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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우 Apr 16. 2021

울진 봉평리 신라비

신라관등 체계를 완성한 법흥왕과 옛 형사재판 판결문

경북 동해안 지역에서 발견된 신라비는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포항 중성리 신라비, 포항 냉수리 신라비, 울진 봉평리 신라비. 공무원 시험에서도 자주 출제되는 문제라고 한다. 지난번 냉수리 신라비에서는 돌마골에 사는 세 사람이 재물로 인해 분쟁이 나서 지증왕을 포함한 4부(部)요인 6명이 이를 판결한 과정을 담았다.


울진 봉평리 신라비는 냉수리 것보다는 약 20년 더 지나서 새겨졌다. 냉수리와 중성리비가 오늘날 민사재판 판결문과 비슷한 것과는 다르게 이 비석은 실수로 일어난 큰 화재를 진압하고(반란을 일으켰다는 견해도 있다), 법흥왕과 6부 요인이 관련자들에게 징벌을 내리는 형사재판 판결문에 가깝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서 하위 관등도 지증왕 때보다 더 정비되었다.


그럼 화재를 일으킨(혹은 반란을 일으킨) 이들에게 어떤 처벌을 내렸을까? 나는 울진 봉평리 신라비 전시관으로 향했다.


울진 봉평리 신라비의 내용


봉평리 신라비 전시관도 7번 국도 상에 있다. 울진읍과 36번 국도 교차로를 지나고 나서 봉평해수욕장으로 들어가는 길에 바로 있다. 봉평리 신라비는 원래 발견된 장소에서 약 50m 떨어진 지점에 비각을 세워 보존했다. 봉평해수욕장 바로 건너편이다. 하지만 해풍과 습한 환경이 풍화를 가속시키는 문제가 있어 2008년도에 전시관 안으로 이전했다.


전시관을 들어가는 입구에는 좌우로 수많은 비들이 가득한데, 조선시대 강원도에 속했던 평해군수와 울진 현령 등을 지낸 지방관들의 공덕을 기린 송덕비들을 모은 것이다. 오늘날 송덕비는 평해군지역 29기 울진현지역 44기가 있는데, 이중 각각 9기, 36기를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조선시대 울진, 평해군의 역대 지방관들을 연구할 때 매우 유용한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전시관에 들어가면 기다란 울진 봉평리 신라비가 위용을 드러내고 서 있다. 넓게 네모난 돌로 이뤄진 냉수리 신라비와 비교하면 길지만 가늘고 뾰족하게 보인다. 울진 봉평리 신라비는 그럼 언제 발견되었을까? 때는 1988년 1월 20일 무렵 농민 주두원 씨가 논에서 객토작업을 하다가 돌이 거꾸로 박혀 있는 것을 발견한다. 주 씨는 이 돌이 농사를 짓는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해서 굴착기를 불러 돌을 드러내 개울가에 버렸다고. 두 달이 지나고 마을 이장 권대선 씨가 이 돌을 자기 집 마당에 정원석으로 쓰려고 했는데, 물로 씻어서 봤더니 글자가 있었다. 글자를 보자마자 권 씨가 죽변면사무소와 울진군에 신고해서 이 비석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굴삭기로 비석을 드러낼 때 일부 글자가 떨어져 나갔는데, 다행히 현장에서 떨어진 파편을 찾아서 복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와 같은 문헌에 없는 6세기 귀중한 신라 재판기록이라서 같은 해 11월 4일 국보 제242호로 지정되었다. 발견 경위가 냉수리 신라비와 비슷하다. 혹시 동해안 지역에서 농사를 짓다가 큰 암석을 본다면 한자가 적혀있는지 꼭 확인해 보시기 바란다.


울진 봉평리 신라비 전시관 외부. 입구 좌우에 송덕비들이 모여 있다.


전시관 입구에서 볼 수 있는 지방관 송덕비들


국보 제242호 울진 봉평리 신라비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봉평리 신라비의 내용은 어떨까? 우선 냉수리 신라비처럼 판결한 사람들의 명단을 보자. 한자를 아시는 독자라면 빨간 글씨와 푸른 글씨에 주목해보시길 바란다. 빨간 글씨는 왕명과 관등, 푸른 글씨는 신라 6부를 말한다.


甲辰年正月十五日喙部牟即智寐 錦王沙喙部徙夫智葛文王本波部(巫)夫智(㐅)

干支岑喙部(美)昕智干支沙喙部而(粘)智太阿干支吉先智阿干支一毒夫智一吉干支勿力智一吉干支愼 宍智居伐干支一夫智太奈麻一尒智太奈麻牟心智奈麻沙喙部十斯智奈麻悉尒智奈麻等所敎事


냉수리 신라비와 비슷하게 '모즉지매금왕', '사부지갈문왕', '일길간지', '거벌간지' 등이 보인다.  등급이 높은 것을 보아 재판에 관여한 이들로 보인다. 재판이 이뤄진 때는 갑진년(524) 정월 15일. 아래가 재판에 관여한 사람들의 명단이다.


판결에 관여한 이들


냉수리 신라비의 재판관와 비교하면 무려 2배가 넘는다. 아무래도 상당히 큰 사건이 아니었을까? 또한 익숙한 이름이 하나 나오는데 바로 사부지 갈문왕이다. 지난번 천전리 각석에서 본 이름인데, 바로 심맥부지, 진흥왕의 아버지다.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그리고 여기서도 포항의 두 신라비처럼 탁부와 사탁부가 주가 되어서 판결 과정에 참여하고 있다. 포항 두 신라비처럼 일단 판결을 내려서 영을 내린 사람들이 나오면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에 대한 내용이 나올 것 같은데, 다음 이어지는 명문을 보자.


別敎令居伐牟羅男弥只本是奴人雖是奴人前時王大敎法道俠 阼隘尒耶(恩)城失火遶城(到)大軍起若(有)

者一行△之(人)(備)土(尊)王太奴村負共値㐅其餘事種種奴人法


“따로 영을 내리시길, ‘거벌모라(지금의 울진군 중심지역) 남미지는 본디 노인(奴人, 복속된 지역민을 낮추어 부른 말)이었다. 비록 노인이지만 앞선 시기에 왕께서 크게 법을 내려주셨다. 그런데 길이 좁고 오르막도 험난한 이야은성에 불을 내고 성을 에워싸니 대군이 일어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한 자들은 (처벌해야 사람들이 땅을 안전하게 하고 왕을 높일 것이다.) 대노촌은 값 다섯(50%)을 함께 부담하도록 하고 그 나머지는 여러 노인법(奴人法)을 받들라.’고 하셨다.”  


아무래도 거벌모라 남미지라는 마을 사람들이 뭔가 일을 저질렀나 보다. 불을 내고 성을 에워쌌다고 하는데, 어떤 학자는 실제로 이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고 했고, 어떤 학자는 누군가의 실수로 이야은성에 불이 났다고도 말한다. 마을에서 중앙에서 군이 파견될 정도로 뭔가 큰 사고가 나서 노인법에 따라 지역민 전체에게 더 많은 부담을 지웠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오늘날과 달리 옛날에는 지역이나 마을에서 반란이 일어나 중앙에 찍히면 마을 전체의 등급이 격하되는 일이 흔했다. 반대로 주민들이 합심하여 외적들과 용감히 싸워 이겨서 마을의 격이 올라가는 사례도 있다. 고려시절 몽골 제5차 침입 때 승장 김윤후와 충주 관민들이 합심해서 싸움에 이겨 충주가 국원경으로 승격된 일이 그 예다. 그다음 내용은 지역의 유력인사들에게 형벌을 내리는 내용인데 중성리, 냉수리 신라비와는 달리 형사재판 판결문에 가깝다.


판결문 다음에는 소를 희생제물로 삼아 합의사항을 지키겠다고 신에게 약속하는 희생 의례를 치렀다는 내용이 나온다. 냉수리 신라비와 마찬가지로 재판할 때 하늘에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풍습을 잘 말해준다. 그다음에는 처벌 명령을 전달한 사람의 명단이 나온다. 마찬가지로 빨간 글씨는 왕명과 관등, 푸른 글씨는 신라 6부와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 관리인 도사(道使)를 말한다.


新羅六部煞斑牛(肣)(泍)(處)事大人喙部內沙智奈麻沙喙部一登智 奈麻(具)次邪足智喙部比須婁邪足智居伐牟羅道使(卒)(次)小舍帝智悉支道使烏婁次小舍帝智


처벌받은 사람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파란 글씨가 추가되었는데 처벌 내용이다.


居伐牟羅尼牟利一伐弥宜智波旦䋎只斯利一(今)智阿大兮村使人奈尒利杖六十葛尸条村使人奈尒利居△尺男弥只村使人(翼)(糸)(杖)百於卽斤利杖百悉支軍主喙部尒夫智奈麻


 그리고 6부 판결 결과와 처벌 명령을 전달한 사람들과 처벌을 받는 사람들을 아래 표로 요약했다.


판결에 따라 처벌 명령을 전달한 사람들
처벌을 받은 이들. 이들에게 처벌을 집행한 이는 탁부 이부지 나마(11등급)다.


처벌 명령을 전달한 사람들이 냉수리 신라비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 냉수리 신라비에서 재판 내용을 전달한 사람 중 관등이 나온 사람은 일부지 나마 한 명뿐이다. 하지만 봉평리 신라비에는 11등급 나마 아래의 관등들도 나오는데, 법흥왕의 율령 반포로 하위 관등들이 체계가 모두 갖추어졌음을 의미한다. 지방에도 외위를 두어서 관등 체계를 갖추었다. 처벌을 집행한 사람도 나오는데 탁부 이부지 나마(11등급)다.


처벌 내용을 보니 마을 책임자들에게 곤장 60대와 100대를 치라는 내용이다. 반란이면 주로 극형을 처하는 시대인데, 곤장형으로 처벌을 한 것 때문에 처벌을 받은 이들이 실수로 이야은성에 큰 불을 냈다고 추측하는 학자도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곤장 60대와 100대는 목숨까지 위험할 수 있는 형벌이라 가볍다고 말하기 힘들다. 조선 초 정도전이 자신의 정적인 우현보의 아들 세 명을 곤장형으로 저 세상에 보낸 사례도 있으니까. 지나친 비약일 수도 있겠지만, 오늘날로 비유하면 지방 과장급 공무원들이 국가와 지역에 어떠한 이유로 매우 큰 해를 끼친 이유로 파면되어 형사사건으로 이어진 것과 비슷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마지막으로 비문을 쓴 사람이 냉수리 신라비처럼 마지막에 나온다. 아래가 원문이다.


節書人牟珍斯利公吉之智沙喙部(善)文吉之智新人喙部述刀小烏帝智沙喙部牟利智小烏帝智  

立石碑人喙部博士于時敎之若此者獲罪於天居伐牟羅 異知巴下干支辛日智一尺世中(子)三百九十八


비문을 쓴 사람은 모진사리공 탁부 길지지(14관등), 사탁부 선문 길지지, 글자를 비에 새긴 사람은 탁부 술도 소오제지(16관등), 사탁부 모리지(16관등), 비를 세운 사람은 탁부의 이름 모르는 박사, 그리고 비를 세울 때 노동력을 동원으로 감독을 했을 거라 추정되는 사람은 거벌모라 거주자 이지파 하간지(외위 7등급), 신일지 일척(외위 9등급)이다. 비문을 쓰고 돌에 새긴 사람은 중앙관리들이 비를 세우는데 노동력을 제공한 곳은 거벌모라 지방이라는 것도 흥미롭다. 이 비의 자는 398자인데, 398자보다 글자를 1~2개 덜 세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냉수리 신라비보다 비문이 더 상세하다. 냉수리 비문은 전사인 7명이 나왔는데, 재판 결과를 전달하고 비석을 새긴 사람들을 뭉뚱그렸다. 하지만 봉평리 신라비의 경우에는 재판 내용을 전달한 사람, 처벌받은 사람, 재판을 집행한 사람, 비문을 쓴 사람으로 역할을 나눠서 매우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지증왕 때 보다 하급 관등과 벼슬아치들의 역할이 더 짜임새 있게 갖추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오죽하면 고등학교 시절 국사 수업 때 법흥왕하면 형법, 행정법과 관리들의 공복을 제정하고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했다는 내용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을까? 오늘날로 보자면 법흥왕은 그야말로 0순위 행정자치부 장관 후보라는 것을 봉평리 신라비를 보고 알 수 있다.


울진 봉평리 신라비 탁본(가운데)
울진 봉평리 신라비 원문
울진 봉평리 신라비 번역문


전시관을 돌아다니며


봉평리 신라비를 보고 제2전시실로 향했다. 여기는 우리나라 석비(石碑)는 어떤 종류가 있는지, 어떻게 만드는지 등이 나온다. 특히 삼국시대의 경우 역사 사실과 인물의 업적을 기록한 것이 대부분이라, 역사 사료에 기록되지 않은 내용을 보충하거나 사료 내용과 비교 분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또한 삼국시대 역사사료는 조선시대와 비교하면 매우 부족한 것이 현실이라, 삼국시대 석비연구는 평범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사소한 내용이라고 하더라도 글자 하나하나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우리나라 금석문 연구의 역사에 대해서도 잘 전시해 놓았다. 금석문 연구는 조선시대에 와서 성립되었는데, 처음에는 글씨체와 이를 옮는데 관심을 가졌지만 19세기 추사 김정희의 영향으로 인해 내용 탐구 중심으로 바뀌었다고. 그는 금석과안록에서 진흥왕 순수비인 황초령비와 북한산비의 비문을 판독하고 고증하는 글을 썼는데, 오늘날 금석문 논문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신라비에 있는 관등을 오늘날 해석할 수 있는 것도 추사의 연구 때문이다. 금석문 역사를 다음에는 한자의 서체에 대해 소개했다. 전서, 예서, 초서, 해서, 행서…… 한문 시간 때 얼핏 들은 내용이다. 서체마다 유행했던 시기가 있어서 비문이 언제 쓰였는지 추정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리고 삼국시대 때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서체도 미묘하게 다르다고.


석비는 어떻게 만들까?
우리나라 금석학의 역사
한자의 서체


제3전시실을 지나 체험교육장을 거쳐 내려오면 야외에 복제품으로 전시한 비들을 볼 수 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다양한 국보, 보물급 비석을 전시했는데, 모형 중에 다른 비를 크기로 압도하는 비가 중국 길림성 집안현에 있는 광개토왕릉비다. 무려 1,700자로 이뤄져 있는데 봉평리 신라비 글자 수보다 무려 4배 이상으로 많다. 여기에서 내가 기억하는 내용은 '신묘년에 왜가 신라에 상륙하자 고구려가 신라를 구원했다는 내용'이다. 이는 나중에 실성왕이 고구려에 눌지왕의 동생 복호를 인질로 보내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여기 나오는 복호는 지난번 내가 소개한 박제상이 구한 복호가 맞다. 일본으로 잡혀간 미사흔의 형이기도 하고.


이 외에도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명활산성작성비, 이차돈순교비, 포항 중성리 신라비 등 33개 석비의 복제품들도 있다. 우리나라 비석을 자세히 보면 비석 밑에 거북이가 있는 게 많다. 심지어는 쌍 거북이도 있는데 전문용어로는 귀부(龜趺)로 중국 당나라의 전통을 받아들인 것이다. 거북이는 장수의 상징이기 때문에 비의 영원성을 표현하기 위해서라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거북받침돌은 국보 제25호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릉의 비다. 안타깝게도 태종무열왕 비문은 전하지 않는다. 귀부로 된 비석은 고려시대까지 유행하다가 비석 받침돌이 대석(臺石)으로 바뀌면서 점차 사라졌다고 한다.


오늘 봉평리 신라비를 보니 왜 신라 금석문 연구가 중요한지 절실히 깨달았다. 금석문에 대해서는 역사 시간에 몇 개 단어를 들은 게 다인데 비문 연구가 옛 사회 양식을 잘 설명해주기에 고증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도 관심이 없다가 여행을 하며 이제야 천전리 각석, 냉수리 신라비, 봉평리 신라비를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되었는데, 어찌 보면 하늘이 나보고 금석문에 관심을 가지고 역사를 보라고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물론 금석문을 연구하는 학자들과 비교해서는 너무나 부족한 나 자신이지만, 적어도 이들이 연구한 것에 관심을 가져 고대 역사를 입체적으로 보는 노력을 기해야겠다. 특히 앞으로 내 자식이 역사 시간에 고대 비석에 대해서 어려워하면 여기를 직접 데리고 와야겠다.


야외전시관에 있는 석비 모형들
비석들을 받치고 있는 거북이. 비석의 영원함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광개토왕릉비 모형. 크기에서 다른 비석들을 완전히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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