다. 이곳의 이름도 재미있는데 바로 제6광장 지옥동이다. 지옥동 답게 조명이 좀 어둡고 통과할 때 머리를 조심해야 한다. 전해오는 구전에 의하면 제5광장에서 도를 닦고 나서는 보천태자를 위해 용이 다리를 놔줬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철제 다리가 놓여 관광객의 편의를 돕고 있다. 지옥동을 통과하면 성모 마리아상이라고 붙인 팻말을 바로 볼 수 있는 제7광장이 나온다. 제7광장의 이름은 만물상. 성모 마리아상 외에도 부처 모양 같이 생긴 돌이 있는데, 이전에 사람들이 워낙 동전을 많이 던져서 그랬는지 ‘동전을 던지지 마세요’라는 팻말이 눈에 띈다.


그런데 672년 전 횃불을 들고 성류굴을 탐사한 고려 사람 이곡도 <동유기>에 비슷한 내용을 적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이전에 내가 이곡의 월송정 시를 소개한 적이 있다. 성류굴도 그가 강원도를 유람하며 다녀간 곳 중 하나인데 전기가 없던 시절 횃불을 든 하인의 도움으로 들어갔다. 여행과 모험을 좋아했던 이곡을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차마설>에만 가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行七八步稍開闊。左右石益殊異。或若幢幡。或若浮圖。又行十數步。其石益寄恠。其狀益多不可識。其若幢幡浮圖者益長廣高大。又行四五步。有若佛像者。有高僧者。


“7, 8보쯤 앞으로 나아가자 조금 앞이 트이고 널찍해진 가운데, 좌우에 있는 돌의 형태가 더욱 괴이해서 어떤 것은 당번(幢幡: 장대 끝에 용머리의 모양을 만들고 세로가 긴 비단 깃발을 달아 드리운 것으로 불, 보살님의 위신력과 공덕을 표시함) 같기도 하고 어떤 것은 부도(浮圖) 같기도 하였다. 또 10여 보를 가니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돌이 더욱 기괴해지고 모양이 더욱 다양해졌는데, 당번과 부도처럼 생긴 것들만 하더라도 이전보다 더욱 길고 넓고 높고 컸다. 여기에서 다시 앞으로 4, 5보를 가니 불상과 같은 것도 있고 고승과 같은 것도 있었다.”

ⓒ 한국고전번역원, 이상현 (역), 2006


아무래도 이곡은 제7광장을 지나지 않았을까 싶다. 당번은 아무래도 길게 늘어진 종유석과 석주들을, 부도는 땅에서 솟아난 석순들을 말한 것 같다. 이곡이 살던 시대는 대중들이 불교를 믿는 시대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550여 년이 지나 한반도에 천주교까지 정착된 후, 제7광장은 현대 사람들이 이름을 붙인 성모 마리아상과 기존 이곡이 본 것을 추정된 당번, 부도, 불상, 고승이 어우러진 곳으로 탈바꿈했다. 한마디로 평화롭게 종교가 공존하는 대한민국을 나타낸 곳이라고 해야 할까나.


제6광장 지옥동. 해파리처럼 보이는 종유석이 인상 깊다. 구전에서 보천태자가 건넜다는 다리는 철제로 바뀌었다.
이곡이 말한 불상이 이게 아닐까? 제7광장에서 입구로 나가는 길에 있다.
제7광장 성모 마리아상


이곳을 지나면 긴 제8 초연광장이 나온다. 들어가자마자 길게 들어진 석주들이 인상 깊었다. 왼쪽에 안내판이 있는데 종유석, 석순, 석주의 원리를 잘 설명해 놓았다. 하지만 제8광장에서 놀라운 일이 2019년 3월 21일에 있었는데, 바로 심현용 울진 봉평리 신라비 전시관 학예연구사와 이종희 한국동굴연구소 조사연구실장이 다수의 신라시대 각석문을 발견한 일이다. 신라의 흔적이 동굴입구에만 머무른게 아닌 셈이다.


원래 제8광장에는 성류굴의 또 다른 제2입구가 있다고 한다. 과거 성류굴의 자연 입구였는데 오늘날에는 통로가 좁아 사용을 하고 있지 않은 것. 여기서 다수의 금석문을 발견했다. 대표적인 금석문을 아래와 같이 소개하겠다.


庚辰六月日/柵作榏父飽/女二交右伸/眞興/王挙/世益者五十人


“경진년(560) 6월 ○일, 잔교를 만들고 뱃사공을 배불리 먹였다. 여성 둘이 교대로 보좌하여 펼쳤다. 진흥왕이 다녀가셨다. 세상에 도움이 된 이(보좌한 이)가 50인이었다.”


천전리 각석을 봤던 7세 어린 왕 심맥부지는 이제 26살의 어엿한 청년 진흥왕이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진흥왕 20년(559)부터 22년까지(561) 기록이 비어 있는데, 기록이 빈 기간 사이 성류굴을 다녀갔기에 상당히 중요한 자료다. 왕이 다녀가서 그런지 진흥왕거(眞興王挙)가 유독 크게 적혀 있다고 한다. 이 뿐만 아니라 화랑이나 신라인들이 방명록으로 남겨둔 명문들을 다수 발견했는데, 몇 가지를 들겠다.


貞元十四年/戊寅八月卄五日/梵廉行/


“정원 14년(원성왕 14년, 798) 8월 25일 (승려) 범렴이 왔다 간다.” 


行/貞元十四年八月卄五日淸忠向達/


“정원 14년(원성왕 14년) 8월 25일 정충향달(또는 정충과 향달)이 왔다 갔다.” 


정충향달은 누군지는 잘 모르겠지만 범렴과 같은 날짜에 여길 왔다. 아니면 범렴과 함께 왔는데 방명록을 따로 남긴 걸까?


“梵廉行/夫匁郞行云山行”

“범렴이 왔다 간다. 부문랑이 왔다 간다. 운산이 왔다 간다.”


범렴이 또다시 나온다. 그리고 부문랑이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화랑인 것 같다. 천전리 각석과 뭔가 비슷해 보인다. 천전리 각석의 고위급과 왕이 행차했던 내용은 돌을 가지런히 깎아서 신라비와 비슷하게 가지런히 적고 있다. 반면 화랑들과 승려들이 왔다 간 내용은 무질서하게 적혀 있다. 여기도 그런 것 같다. 진흥왕이 왔다 갔다는 내용은 상당히 크게 적었고, 다른 신라인과 화랑들이 왔다 갔다는 방명록은 여기저기 어지럽게 적힌 흔적이라고나 할까. 신라인과 관련된 명문이 무려 30여 개나 된다고 하니, 앞으로 제8광장을 신라광장이라고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성류굴은 최소 1,500년 전 사람들이 이미 방문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제8초연광장. 신라시대에는 진흥왕, 화랑들과 승려들이 다녀갔던 곳이기도 하다.
제8초연광장의 종유석, 석순, 석주들


辛丑一月八日崔瑞祐行


제9광장 법당 동자승처럼 보이는 돌과 마귀할멈을 거쳐 아기공룡둘리상을 지나면 관광객이 볼 수 있는 마지막 동굴인 제10광장 여의동이 나온다. 이전에는 제11광장 음향동과 제12광장 보물섬까지 볼 수 있었다고 하던데, 동굴자연을 보호하기 위해 제10광장 이후부터 일반인들은 들어갈 수 없다. 조명의 열로 이끼류가 번성하는 녹색 오염과 사람이 손과 먼저로 더럽혀지는 흑색 오염을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고려 사람 이곡도 동굴 탐험을 하다가 중단하는데 이유는 다음과 같다.


人言若沿池而入則益奇恠。余以爲此非世俗所可䙝玩者。趣以出。其兩旁多穴。人有誤入則不可出。


“이 못을 따라 들어가면 더욱 기괴한 경치가 펼쳐진다고 어떤 사람이 말했지만, 내 생각에는 속세의 인간이 함부로 장난 삼아 구경할 성격의 것이 아니라고 여겨지기에 서둘러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 양 옆으로 동굴이 많이 뚫려 있었는데, 사람이 한번 잘못 들어가면 나올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가 속세의 인간이 함부로 장난 삼아 동굴에 더 깊게 들어가서 구경할 것이 아니라고 말한 것은 오늘날까지도 유효하다. 사람의 손이 지나치게 많이 닿아서 자연이 망가진 관광지가 한 둘이 아니니까. 게다가 전문가를 대동하지 않고 개방하지 않은 동굴을 혼자서 함부로 탐험하는 건 오늘날에도 매우 위험한 행위다. 


제9광장 법당과 마귀할멈상
제10광장 여의동. 아기공룡둘리상이 있다.
제10광장 끝부분. 관광객들이 갈 수 있는 마지막 지점이다. 


안내를 따라 다시 왔던 길로 돌아가 바깥세상으로 나왔다. 2억 5천 년 동안 이산화탄소가 스며든 물이 석회 암석들을 깎아서 만들어낸 신비를 제대로 보고 나왔다. 고려 사람 이곡도 동굴을 본 소회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造物之妙。多不可測。余於國島及是窟益見之。其自然而成耶。抑故爲之耶。以爲自然則何其機變之巧如是之極耶。以爲故爲之則雖鬼工神力窮千萬世。而亦何以至此極耶。


“조물(造物)의 묘한 솜씨는 헤아릴 수 없는 점이 많다고 내가 예전부터 생각해 왔는데, 이번에 국도(國島)와 이 동굴을 통해서 더욱 확인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경치는 자연스럽게 변화해서 이루어지도록 한 것인가, 아니면 처음부터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인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도록 한 것이라면, 그 변화의 기틀이 어쩌면 이렇게까지 오묘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리고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이라면, 천세토록 만세토록 귀신이 공력을 쏟는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이렇게까지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낼 수가 있겠는가.”

ⓒ 한국고전번역원, 이상현 (역), 2006


오늘날 우리는 그가 소회에서 남긴 질문에 대해 ‘자연이 이렇게 만들었다’고 답변할 수 있다. 중학교 때 배운 화학식으로 말이다.


 CaCO3 + H2O + CO2 ↔ Ca(HCO3)2


석회암에 있는 탄산칼슘(CaCO3)이 이산화탄소가 있는 물과 부딪히면 탄산수소칼슘[Ca(HCO3)2]이 된다. 탄산수소칼슘은 물에 잘 녹아서 동굴처럼 구멍이 뻥 뚫리게 된다. 그리고 이산화탄소까지 잃으면 다시 탄산칼슘이 되는데, 탄산칼슘이 천정에서 고드름 모양으로 내려오면 종유석, 동글 천정에서 떨어지는 석회질이 바닥에 쌓여서 자란 것이 석순, 종유석과 석순이 합쳐지면 석주가 된다. 


성류굴은 자연의 경이로만 끝나지 않는다. 제8광장에 석주에는 진흥왕과 신라인들은 자신들이 방문한 흔적을 새겨놓았다. 또한 입구에는 조선인들의 이름과 신라인들이 새긴 명문이 남아 있다. 어떻게 보면 성류굴은 문·이과 통합 연구와 현장교육에 매우 유익하다고 볼 수 있다. 1,500년의 역사를 간직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과학이론이 가득한 동굴은 세계에서도 찾아보기 어렵기에 성류굴을 잘 지켜가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자연이 남겨준 아름다움을 본 나의 먼 조상들을 생각하며 내 마음속에 이렇게 새겨본다.


“辛丑一月八日崔瑞祐行”


제7광장 통일기원탑. 중간에 갈라진 틈이 뚜렷한데, 지진으로 인한 것으로 보인다.
제5광장 로마의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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