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서우 Apr 27. 2021

죽서루: 삼척도호부의 공식연회장

600년 역사의 도호부 연회장의 자리 배치는?

眞진株쥬館관 竹듁西셔樓루 五오十십川쳔 나린 믈이

太태白백山산 그림재랄 東동海해로 다마 가니,

팔하리 漢한江강의 木목覓멱의 다히고져.

王왕程뎡이 有유限한하고 風풍景경이 못 슬믜니,

幽유懷회도 하도 할샤, 客객愁수도 둘 듸 업다.

仙션槎사를 띄워 내여 斗두牛우로 向향하살가,

仙션人인을 차자려 丹단穴혈의 머므살가.


보물 제213호 죽서루(竹西樓). 삼척 시내에 있는 관동팔경이다. 독립된 누정이었던 망양정과 월송정과 달리 여기는 삼척도호부 객사 진주관의 부속건물이었다. 바다가 아닌 삼척시내 밑을 따라 흐르는 오십천 절벽 위에 있어서 운치를 더해준다. 기둥과 기와는 600여 년의 세월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래서 정철 관동별곡의 죽서루도 오늘날 내가 보는 것과 같다. 


최근에 삼척시에서 삼척도호부를 복원한다고 한다고 발표했다. 2023년에는 객사, 2025년에는 동헌까지 마무리 한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오늘날 홀로 있는 죽서루는 옛 도호부의 연회장 역할을 다시 되찾게 된다. 앞으로 옛 모습의 위용을 어떻게 찾을지 상당히 기대가 된다.


조선 시절 옛 모습이 남아있는 죽서루를 보기 위해 삼척 시내로 향했다.

     

삼척도호부와 죽서루


죽서루는 삼척 시내에 있다. 동해고속도로를 타고 삼척 나들목으로 나오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좌측으로 꺾자. 쭉 가다보면 옆에 하천이 보이는데, 바로 죽서루와 나란히 하는 오십천이다. 오십천은 삼척시와 태백시 경계인 백병산에서 발원하여 동해안으로 흐르는 하천인데 하천이 상당히 고불고불한 구조로 되어 있다. 그래서 옛 도호부 터에서 상류까지 가려면 천(川)을 47번을 건너야 하는데 이를 대충 헤아려서 ‘오십천’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정철이 태백산에서 발원하는 오십천이 동해로 흘러가는 걸 아쉬워하며, 차라리 한강 목멱(오늘날 서울 남산)으로 대고 싶다는 관동별곡의 구절은 유명하다. 이 구절이 임금을 그리워한다는 마음을 담았다는 옛 국어 선생님의 말씀도 기억이 난다.


오십천로를 계속 따라가면 ‘관동 제1루의 고장 삼척’이라는 현판이 보이는 성곽 다리가 보이는데, 처음에는 관광객을 위한 장식인 줄 알았다. 하지만 죽서루 문화관광해설사님의 말씀으로는 실제 옛 삼척 읍성 성곽을 2018년에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성곽을 따라 보행로를 잘 조성해서 그랬는지 국토교통부에서 2020년 도시재생사업 30선 모범사례로 선정했다고 한다. 성내동 주민들의 좋은 산책로가 되기도 한다고.


삼척시의 시작을 알리는 관문. 삼척읍성 성곽의 일부다.


관문을 지나면 오른쪽 편으로 주차장이 넓게 있다. 주차장 옆으로 옛 담과 전통문이 있는데, 이곳을 들어가면 죽서루를 바로 볼 수 있다. 오늘날 죽서루는 태종 3년(1403)에 삼척 부사였던 김효손이 고쳐지은 것이다. 고쳐 짓고 나서 무려 600년의 역사가 깃든 건물이다. 그런데 죽서루 역시 월송정과 옛 망양정과 마찬가지로 적어도 고려시대 때부터 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선 ‘고쳐지었다’는 말에 주목해보자.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 삼척도호부편에 나오는 죽서루 내용을 보면 김극기라는 사람의 시가 나온다. 김극기? 그래, 태화루에서 이름을 본 기억이 있다. 고려 무신정권 시절 핍박받은 농민의 슬픔을 시로 표현한 사람. 그리고 과거에 합격했지만 중앙에서 활동해던 40대 후반을 제외한 인생 대다수를 전국을 돌아다니며 보낸 방랑시인이다. 고려 의종 때도 활동했다는 기록을 보면 적어도 12세기 후반이니 죽서루의 역사는 최소한으로 잡아도 850년 가까이 된다. 김극기가 죽서루를 보고 남긴 시는 다음과 같다.


道氣全偸靖長官 官餘興味最幽閑

庾樓夕月侵床下 滕閣朝雲起棟間

鶴勢盤迴投遠島 鼇頭屭贔抃層巒

新詩莫怪淸人骨 俯聽驚溪仰看山


도기(道氣)를 장관(長官)이 온전히 차지하였으니 공무 보는 여가에 흥취가 그윽하여라. 

유루(庾樓) 저녁 달은 상(床) 밑에 들고, 등왕각(滕王閣) 아침 구름은 기둥 사이에 인다. 

먼 섬은 빙글빙글 학 형세로 되었고, 층층 멧부리는 오똑오똑 자라머리 같다. 

새로운 시가 뼈까지 서늘하게 함을 괴이하다 말라, 시냇물 소리를 굽어 듣고 산을 쳐다본다.

ⓒ 한국고전번역원, 이익성 (역), 1970


입구 오른쪽을 보면 공사 가림막을 설치했다. 공사명은 ‘삼척 도호부 관아유적(객사) 복원사업’. 객사면 관아를 방문하는 관리나 사신들이 머물던 숙소인데, 조선시대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나무패를 안치하고 초하루와 보름에 달을 보며 임금이 있는 대궐을 향해 절을 올리기도 했다[향망궐배(向望闕拜)]. 반면 삼척에 부임한 도호부사가 근무하는 곳은 동헌(東軒)이라고 하는데, 오늘날 기초지자체장 사무실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보통 우리는 동헌이 등급이 높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지만, 오히려 반대다. 객사는 임금과 중앙정부와 관련되어 있어서 동헌보다 크고 위엄 있게 지었다. 이는 조선이 중앙집중이 심한 관료제로 운영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입구에서 나를 맞이하는 죽서루
삼척도호부 객사 진주관은 2023년에 복원될 예정이다. 관동별곡 구절의 '진주관 객사와 함께하는 죽서루'를 기대해보자.


삼척이라는 도시 지명은 무려 통일신라 경덕왕 때까지 올라간다. 이는 <삼국사기> 지리2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도호부로 승격된 것은 태종 13년(1416)인데 1934년 일제가 훼손할 때까지 관아가 있었다고 한다. 무려 500년이나 된 유구한 건물들을 문화말살정책으로 죽서루만 남기고 다 파괴한 것이다. 우리나라 사대 궁궐뿐만 아니라 지방관아, 읍성 등을 헐어서 자신들의 식민 지배를 강화하려고 한 것이라 분노치 않을 수 없다. 


요즘 문화재청과 지방자치단체들이 옛 관아 터를 발굴하고 설계도를 찾아가면서 어떻게든 복원하려고 노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의 뿌리를 살리는 일이니까. 삼척시에서는 2023년까지 객사를, 2025년까지 동헌과 토성, 석성 등을 복원한다고 하는데 공사가 늦어지더라도 철저히 고증해서 진행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건물이 모두 복원이 되면 죽서루는 정철 관동별곡에 나온 구절 그대로 진주관 객사와 함께하는 연회장으로 우리 곁에 다가온다.


삼척도호부 연회장의 비밀

     

죽서루 정면(방위상 동쪽)에는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 죽서루(竹西樓)라는 화려한 글씨체의 현판이 보인다. 글씨는 숙종 36년(1710) 삼척부사 이성조가 쓴 글씨라고 한다. 현판도 무려 300년이 넘은 셈이다. 누상을 보면 요즘 지어진 망양정과 월송정과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망양정과 월송정은 기둥색이 상당히 붉지만 죽서루는 세월의 역경을 이겨내서 그런지 갈색으로 상당히 바래있다. 그리고 기둥의 뿌리부분을 보면 주춧돌이 없다. 즉 죽서루는 남,북쪽과(입구 정면에서 보면 건물의 좌우다) 강을 바라보는 서쪽의 자연암반에 기초를 맞춘 다음 건물을 세운 것. 이 때문에 각 나무기둥의 높이가 제각각 다르다.


그리고 죽서루 정면은 7칸으로 이뤄져 있는데, 한국 전통건축에서도 상당히 독특하다고 한다. 대다수 학자들은 원래 죽서루는 5칸이었는데 양쪽에 하나씩 부가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한 근거는 원래의 5칸은 주심포 양식으로 되어 있고, 양쪽으로 한 칸씩 증축된 곳에는 익공 양식이어서 그렇다고 한다. 


죽서루 정면. 높이가 각기 다른 나무기둥은 자연암반에 맞춰서 만든 누각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주심포 양식과 익공 양식을 알려면 공포(栱包)라는 개념을 알아야 하는데, 공포란 동아시아 전통목조건축에서 지붕의 무게를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부재(部材:구조물의 뼈대를 이루는데 중요한 요소가 되는 재료)다. 주심포 양식은 기둥머리 위에만 공포가 짜여진 양식인데 주로 조선초기에 많이 사용되었다. 이것이 진화한 것이 익공양식인데 기존 주심포 양식을 간략화하여 새날개처럼 장식했다. 실제로 기존 다섯 칸과 양쪽 두 칸의 양식이 판이하게 다른 건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 중앙대 건축학부 이희봉 교수는 여기에 대해 죽서루는 증축된 게 아니라 원래부터 7칸 건물이었다고 반박했다. 먼저 5칸으로 만들었다고 하면 양쪽 바위에서 사람이 자연스럽게 출입할 수 없다. 실제로 양쪽 각 한 칸을 뺀다고 보면 누정을 출입할 때 사다리가 필요한데 바위를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야 하니 뭔가 자연스럽지 않다. 바위와 누정 사이에 널빤지로 길을 만들었다고 해도 고위 연회장이라고 보기에는 흠이 있다. 두 번째 근거는 조선시대 연회도를 비교분석하면 인물의 계급과 직분에 따라 공간을 점유했다는 것이다.


일단 북쪽과 남쪽 끝의 칸 수가 다르다. 북쪽 끝은 2칸 3기둥, 남쪽 끝은 3칸 4기둥 구조다. 그런데 북쪽 끝 2칸 3기둥이 남쪽으로 다시 한 번 더 반복된다. 이건 무엇을 뜻할까? 마지막 가운데 기둥이 있는 칸에서 두 기둥형 구조로 바뀌는 곳의 천정을 보면 서까래를 가린 우물천정이다. 이는 불교건축에서도 나타나는데 사찰에서는 부처님 공간 상부에만 있다. 즉 두 번째 가운데 기둥 앞은 연회의 주인공이 앉는 최상석이라고 볼 수 있다. 


북쪽 기준 두번째와 세번째 기둥 사이에 있는 우물천정. 여기가 주인공이 앉았던 최상석이 아니었을까?


죽서루 내부.  저 멀리 보이는 가운데 기둥 앞이 바로 주인공석이다. 그 위에 우물천정이 있다.
주인공석에서 바라본 죽서루

조선시대 연회그림에 따르면 최상석 뒤에는 병풍이 있다. 최상석 주인공 기준으로 오른편에는 수청기생이 주인공을 위해 술과 음식을 대접하는 업무를 수행한다. 여기서 수청기생은 변학도가 춘향이에게 자신에게 몸을 바치라고 요구했던 것과는 다르다. 오히려 오늘날 정부 만찬장에서 가장 최상석 서비스를 담당하는 사람에 가까워 긴장의 끈을 놓기 힘들었을 것이다. 왼쪽에는 지방관아 보고 업무나 인신을 맡는 관리인 통인(通引)과 도호부사를 보좌한 무관인 비장(裨將) 등이 앉는다. 아무래도 주인공 옆에서 의전실무를 맡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병풍 뒤에서는 연회에 필요한 음식과 술을 준비하는 일을 맡은 사람들이 있었다. 아무래도 연회를 하는 동안 제일 바쁘게 움직이지 않았을까? 


주인공 앞 양쪽 옆으로는 사대부들이 앉았다. 주인공과 가까울수록 직위가 높았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중앙에는 필요시 무희들이 와서 공연했었고. 남쪽 끝 4기둥과 입구 사이에서는 기생들과 악공들이 음악을 연주했을 것이다. 그 뒤로 고위급 인사의 연회니까 오늘날처럼 연회장 안전을 지키고 출입통제를 했던 문졸(門卒)과 나장(羅將)도 당연히 있을 테고. 재미있게도 죽서루는 개방공간이어서 통제구역 아래로 선비들이 연회광경을 멀리서 구경할 수 있었다. 즉 연회는 도호부의 공식일정으로 이뤄진 것이다. 오늘날로 치면 삼척시장이 지역인사들을 초대해 공식 만찬을 거행하여 지역현안과 건의사항을 듣는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구경하는 선비들은 공식 만찬을 취재하는 수많은 기자들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물론 오늘날 공식 만찬에도 인원을 통제하는 경호원이 있다. 


죽서루 출입구. 이 앞에서 문졸과 나장들이 신분확인을 하지 않았을까?


자연을 중시하여 만든 망양정과 월송정과 달리 죽서루는 조선시대 신분질서에 따라 세심하게 설계한 삼척도호부 공식 연회장이었다. 그래서 이 교수는 원래부터 7칸으로 만들어졌다고 반박한 것이다. 물론 연회 외에도 문인들의 정신수양 공간으로도 사용했는데, 죽서루를 찬사한 수많은 시로 가득한 현판들이 이를 말해준다. 


죽서루 왼쪽에는 용문바위가 있다. 게시판에는 신라 제30대 문무왕이 호국용이 되어 동해바다를 지키다가 어느 날 삼척에 와서 바위를 아름답게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이 전설의 진위는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아무래도 문무대왕 전설을 지역에서 붙여놓지 않았나 싶다. 용문바위 위에 여성 생식기 모양의 성혈암각이 있다고 하는데 안내판에는 천전리 각석처럼 선사시대에 그려진 성혈암각화로 해석했다. 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도교신앙의 일종으로 해석하여 사람의 탄생과 무병장수를 관장한다는 남두육성(南斗六星)별자리로 보기도 한다. 죽음을 관장하는 북두칠성과는 반대다.


죽서루 왼쪽에 있는 용문바위. 바위 윗부분에 암각의 흔적이 있다.


용문바위를 보고 죽서루를 나섰다. 하지만 죽서루를 나서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오십천 건너편에서 죽서루를 바라보는 것. 죽서교를 타고 오십천을 건너면 삼척 시립박물관, 가람영화관, 삼척문화예술회관이 있다. 시립박물관 주차장 뒤로 오십천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는데, 그곳에서 죽서루를 보는 것도 일품이다. 오십천 위 직각으로 깎아지른 절벽 위에 있는 누정의 위용을 제대로 체험할 수 있다. 오늘날 삼척의 랜드마크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왜 옛 조선화가들도 도호부 안에서 보다 오십천 건너편에서 주로 죽서루 그림을 그렸는지 두 눈을 보고 직접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은 맑은 날 겨울이라 죽서루 나무들의 가지가 앙상하지만 봄이 오면 벚꽃이, 여름이 오면 푸른 나무가, 가을에는 단풍이 정취를 더해줄 것 같다. 각기 다른 계절마다 죽서루를 찾아와야 할 것 같다.


또한 2025년 삼척도호부 복원 이후에도 상당히 기대가 된다. 어떻게 보면 삼척의 전통과 뿌리를 다시금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철저한 고증으로 복원을 세심하게 한다면 삼척의 또 다른 관광명소로 거듭날 수도 있다. 그리고 삼척에 있는 학생들에게는 지역의 역사를 알리는 귀중한 교육의 장이 될 수 있다는 교육효과도 있다. 조선시대 진주관 객사와 삼척도호부 동헌 그리고 죽서루가 어떻게 조화를 이룰지가 기대가 된다.


오십천 건너편에서 바라본 죽서루
죽서루에서 바라본 오십천


이전 02화 궁촌의 공양왕과 초곡의 황영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