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군 보급로를 끊기 위한 학도병들의 분투기
한국전쟁이 터지자마자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린 우리 국군과 UN군. 낙동강을 지키는 동안 전세를 역전하기 위해 우리 군에서는 상륙작전을 계획하게 된다. 바로 더글라스 맥아더가 1950년 9월 15일에 인천상륙작전을 시행한 것. 작전은 계획대로 성공하여 서울을 수복했다. 이는 우리 국군과 UN군이 38선 이북으로 진격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한편 같은 날 새벽 02:30분경. 우리군 독립 제1유격대대를 태운 LST 문산호가 영덕 장사동에 향했다. 바로 장사상륙작전이다. 미 해병대 제1보병사단과 우리나라 해병대 1개 연대 등의 대규모 병력과 261척의 함정이 투입된 것과 달리 장사에는 배 1척과 학도병을 포함한 832명의 병력들이 작전을 8일 동안 수행하였다.
그럼 왜 장사에서 상륙작전을 펼쳤을까? 7번 국도를 타고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으로 향했다.
LST 문산호
장사해수욕장은 영덕군의 남정면 장사리에 있으며 7번 국도 바로 오른편에 바로 보인다. 해수욕장 주차장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장사상륙전전몰용사 기념비가 보인다. 기념비에서 바다 정면으로 배가 하나 보이는데, 바로 장사상륙작전을 수행한 LST 문산호의 복제품이다. 원래 LST 문산호는 USS LST-120으로 전차상륙함으로 건조되어, 9월 22일 인디아나 제퍼슨빌에서 미군이 취역하였다. 취역 후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사이판 전투와 티니안 전투에 참전한 전력이 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에서 사들여서 대한해운공사 소속으로 밀가루나 석탄을 운송하는데 쓰다가, 한국전쟁이 터져 전시동원령으로 징발되었다.
징발되고 나서는 퇴각하는 묵호 전투부대를 포항으로 탈출시키는 작전과 여수 철수착전에 참가한다. 그러다가 장사상륙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9월 14일 부산에서 출항했는데, 9월 15일 장사에 도착하자마자 태풍 케지아(Kezia)의 간접영향으로 인해 좌초되었다. 이후 1997년에 국가보훈처로부터 유해인양 발굴비 710만원을 지원받아 해병1사단 수색대가 발굴작업을 진행하였다고. 몇몇 기록에서 해병대가 좌초된 배를 발견했다는 글이 있지만 와전된 거다. 인양작업이 성공리에 진행되고 전승기념관 건립 논의로 이어졌는데, 2012년에 LST 문산호를 복제하는 방향으로 기념관 착공에 들어갔다. 원래는 2015년 완공이 목표였지만, 복제품의 선미 구간이 태풍 아타우의 영향으로 손상된 일이 있었다. 게다가 너울성 파도의 문제가 있어서 안전문제를 해결하느라 작년 6월 5일에 개관하였다. 사업비는 324억 원.
입장료 3천 원을 내고 기념관에 들어갔다. 먼저 장사 상륙작전이 왜 시행되었는지에 대한 배경이 나오는데, 바로 낙동강 전선 방어와 연관되어 있다. 북한군은 한반도 전부를 공산화하기 위해 총공세를 실시했는데, 당시 우리 군은 상주-다부동(현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대구 축선과 포항을 마지막 방어선으로 삼았다. 영덕 장사동에는 당시 북한 제12사단과 제5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상륙하면 북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적 후방을 교란시킬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동해안 최대 병참기지인 포항을 방어할 수 있었다. 어떤 소설과 영화에서는 인천상륙작전의 양동작전으로 미군이 장사상륙작전을 기획했다고 하는데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국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유지하면서 북한군의 후방을 노려 전선을 끊기 위한 전략이었던 것. 이는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174호에 상세히 나온다.
그럼 장사상륙작전의 주역은 누구였을까? 바로 대구와 경남 밀양에서 입대한 학도의용군이다. 어떤 사람은 오늘날 아프리카처럼 소년병을 투입하여 전쟁범죄를 저질렀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당시에는 소년병을 금지하는 내용이 국제법에 담겨 있지 않았다. 또한 한국전쟁 이전에 고등학교를 다닌 사람은 오늘날처럼 흔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당시 고등학생들은 교육 엘리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역 내 교육 엘리트인 학도병의 지원과 징집은 가뜩이나 낙동강 전선에서 고전 중이었던 한국군들의 사기를 올릴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학도병의 현실은 국군 정규군과 UN정규군과 비교하면 상당히 열악했다. 학창 시절 교련 수업과 2주 동안 군사훈련을 받은 것이 전부였으니까.
몇 주만 훈련받은 학도병들은 육본직할 독립 제1유격대대 이명흠 대위 아래서 작전을 수행하게 된다. 당시 미군은 이명흠의 성을 명 씨로 착각하여, ‘명부대’라고 불렀다. 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해서 유격대를 북한군으로 위장해야 했다. 그래서 이들에게 지급된 것이 북한군 전투복, 소련제 모신나강 소총, 수류탄 1발, 실탄 150발, 판초우의 1벌, 배낭 1개, 건빵 1봉지, 미숫가루 3봉지였다. 또한 학도병 가방에는 안현필 선생의 <영어실력기초>와 박한식 선생의 <수학의 삼위일체>도 있었다고. 아무래도 미군과 소통하고 탄도학을 알아야 했기에 가지고 있었나 보다.
1950년 9월 14일 오후 4시 이들은 LST 문산호에 승선하여 부산항 제4부두에서 출항한다. 미 해군 구축함 엔디코트의 호위를 받으며 이듬해 새벽 02:30에 LST 문산호는 장사동 인근 해상에 도착한다. 하지만 태풍 케지아의 영향에 따른 높은 파도와 짙은 안개로 해안에 완전히 접안하지 못한 채 명부대는 상륙작전을 개시하게 된다. 이때 북한군의 맹렬한 사격을 받아 LST 문산호는 해안에 상륙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는데, 05:30경에 선미가 파괴되어 06:00경에 암초에 부딪혀 좌초했다. 특공조가 배에 밧줄을 걸어 소나무에 연결을 시도하려고 했으나 북한군 사격과 태풍으로 인해 일부 대원들이 희생되었다고.
좌초된 LST 문산호에 돌아갈 수 없었지만, 구축함 엔디코트의 포격 지원으로 명부대는 LST 문산호를 사격하고 있었던 북한군 토치카에 가까이 붙기 시작했다. 해상에 도착하고 10시간에 사투 끝에 결국 200고지를 완전히 점령하였다. 하지만 작전 기간이 겨우 3일이어서 보급품과 실탄이 매우 부족했다. 즉 지원병력이 오지 않으면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던 것.
게다가 통신기기가 고장이 나서, 9월 17일 오전에 미 구축함으로 열악한 상황을 알리려고 연락선을 보냈다. 하지만 연락선은 높은 파도로 인해 전복되어, 9명의 병사가 익사했다. 겨우 2주 훈련받은 어린 학도병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열심히 적들과 싸운 이들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공포로 가득했을 것이다. 베트남 전쟁 정규군들도 미국으로 돌아간 후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에 시달렸다고 했는데, 어린 나이에 훈련받자마자 전우들이 굶주리고 쓰러져가는 광경을 봤으니 오죽했을까? 만약 학도병이었던 할아버지들을 만난다면 이들의 말을 깊이 경청하고 오늘날까지 남은 아픈 기억들을 보듬어주어야 한다.
한편 해군본부에서는 9월 16일 LST 문산호 구출에 실패한 LT-1(인왕호)의 보고를 받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해군본부는 육군본부에 상륙부대를 철수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통보하였고, 이들의 철수를 지원하기 위해 LST 조치원호를 파견한다. 9월 18일 명부대가 포항 방향으로 남진하던 중 헬기가 나타나 이명흠 부대장을 태우고 제95기동부대의 기함인 헬레나함(USS Helena)로 이동한다. 헬레나함에서 통역장교 조종익 소령의 도움으로 하트만 제독과 면담하여 현재 상황을 보고한 것. 하트만 제독은 휴대용 식량 보급과 함포사격으로 명부대를 지원하였다.
기존 보급품과 헬레나함 지원품으로 간신히 버틴 끝에 드디어 9월 19일 새벽 5시 마침내 LST 조치원호가 도착했다. 해안으로부터 LST조치원호까지 밧줄로 연결한 후 철수작전을 시행했는데, 철수를 눈치 챈 북한군의 사격과 박격포탄으로 대원들이 상당수 희생되었다. 승선은 생각했던 것보다 오래 걸려 오후 3시까지 계속되고 있었는데, 적의 역습으로 LST 조치원호가 손상될 것을 염려하여 남은 병력들의 승선을 중단시켰다. 남은 병력은 결국 북한군의 포로가 되는 운명을 맞이하였다. 일부는 훗날 탈출했다고 하지만, 전우를 버려두고 가야했던 학도병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9월 21일 명부대는 장사에 남겨진 이들과 함께 하지 못한 슬픔을 가진 채 부산항으로 복귀한다.
8일 동안 적을 270명 사살했고, 우리군은 139명이 전사했고 92명이 부상당했다고 한다. 평상시에는 8일은 매우 짧은 시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10대 후반 훈련을 겨우 2주 받은 학생들에게는 하루가 1년 같았을 것이다. 게다가 정식으로 입대명령과 군번을 전달받은 것은 서울을 수복하고 10월 초가 다 되어서였다. 전쟁이 끝나고 더글라스 맥아더는 1960년 10월 31일 이종훈으로 개명한 이명흠 유족동지회 회장에게 장사상륙작전 때 참여한 학도병들의 용맹함과 희생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귀감이 될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다. 인천상륙작전과는 별개로 이뤄졌지만 입대명령도 받지 않은 장사상륙작전 학도병들에게 경의를 표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안내판에 장사상륙작전이 인천상륙작전의 양동작전으로 실행되었다고 계속 강조하는데, 전술 상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174호와 어긋난다.)
출구를 나가기 바로 전에는 당시 문산호 선원 신분으로 작전에 참여하다가 전사하신 故 한시택 옹과 故 안수용 옹의 화랑무공훈장이 있다. 2019년 6월 25일 문재인 정부 시절이 되어서야 뒤늦게 무공훈장을 수여한 이유는 이들이 군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들과 함께 싸운 최영섭 예비역 해군 대령이 해군 문서고를 뒤져서 2016년 민간인 선원의 복무기록을 찾아내서 훈장 수여가 가능했다. 총 11명이 전사하여 정부에서 이들에게 훈장을 추서했는데, 안타깝게도 이 두 분의 유족을 찾지 못하여 기념관에 전시한 것. 만약 유족을 아는 분이 있다면 아래 사진에 나온 전화번호로 반드시 연락하시길 바란다.
함선 갑판으로 올라가서 장사해수욕장을 바라보았다. 도시에서 떨어진 곳이라 그런지 바닷물은 깨끗했고 모래는 매우 선명했다. 멀리 보이는 부흥리 마을은 전쟁을 잊었는지 매우 평화로워 보였다. 오늘날 이곳이 평화로운 해수욕장으로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맥아더가 언급했듯이 70년 전 겨우 2주 간 훈련받았던 고등학생들의 용맹과 희생 때문이다. 10대 후반 소년들은 용감히 싸웠지만 전우들의 죽음으로 오랫동안 매우 고통스러운 기억을 간직했을 터. 그들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평화로운 바다와 해수욕장처럼 남북이 화해하여 통일의 길로 가도록 우리 세대가 노력해야 한다. 이들의 아픔을 생각하면 더 이상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