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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우 Apr 30. 2021

삼척 산간 도계가 걸어온 길

도계탄광 광부들과 너와집 화전민들이 남긴 것

조선시대까지 삼척의 역사는 해안에 있는 삼척도호부가 주된 무대였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태백산맥에 있는 도계읍 산간지역의 역사는 뭔가 소외된 느낌이 든다. 다만 현재까지 전해오는 너와집과 굴피집이 조선 후기 아니면 그 이전부터 이곳에 화전민이 살았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너와집과 굴피집은 우리나라 초가집, 기와집과 달리 지붕을 나무로 꾸몄는데, 강원도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옛 가옥형태라고 한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 때 삼척탄광을 개발하면서 강원도 도계읍의 운명이 바뀌게 된다. 광복을 맞이한 후 60~70년대에 정부가 산업발전에 박차를 가하며 석탄 생산량을 늘리자 도계읍에 광산업이 호황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부를 꿈 꾸고 삼척 도계 산간지역에 오게 되는데, 화전민들의 띄엄띄엄 한 너와집들을 빽빽한 5층 아파트와 블록형 집들로 바꿨다. 그야말로 70년대 ‘한국판 골드러시’가 아닐 수 없다. 석탄의 활발한 운송을 위해 이곳에 다니는 철도인 영동선도 개량되었다.


하지만 ‘한국판 골드러시’는 영원하지 못했다. 1980년에 들어서 석탄 갱도가 점점 깊어져 채굴 비용이 더 늘어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석유파동이 끝나, 정부가 다루기 쉽고 가격이 좀 더 저렴한 석유를 중동에서 수입하기 시작하면서, 강원도 탄광촌은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한 때 5만 명에 달했던 동네는 지금은 1만 명을 지키기도 위태로워졌다.


사람들은 떠나갔지만 도계읍 경제를 살리기 위한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옛 영동선 폐선구간은 하이원추추파크라는 철도 체험형 리조트로 바뀌었다. 옛 흥전역 주변에는 석탄의 찌꺼기를 활용한 유리공예마을이 생겼고, 도계역 주변으로 도시재생사업이 2025년까지 추진된다고 한다. 


석탄산업의 몰락으로 도계읍의 인구가 줄어드는 건 피할 수 없는 운명일 줄도 모른다. 하지만 옛 탄광촌의 역사와 앞날을 바라보기 위해 삼척 산간지역을 가는 것도 좋다고 생각하여, 나는 삼척 도계읍으로 갔다.


옛 지그재그 영동선의 역사를 담은 하이원 추추파크


내가 사는 부산에서 도계읍으로 가는 길은 좀 복잡하다. 먼저 대구부산고속도로-경부고속도로-중앙고속도로를 타고 영주 나들목에서 내린 다음 36번 국도를 타고 간다. 그러다가 봉화군 법전면 인근에서 태백으로 올라가는 31번 국도를 타고 황지자유시장에서 38번 국도를 타고 고갯길을 넘으면 도계읍이 나온다. 수도권에서 출발하는 경우, 중앙고속도로 제천 나들목에서 38번 국도를 쭉 타면 된다.


도계읍으로 들어가기 전 언덕 오른편에 화려하게 생긴 건물이 멀리 보인다. 2014년에 개장한 하이원 추추파크다. 강원랜드와 한국철도시설공단이 공동 출자하여 지은 철도체험형 리조트인데, 옛 영동선 폐선부지를 활용한 관광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영동선은 1940년대 일제가 강원도 석탄을 해안으로 수송하기 위해 태백시 철암동에서 오늘날 동해시 묵호항까지 부설한 것으로 시작한다. 당시 태백과 삼척을 잇는 구간이었던 통리역에서 심포리역의 해발고도 차이는 200m가 넘었다. 


그래서 언덕 위에 설치된 권양기(捲揚機: 원통형 드럼에 와이어로프를 감아 도르래를 이용하여 무거운 물건을 높은 곳으로 끌어당기는 기계)를 설치하여 기차를 끌어당기는 강삭철도를 설치했는데, 경사가 너무 급하여 안전을 담보하지 못해 승객들은 심포리역과 통리 사이를 걸어서 이동했다고 한다. 리조트에서 이를 재현한 인클라인 트레인을 운영했으나 2016년 12월에 긴급 점검으로 중단된 후 재개된다는 소식이 없다. 우리 할아버지 세대들이 저 멀리 급경사로 이뤄진 철도를 따라 도보로 올라갔다는 걸 머릿속으로 그리면 아찔하기 그지 없다.


경사가 심했던 통리역~심포리역 구간의 강삭철도는 철거되어 1963년에 Z자형 지그재그 형태의 철도인 황지 철도로 대체된다. 인클라인 시절에는 2km였지만 지그재그로 바뀌면서 무려 3배 이상인 7.7km로 연장되었다. 게다가 운행구간 사이에 설치된 터널만 무려 12개소라고. 하지만 열차를 대기할 필요가 없어서 옛 강삭철도보다 훨씬 효율성이 높았다고 한다. 옛 지그재그 철도는 리조트에서 레일바이크로 운영하고 있다. 


저 멀리 보이는 단선 철길이 옛 강삭철도를 재현한 인클라인 트레인이다. 아쉽게도 2016년 12월에 운영을 중단했다. 
이제는 추억 속으로 남은 심포리역. 옛 강삭철도와 황지 철도가 끝나는 지점이다.


이후 심포리역부터 도계역까지의 고도도 역시 200m가 넘어서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스위치백 철도를 흥전역과 나한정역 사이에 설치한다. 스위치백은 앞으로 달리는 열차를 다시 후진시켜서 다른 선로로 경로를 바꾸는 것을 말하는데, 열차의 후진을 가능케 하기 위해 스위치백 구간에 진입하기 전에 기관차를 뒤쪽에 달아놓는다. 즉 강릉행 기준으로 옛날에 객차를 탔을 때 심포리역에서 흥전역까지는 바로 가다가 흥전역에서 나한정역에서는 기차가 후진하고, 나한정역에서 도계역에서는 다시 기차가 바로 가는 구조라고 볼 수 있다. 


코레일은 2012년 꽈리굴 형태인 솔안터널을 개통한 후 우리나라의 유일한 스위치백 철도의 열차운행을 종료했다. 대신 리조트에서 매일 오후 1시에 흥전 삭도마을까지 스위치백트레인 16km를 왕복 운행하는 상품을 내놓아 관광객의 눈길을 끌고 있다(토,일,공휴일에는 오전 10시 30분, 오후 3시 30분에도 운영함). 후진하는 열차가 어떤지 객차에서 몸으로 직접 체험할 수 있는데다가 옛 스위치백 역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이원 추추파크에서 인클라인 철도를 아직까지 운영하지 못하는 데다가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불편함이 있어 아쉬운 부분이 있다. 하지만 석탄을 실어 나른 옛 철도의 역사를 리조트 형태로 승화시킨 점에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스위치백 철도를 타는 곳. 또한 통리역에서 출발하는 레일바이크의 종착지이기도 하다.
하이원 추추파크 전경


흥전 삭도마을과 대한석탄공사 도계광업소


하이원 추추파크를 뒤로 하고 내려간 곳은 스위치백 트레인 종점인 흥전 삭도마을이었다. 삭도마을 앞에 지나가는 철도 옆으로 블록을 쌓아서 지은 하얀 집들이 인상 깊었다. 아무래도 탄광촌 시절에 지은 옛 집들로 보이는데 집들마다 벽화가 그려져 있다. 한 광부가 도계라고 써져 있는 금을 캐는 벽화가 내 눈에 확 들어왔다. 하긴 70년대 도계는 탄광업의 절정기를 보여주는 곳이었으니까. 얼마나 광산업이 활기를 띄었기에 마을에 있는 개들아 1만 원 권을 물고 다닐 정도였다고 했을까? 탄광업이 잘 나가던 시절에는 석탄먼지로 가득해서 밖에 빨래를 널을 수 없었다고 한다. 마을 광장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언덕과 광장 트릭아트 전시관의 옛 탄광촌의 모습이 담긴 조형물과 작품들이 이를 잘 말해준다.


마을 반대편에는 도계유리마을이라고 써져 있는 공장들이 보인다. 평일에만 열어서 그런지 오늘은 매우 조용하다. 도계에서 유리를 세공하게 된 이유도 다름이 아닌 석탄 때문이다. 석탄을 캐면 자원으로 쓸 수 없는 폐석들이 있는데 나중에 폐석을 분석한 결과 유리의 주원료가 되는 규사(SiO) 75% 이상 있었다고 한다. 수많은 노력 끝에 석탄 폐석에서 마침내 유리를 생산할 수 있게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석탄 폐석 때문인가 도계유리는 우리가 쓰는 투명한 유리와 달리 푸르거나 까만 것이 많아 독특함을 자아낸다. 그래서인지 강원대학교에 유리공예학과를 신설하고 장인을 육성하여 유리공예의 메카로 만들려는 시의 계획도 있다. 푸른 유리공예품들로 도계의 명성을 계속 이어가길 기원해본다.


기찻길 옆 삭도벽화마을. 초기 탄광촌 집의 형태를 잘 보여준다.
삭도마을 벽화에 그려진 광부. 전성기 때는 도계의 개들도 만 원을 입에 물고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도계유리마을 전경(좌). 도계탄광의 폐석으로 생산하기에 유리가 주로 푸른색과 검은색이다(우).
삭도마을 광장과 언덕의 조형물(좌)과 트릭아트 전시관(우). 삭도마을의 탄광촌 역사와 미래를 잘 보여준다.


삭도마을 옆 죽서루를 향해 흐르는 오십천을 따라 쭉 가면 대한석탄공사 도계광업소가 보인다. 몇 안 남은 강원도 탄광 중 하나다. 예전에는 광부들로 가득했지만 오늘날까지 유지되는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으로 인해 새로운 인원을 이제는 받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옛 70년대의 전성기와 달리 매우 한산한 느낌이다.


도계탄광의 역사는 1914년 조선총독부의 나카무라 신타로가 강원도 남부 산악지대에 탄전이 있다는 지질조사 결과를 발표한 것으로 시작한다. 이후 1920년 중후반기에 지역 정밀조사를 진행한 후, 1936년에 삼척개발주식회사와 삼척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하며 도계읍을 중심으로 한 탄광을 개발하고 추추파크에서 본 강삭철도를 포함한 철도를 오늘날 동해 묵호항까지 깔았다. 이듬해 일제는 당시 중화민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는데(중일전쟁), 일제의 침략야욕을 위해 강원도 석탄을 공출한 아픈 역사가 있다.


광복 후에는 우리나라 정부가 1950년에 대한석탄공사를 설립하여 탄광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특히 1970년대 정부가 중화학공업을 육성하기 시작하면서 이를 지탱하기 위한 에너지 자원이 필요했는데 삼척, 태백, 정선의 석탄생산량을 늘릴 필요가 있었다. 석탄생산량을 늘리자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와 광부생활을 이어 나갔다. 처음에는 삭도마을에서 봤던 블록집으로 마을을 형성하기 시작하다가 이주자들이 늘어나자 3층, 5층 저층아파트를 지어 이들의 주거지를 확보했다. 


대한석탄공사 도계광업소
도계탄광 입구. 광부들이 모두 은퇴하고 채굴을 멈추기까지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


얼마 전 별세하신 채현국 선생이 운영했던 흥국탄광도 삼척 도계에 있었다. 당시 개인소득세 납부액이 전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었다고 하니 도계탄광의 황금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물의를 일으켜 공분을 사는 일부 재벌들과 달리 채 선생님은 자신의 재산으로 광부와 가족들을 무상 치료할 수 있는 병원을 건립했고, 광부들의 자녀들이 다닐 수 있는 학교를 설립했다고 한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의 10월 유신 이후 부패한 권력에 얽힐까 봐 사업을 정리하였는데, 직원들에게 평균 퇴직금의 3배나 되는 액수로 돌려주었다고. 오늘날에도 보기 힘든 모범 사업가여서 그런지 흥국탄광 직원들의 모임이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고 한다. 


1980년대 석유파동이 끝난 이후 안타깝게도 도계탄광의 쇠퇴기가 찾아온다. 석탄 채굴 비용은 점차 심도가 깊은 곳에서 파야 나왔기에 가격이 더 올라갔지만, 중동에서 수입하는 석유의 가격이 더 낮아졌다. 게다가 석유는 석탄보다 에너지 생산 효율이 더 높았다. 이로 인해 정부에서 석탄 산업을 점차로 줄여나가는 정책을 추진하게 되어 광부들이 마을을 떠나기 시작했다. 5만 명의 탄광마을은 이제 만 명 조금 넘게 남아있다. 5명 중 4명이 도계를 떠난 셈이다.


석탄 산업의 종말로 도계읍 인구 감소는 더 이상 막을 수 없는 것 같다. 대신 하이원 추추파크, 도계유리마을과 대이리 동굴지대를 연결하는 삼척 산악관광벨트를 조성하여 관광객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내가 서 있는 대한석탄공사 도계영업소가 문을 닫으면 도계탄광의 역사를 알려주기 위해 흔적을 남겨둬야 한다고 본다. 그래야 우리 아버지 세대의 산업 개척정신을 자손들에게 영원히 알려줄 수 있으니까.


대이리와 신리에서 본 너와집과 굴피집


삼척 산간지역이 탄광으로 개발되기 이전에도 이곳을 지킨 터줏대감들이 있었다. 바로 산지에서 밭농사를 지으며 살아갔던 화전민이다. 안타깝게도 삼척 해안 지방과 비교하면 이곳에 대한 옛 기록은 매우 드문 편이다. 하지만 강원도 산간 지역 전통집은 평지에 주로 있는 초가집과 기와집과 견주어 볼 때 매우 독특하다. 지붕이 나무껍질로 이뤄져 있기 때문인데 어떤 나무로 만들었는가에 따라 너와집과 굴피집으로 나눌 수 있다.


너와집과 굴피집은 탄광촌 가옥과 저층 아파트에 밀려 이제 얼마 남아있지 않은데, 주로 볼 수 있는 곳은 대이리 환선굴 가는 길과 도계읍내에서 상당히 떨어진 신리 등에 있다. 나는 먼저 대이리 환선굴로 갔는데, 이곳에 너와집과 굴피집 모형을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전에 나의 눈길을 끈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주차장 근처에 있는 물레방앗간이다. 아무래도 시나 공원에서 관리해서 그런지 물레방아가 힘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건물 안 곡식을 찧는 공이는 옛 모습을 잃어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사실 이 방앗간은 관광객을 위해 지어진 곳이다. 원래 신동초등학교 대이분교 뒤편에 있었다고 하는데, 오래전에 사라졌다고 한다.


물레방앗간을 보고 화장실 옆에 너와집과 굴피집을 관람할 수 있는 곳이 있다. 물론 모형으로 이뤄졌지만 옛날에 어떻게 화전민들이 살았는지를 잘 보여주기 때문에 관람할 필요가 있다. 너와집은 지붕을 소나무판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소나무판을 사용한 이유는 이곳 주민들이 밭작물을 재배해서 이엉을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지붕이 다른 전통집보다 상당히 길게 늘어진 게 인상 깊다. 굴피집도 구조가 너와집과 비슷한데, 1930년대 너와 채취가 어려워 참나무 껍질로 지붕을 만들었다는 차이가 있다.


삼척 산간 물레방앗간(좌), 너와집(중간)과 굴피집(우)의 모형
너와집과 굴피집의 마루는 집 안쪽에 있다. 마루 왼쪽의 방이 사랑방, 오른쪽 방이 안방이다.
강원도 산간의 외양간은 집 안에 있다. 이는 소를 맹수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다.


너와집과 굴피집 안으로 들어갔는데 두 집 모두 마루가 부엌 옆에 있다. 마루 왼쪽으로 사랑방, 오른쪽으로 안방이 있는데, 방은 남녀 공간이 분리되었지만 마루가 두 방을 연결하고 있다는 것이 다른 전통 기와집과는 차이를 보인다. 무엇보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외양간이 안쪽에 있다는 것이다. 외양간에 소를 키우면 배설물 냄새가 심할 텐데 그래도 왜 안으로 들였을까? 구한말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산에는 호랑이를 비롯한 맹수들이 가득했다. 서울 도성에서도 호랑이를 목격했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니 삼척 산간은 오죽했으랴? 그러니 냄새를 감수해서라도 소를 보호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또한 산간 지방의 추위는 평지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래서 겹집 구조로 지었고 따뜻함을 지키기 위해 사랑방과 안방에 난방과 조명의 역할을 하는 코클을 두었다. 반면 여름에는 그늘이 져서 시원하다. 


환선굴로 가다 보면 개울에 움집처럼 생긴 것이 있다. 움집 앞에는 주차장 물레방앗간에서 본 수로를 볼 수 있는데, 역시 곡식을 찧는 게 아닐까 싶다. 그렇다. 여기는 100년 전부터 내려온 대이리 통방아다. 수로 아래에는 큰 홈이 파인 방아가 있는데, 홈에 물이 다 차면 방아가 뒤로 들린 다음, 물을 비우면서 다시 원위치로 가게 된다. 이때 움집처럼 생긴 방앗간 안에 있는 공이가 위에서 아래로 움직여 곡식을 쳐서 찧는 원리다. 제분기가 들어오면서 우리나라 전통 방앗간들도 너와집과 굴피집처럼 빠르게 사라졌는데, 이제라도 문화재청이 남아있는 옛 방앗간을 서양의 풍차처럼 보존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국가민속문화재 제222호 대이리 통방앗간


통방아 뒤로는 주민이 실제 거주하는 너와집과 굴피집이 있다. 뒤쪽 산등성이 앞에 있는 너와집은 현 소유주의 11대 조가 병자호란 때 이곳으로 피난 와서 지은 집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너와집 중에는 그나마 양호하다고. 하지만 주인 어르신의 사생활을 침해할 수 없어서 거리를 두고 집의 겉모습만 살펴봤다. 주차장 쪽의 너와집 모형을 봐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앞에는 관광객들을 위한 식당이 있는데, 식당 바로 뒤에 굴피집이 숨어 있다. 굴피집 주변으로 철근이 둘러쳐 있는데, 문화재청에서 집을 보수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사모님의 허락을 받아서 굴피집 안을 촬영했는데, 사랑방, 도장, 안방과 마루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외양간이 없어지고, 옛 부엌은 주방기구들로 가득했다. 아무래도 식당 손님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하지 않았는가 싶다.


국가민속문화재 제221호 삼척 대이리 너와집과 제223호 굴피집. 실제 주민이 거주중인데 무려 병자호란 때부터 이어져 오는 유서깊은 집이다.


대이리 굴피집과 너와집을 보고 환선굴을 관람하러 갔다. 성류굴과는 달리 상당히 넓은 공간의 동굴로 이뤄진 대신 종유석, 석순, 석주를 찾기가 힘들다. 왜냐하면 동굴이 성류굴보다 몇 억 년 오래되어서 많이 닳아서 그렇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 주제는 삼척 산간지역 사람들의 생활 역사에 초점을 맞추고자 여기서 끊고자 한다.


너와집과 굴피집을 제대로 체험하려면 근덕면으로 넘어가는 427번 지방도 상에 있는 신리에 가는 것을 추천한다. 이곳에 옛 너와집들이 많이 남아 있어서 그런지 현대 감각에 맞춰 너와집을 조성한 체험마을이 있다. 1박 2일 출연진들이 찾아가서 유명세를 탔다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코로나19가 유행해서 내가 갔을 때는 관광객을 받지 않았다. 상황이 진정되어 너와집에서 자유롭게 숙박을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그리고 머루따기체험과 설피만들기와 같은 생활체험 프로그램도 제공한다고 하니 참고하자. 


삼척 환선굴 입구
신리 너와마을 전경. 코로나19가 진정되면 너와집 체험을 할 수 있다.


국가민속문화재 제33호 삼척 신리 너와집과 민속유물. 왼쪽: 김진호 가옥, 오른쪽: 강봉문 가옥


삼척 산간의 역사는 전쟁을 피해 또는 개인 사정으로 이곳에 이주한 화전민의 역사로 시작한다. 평지처럼 이엉과 기와를 구하기 힘들어서 이들은 산에 있는 소나무와 참나무 껍질로 대체해 너와집과 굴피집이라는 독특한 집을 만들었다. 또한 산꼭대기에서 내려오는 풍부한 수량의 계곡물로 통방아와 물레방아를 지어 곡식을 빻았다. 


그러다가 1970년 도계읍 석탄산업이 번창하며 광부로 일하기 위해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려들기 시작한다. 삭도마을 기찻길 옆에 있는 블록집들과 읍내에 몰려 있는 3~5층 저층아파트들이 이를 잘 말해준다. 영원한 노다지가 될 것 같았던 도계탄광은 석유를 중심으로 한 에너지 정책으로 전환하면서 그리고 이에 따른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으로 인해 서서히 저물어가기 시작했다. 석탄 산업 규모가 워낙 줄어들어서 어쩌면 도계탄광, 광부들이 살았던 블록집들, 저층아파트들 일부가 내가 늙었을 때 굴피집처럼 국가무형문화재나 등록문화재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인구가 탄광 전성기 때보다 1/5로 줄어든 건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도계유리마을을 중심으로 한 유리공예산업의 육성, 신리 굴피집 체험, 탄광마을 재생산업과 추추트레인 파크로 앞으로 옛 추억을 먹고 살아갈 수 있는 관광지가 되리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우리나라 강원도 화전민과 광부들의 역사를 보고 싶으면 삼척 도계로 오는 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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