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대게철이다. 대게는 큰(大)게가 아니라 게의 긴 다리가 대나무처럼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대게하면 생각나는 곳은 바로 경북 영덕이다. 제철이라서 그런지 주말 영덕 강구항 대게 직판장은 평소 때보다 북적인다. 제철인 2~3월 대게 살이 가장 토실토실하기에 가족들과 같이 식사하기 좋기 때문이다. 올해 흰색 완장을 찬 영덕산 박달대게도 보이는데, 동해안 대게들 중에서 살이 가장 꽉 차 있기에 마리당 가격이 어마어마하다. 올해는 마리 당 무게에 따라 시세가 약 10만 원에서 15만 원 정도 한다.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게하면 영덕을 떠올릴까? 궁금증을 풀기 위해 강구항으로 향했다.
내가 본 태조 왕건 영덕 대게 이야기의 실제
부산에서 강구항으로 가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가 부산포항고속도로를 탄 후 남포항 나들목 종점까지 가서 흥해읍 방향으로 31번 국도를 이용한다. 그 후 7번 국도를 따라가면 오른쪽 편으로 강구항을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경부고속도로를 탄 후 경주 나들목으로 나간 후 서라벌대로 - 산업로를 따라 직진한 다음 유금 나들목에서 28번 우회국도를 이용한다. 그리고 성곡 나들목까지 가서 7번 국도에서 합류해서 가는 방법이 있다.
영남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젠 전국 각지에서 다 온다. 2016년에 12월 말에 상주에서 영덕으로 가는 고속도로가 완전 개통이 되어서 그렇다. 게다가 포항시에서는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강구역으로 가면 된다. 2022년 말에는 동해선이 완전 개통되어서 KTX이음을 타고 부산, 울산뿐만 아니라 강원도 동해안 시군에서도 쉽게 갈 수 있다.
강구항은 영덕 오십천 하류에 있다. 그래서 7번 국도에서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북쪽을 기준으로 아래로는 왕복 2차로로 이뤄진 옛 강구교, 위로는 영덕대게로가 시작하는 강구대교가 있다. 강구대교 입구를 보면 대게 장식물 아래 ‘강구항 영덕대게거리 - 한국관광의 별’이라고 적혀있다. 2015년 한국관광의 별로 선정된 것을 기념한 것이다. 밤에는 강구대교에서 경관조명을 밝힌다.
대게길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명품대게, 대게도매직판장 등이 보인데 몇몇 집들은 지상파 TV에서도 소개해서 그런지 규모도 다른 대게식당들보다는 좀 더 커 보였다. 이 집들을 지나면 강구수협 중앙출장소가 나오는데, 좀 더 가면 홍게, 대게, 박달대게 등을 파는 노점상들과 동광어시장이 있다. 아무래도 대게 고수들만이 여기서 흥정할 수 있지 않을까? 노점상 바로 옆에는 고깃배들이 가득한데, 여기가 바로 강구항의 매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강구항 들어가는 길
강구항 대게거리
강구항은 옛날부터 대게로 유명했던 곳이었을까? 영덕대게축제 홈페이지에서는 권근의 <양촌집>에 서기 930년(931년으로 말하기도 한다) 태조 왕건이 안동에서 견훤을 무찔렀는데 이때 영해 박 씨들이 토호세력으로 전투를 도왔다고 한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왕건이 영덕을 들러서 오늘날 축산면 경정리 차유마을에서 영덕대게를 처음 먹었다고 올려놓았다. 기록이 사실인지 <양촌집>에서 원문 내용을 한국종합고전데이터베이스에서 ‘태조 왕건’, ‘대게’, ‘영덕’, '영해 박씨' 등의 키워드로 검색했는데, 관련 내용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다수 언론에서도 왕건 이야기를 위에 나온 그대로 적었는데 아무래도 <양촌집>의 분량이 무려 40권이어서 검증과정을 생략한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영덕에 대한 기록을 몇 가지 찾긴 했는데, 왜구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영해에 방어시설을 구축했다고 기록한 제11권 ‘영해부 서문루기’와 역시 왜구 침입을 대비하고 영덕을 정비한 공이 있는 이군 인실(李君仁實)에 대해 기록한 ‘영덕 객사기’가 눈에 띄었다. 하지만 이 두 기록에도 태조 왕건과 영덕 대게에 대한 내용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그럼 왜 이런 이야기가 퍼지게 되었을까? 태조가 즉위한 지 13년(930)에 왕건이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고창군(오늘날 안동시) 병산에 진을 쳐서 석산에 진을 친 후백제의 견훤과 맞붙는다. 전투의 결과는 왕건의 대승. 시랑 김악을 사로잡고 후백제의 전사자가 무려 8,000명이었는데, 오늘날 역사 선생님들은 이를 ‘고창전투’라고 부른다. 3년 전 왕건이 죽을 뻔했던 공산전투(오늘날 대구광역시 일대)의 치욕을 되갚아준 셈이다. 전투에서 승리 후 며칠 안 되어 신라 동부 해변의 고을들이 대거 투항했는데 이는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큰 기반이 된다.
지금까지 내가 말한 것은 <고려사>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럼 영덕에 머물렀다는 내용은 어디서 나온 걸까? 조선 중종 25년(1530)에 발행한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4권 영해도호부 남면현(오늘날 영덕읍 화수리 자부터고개로 추정)에 이런 기록이 있다. “고려 태조가 남쪽으로 정벌하며 오다가 이 재에 이르러 말 위에서 곤하게 자는데, 황 씨 성을 가진 한 아전이 술을 올렸다. 태조가 잠에서 깨어 마신 후 그 아전을 수혈(愁歇:근심이 그친다는 의미)이라고 명명했고, 그 산을 면현이라고 하였다(諺傳高麗太祖南征至此峴,馬上困睡,有一吏姓黃者進酒. 太祖睡覺乃飮, 名其吏曰愁歇,其山曰眠峴.).”
그럼 <고려사> 태조 13년 기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 두 자료를 잘 살펴보자. 먼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려 태조가 남쪽으로 정벌하며 오다"라는 내용을 보면 아무래도 <고려사>에서 말하는 고창전투와 인근고을들의 투항을 말하는 것 같다. 그 다음에는 태조가 항복한 지역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민심을 수습하지 않았을까? 영덕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몸이 녹초가 될 정도로 주민들을 다독였나보다. 태조가 영덕에 방문한 것은 기록을 종합해 볼 때 부정할 수 없다고 본다. 다만 이 기록만으로 태조 왕건이 대게를 확실히 먹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아무래도 관광지 활성화를 위해 무리하게 적용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해 질 녘 강구항 풍경
강구항 대게 상인들
시장에 진열된 영덕 대게. 왕건이 영덕에서 대게를 먹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영덕 대게에 대한 기록은 고려 말 목은 이색의 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나오는 영해도호부와 영덕현의 토산물 등에서 볼 수 있다. 참고로 목은 이색은 강구항에서 북쪽으로 25km 떨어진 영해 괴시리 마을에서 태어났다. 오늘날 그의 고향인 영덕군 영해면에는 목은의 외가 친척들이 살았다. 그래서 그가 개경에 있을 때에도 어릴 적 영덕과 외갓집을 그리워하는 시를 많이 지었다. 목은시고 제28권에 <잔생>이라는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殘生唯口腹 謀食每遭譏
西海靑魚賤 東溟紫蟹稀
慾心寧易滿 支體可長肥
一食萬錢者 勞勞何足□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인데 입과 배만 생각하니
먹을 것만 찾는다는 평을 매양 받을 수밖에
서해의 등 푸른 생선이야 얼마든지 구하지만
동해의 보랏빛 게는 어찌나 맛보기 힘든지
욕심을 어찌 모두 쉽게 채울 수 있으리오
아무거나 잘 먹고 몸만 살지면 그만이지
한 번 먹을 때마다 만전(萬錢)을 소비했던 자도
이마를 찡그렸다 하니 부러울 게 뭐 있으랴
ⓒ 한국고전번역원, 이상현 (역), 2003
한 노학자의 먹방시라고 해야 할까나. 영덕과 관련해서는 이 구절이 눈에 띈다. ‘동해의 보랏빛 게는 어찌나 맛보기 힘든지.’ 여기서 보랏빛 게를 한자로 하면 자해(紫蟹)다. 시장 노점상에 가면 붉은색이 뚜렷한 홍게들이 많은데, 아무래도 이를 말하는 것 같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목은의 고향 영해도호부와 영덕현 토산물 중 하나가 자해라고 언급하고 있다. 자신이 생각하는 성리학 원리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조선 왕조 개국을 거부했던 목은 선생이 고향 영덕 게를 그리워한 인간스런 풍모를 나타낸 시라고 해야 할까. 영덕군이 출처가 분명하지 않은 왕건의 일화보다 확실한 자료가 있는 목은 이색의 시로 대게를 소개하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유난히 붉은색을 띠는 게. 이것이 바로 목은 이색이 그리워한 자해(紫蟹)가 아닐까?
강구항이 대한민국 대게의 상징이 된 이유
대게잡이는 영덕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포항과 울진도 영덕과 함께 대게의 주요 산지라고 볼 수가 있다. 울진 후포항에는 울진대게 홍보전시관이 있는데, 이를 보면 영덕군과 울진군 사이에 대게 원조 논쟁이 상당히 치열함을 볼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강원도 울진현 기록에서도 자해가 토산물이라고 나오니까(조선시대 울진은 강원도 소속이었다. 경상북도로 이전된 때는 비교적 최근인 1963년이다). 게다가 오늘날 대게의 어획량은 포항이 영덕을 압도한다. 그것도 전국 대게 생산량의 50%이상을 책임진다. 하지만 왜 포항과 울진보다는 영덕 강구항이 우리나라 대게를 상징하는 곳일까?
먼저 1917년 일제강점기 시절 축항공사로 당시 영덕의 어선이 늘어났다. 이에 따라 어업전진기지로 변하면서 갈대밭을 매립하여 마을을 만들었는데, 포항 구룡포처럼 일본인들이 거주했었다고. 이들은 통조림 공장을 세워서 털게, 왕게와 대게를 함께 가공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영덕이 울진보다 교통이 발전해서 동해안 대게들이 영덕에 모여서 전국으로 배송되었기에 대게의 대명사가 되었다고.
그다음은 영덕 해파랑공원 방파제 주변에서 찾을 수 있다. 바로 1997~1998년 MBC에서 방영된 ‘그대 그리고 나’다. 故 최진실, 박상원, 최불암, 차인표, 송승헌, 박원숙, 김혜자, 심양홍, 양택조 등이 열연한 주말 가족드라마인데, 최고 시청률이 무려 66%까지 올라갔다고. 부잣집의 수경이(故 최진실 역)와 어촌 출신의 동규(박상원 역)의 결혼 이야기와 그 주위를 둘러싼 가족 이야기를 펼쳤는데, 당시 외환 위기로 힘들었던 시민들에게 희망을 준 드라마로 평가받았고 故 최진실에게 연기대상을 안겨주었다.
강구항 해파랑 공원에 전시된 M본부 인기 드라마 <그대 그리고 나> 장면들. 강구항도 드라마의 주요 배경지다.
최불암은 ‘캡틴 박’ 역할로 드라마에서 대게잡이 선장 역할을 했는데, 그가 어선을 타면서 촬영한 곳이 바로 여기 강구항이다. 원래 ‘그대 그리고 나’는 여수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구성하려고 했지만, 여수가 도시로 심히 변해서 영덕 강구항으로 바꿨다고. 이 결정이 강구항을 대게 유명 관광지로 만들 줄은 그때 제작진들은 생각지도 못했을 거다. 드라마가 종영된 지 24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몇 년 전 상주영덕고속도로 개통까지 겹쳐 시간이 지날수록 관광객은 더욱 늘어만 갔다. ‘드라마 촬영지는 유행이 지나면 관광 열풍이 식어버린다.’는 주장을 잠재우는 좋은 사례. 물론 좋은 관광 인프라를 유지하기 위한 영덕 군민들과 지자체의 오랜 노력을 과소평가해서도 안 된다.
영덕 대게의 역사는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오늘날 강구항이 대게일번지의 이미지로 된 것은 최근 일에 가깝다고 판단한다. 왕건과 대게 이야기에 대한 의문과 영덕과 울진의 대게원조논쟁을 떠나, 강구항이 대중들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것은 동해안 대게의 명예를 유지하기 위한 책임감을 짊어지고 있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수산자원 보호를 위해서 해양수산부에서는 2019년부터 대게 금어기를 시행하고 있다. 그 이유는 대게의 최초 산란기가 6월부터 11월까지이기 때문. 암컷대게와 체장 9cm 이하인 대게는 연중 포획을 금지하고 있다. 어민들이 이를 어기지 않고 잘 지켜서 후손들도 강구항에서 대게를 즐길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그래야 목은선생의 한시와 조선시대 고문헌에 기록된 보랏빛 게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으니까.
또한 관광지 바가지 상혼을 막을 수 있는 정책과 이를 실천하는 것도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를 방치하면 관광객들이 비싼 가격에 질려서 발길을 끊게 되기 때문. 홍게, 대게의 품질관리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영덕 대게 전통은 태조 왕건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게 잡이가 계속될 수 있도록 금어기를 지켜야 하는 어민들과 우리 세대의 몫도 있다. 영덕 대게의 역사와 전통은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는 강구항이 되기를 기원하며 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