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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우 May 07. 2021

추암 촛대바위와 해암정

한명회가 극찬한 지상파 애국가 일출 배경의 무대

예전 지상파는 24시간 방송이 아니었다. 지상파의 심야방송 규제가 폐지된 건 2012년이라 그리 오래되진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자정이 넘어갈 때 애국가를 틀어주고 방송종료를 하던 게 아직도 기억난다. 아 아침 6시에 방송을 시작할 때도 틀었다. 동해바다의 기괴한 암석에서 맞이하는 해돋이와 함께.


동해시 추암동에 있는 촛대바위는 지상파 애국가 1절 장면의 단골소재로 유명했다. 특히 해맞이 장소로도 유명해서 새해에는 인파들로 가득하다. 그런데 이곳 촛대바위와 주위의 기암괴석들도 최소한 고려시대 후기부터 명성이 자자했다. 바위 옆에는 500년 가까이 된 옛 건물인 해암정이 세워져 있고, 한명회가 한 때 이곳을 능파대(凌波臺)라고 고쳐 불렀다고 한다.


애국가 명소의 오늘날 모습은 어떠할까? 7번 국도를 타고 추암해변으로 향했다.


추암 촛대바위


동해시에서 7번 국도를 타고 북평나들목을 지나면 추암해수욕장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북평국가산업단지를 거쳐 동해로 계속 가면 다리 위에 있는 기차역이 하나 보이는데 추암역이다. 만약 여러분들이 자녀들을 같이 데리고 왔다면 추암역을 남쪽으로 더 가서 이사부 사자공원을 관람하고 다시 촛대바위로 돌아오는 것도 추천한다. 우산국(오늘날 울릉도)을 정복했을 때 사자목상을 이용한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게다가 삼척의 초기 신라시절 이름인 실직주 군주로도 부임했다.


추암역 철로를 지나는 다리를 건너서 좀 더 가 왼쪽을 보면 옛 건물이 하나 보인다. 바로 북평 해암정(北坪 海岩亭)이다. 해암정은 고려 공민왕 10년(1361)에 심동로가 관직에서 물러나 추암에 살며 정자를 지었는데, 정자 이름을 해암이라고 했다고 한다.


해암정을 짓기 전 그의 일생은 어땠을까? 심동로가 과거시험인 생전과와 병과에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한 것을 보면 유학에 매우 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국왕의 말씀과 명령을 문서화하는 한림원에서 벼슬을 시작했다. 이후 성균관과 중서문하성에서 일하다가 고려시대 조서와 교서를 작성하는 일인 지제고라는 높은 벼슬을 역임한다. 고려 조정에서 글 쓰는 실력이 탁월했음을 인정했다는 걸 보여준다.


공민왕하면 원나라의 간섭을 벗어나기 위해 강력한 개혁을 이끈 왕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원에 등을 업었던 권문세족들의 권력다툼은 여전했. 그래서 여기에 회의를 느껴 고향 삼척으로 돌아갔다고. 공민왕이 여러 번 말렸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래서 공민왕이 ‘노인이 동쪽으로 간다’는 의미로 ‘동로(東老)’라는 이름을 내리고 식읍을 하사하고 진주군에 봉했다고. 말년에는 추암에 해암정을 짓고 죽서루를 오가며 시를 썼다고 한다. 물론 삼척에서 후학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며 훌륭한 인재를 양성하는 데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말년을 의미 있게 마무리했기에 그는 삼척 심씨의 시조가 되었다. (동해시는 1980년에 신설되었다. 신설 전 촛대바위가 있던 곳은 삼척군 북평읍에 속했다.)


해암정 전경
해암정 주변 바위들


아쉽게도 심동로가 지은 고려시대의 해암정은 불에 탔다. 그래서 중종 26년(1531) 강원도 안찰사로 부임한 7세손 심언광이 중건하고, 정조 18년(1794)에 다시 중수되어 오늘날까지 이르렀다. 건물 공포의 구조는 내가 죽서루 양쪽에서 봤던 익공양식이고 팔작지붕으로 이뤄져 있다. 해암정 안에는 우암 송시열이 함경도 덕원(오늘날 원산시)으로 귀양가기 전 남긴 글이 하나 있는데, 초합운심경전사(草合雲深逕轉斜)라는 글을 남겼다. ‘풀은 구름과 어우르고 좁은 길은 비스듬히 돌아 든다’는 의미라고. 송시열은 예전에 내가 장기에서도 만날 수 있었는데, 원래 덕원으로 유배되었다가 장기로 이배된 것이다.


해암정 오른편으로 각양각색의 모습들로 가득한 회색 바위 기둥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해안의 바위들을 따라 계단을 오르면 애국가에서 나오는 촛대 바위를 바로 볼 수 있다. 주변의 동글동글하게 생긴 바위들과 달리 혼자 우뚝 솟아 상당한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겨울바다의 높은 파도소리는 바위에 위엄을 더해준다. 촛대바위 뒤 절벽에는 한자로 크게 능파대(凌波臺)라고 적혀 있다. 여기에 대한 내용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4권 삼척도호부에 나와 있다.


凌波臺。在府東十里。海崖。舊稱秋巖。有石數條立水中,其高可五六丈,其崖上可坐數十人。上黨韓明澮改名凌波臺。


“부 동쪽 10리인 해안에 있으며, 예전에는 추암(秋巖)이라 하였다. 돌 두어 가지(條)가 물 복판에 섰고, 높이는 5, 6길쯤이다. 그 벼랑 위에는 수십 인이 앉을 만한데, 상당 한명회(上黨 韓明澮)가 이름을 능파대라 고쳤다.”


돌 두어 가지가 물 한복판에 섰다는 것은 나뭇가지처럼 생긴 두 돌을 말한다. 즉 한명회가 살던 시절에는 길게 생긴 바위가 원래 2개가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안타깝게도 숙종 7년(1681)년에 강원도가 지진이 나서 부러져 오늘날 촛대바위 하나만 남았다. 한명회는 1459년부터 1461년까지 황해, 평안, 함길, 강원 4도의 체찰사로 파견되었다. 지역단위에 방위체제를 정비하기 위해서다. 체찰사 시절에 추암에서 두 바위를 본 듯한데, 워낙 감동해서 ‘미인의 걸음걸이’를 비유하여 능파대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뭐 요즘은 다시 옛 이름인 추암으로 다시 환원하였지만. 단원 김홍도도 이곳에 와서 그림을 그렸는데 오늘날의 모습과 똑같을 뿐만 아니라 각 바위의 모습을 매우 정밀하게 그렸다. 김홍도의 능파대 그림은 오늘날 금강사군첩에 전하고 있다.


흐린날 겨울바다 촛대바위
다른 쪽에서 바라본 촛대바위
촛대바위 오른쪽 편의 바위들
능파대가 새겨진 바위. 한명회가 이름 붙였다.

촛대바위를 감상하고 내려와 해암정 서편으로 가면 출렁다리로 갈 수 있다. 출렁다리로 가기 전 해암정과 바위들이 너무나 잘 어울린다. 위에서 바라보니 심동로의 탁월한 심미안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날 심동로가 살아있다면 자연주의 건축가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출렁다리는 개통된 지 이제 2년 되었다. LED야간 조명도 설치했다고 하는데 밤에 와서 추암바위들의 전경을 감상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아! 추암역 뒤로 동해러시아 대게마을이 있다. 예전에 내가 대왕암공원에서 제안했던 것처럼 해질녘 촛대바위를 보고 대게나 킹크랩으로 저녁을 먹은 다음 다시 출렁다리로 와 추암바위들의 화장한 모습을 봐도 괜찮겠다. 출렁다리를 건너면 추암의 모든 풍경을 다 볼 수 있다. 또한 출렁다리를 건너서 내려오는 길에 현대작가들의 개성 있는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추암조각공원도 잊지 말자.


2019년 개통된 촛대바위 출렁다리
출렁다리를 건너고 바라본 해암정과 바위들. 심동로의 탁월한 건축감각을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애국가 바위로 부르는 추암 촛대바위는 옛날부터 명성이 자자했었다. 권력 싸움에 질려서 삼척에 내려온 심동로는 촛대바위와 기암괴석들과 잘 어울리는 해암정을 지어서 오늘날까지 아름다운 추암의 광경을 선물해 주었다. 한명회는 절경에 감탄해 능파대라고 고쳐 불렀고, 능파대라는 이름은 그림을 그린 김홍도 시대까지에도 널리 쓰였다. 오늘날은 옛 명칭으로 다시 돌렸고.


만약 내가 다음에 추암을 다시 찾아온다면, 여름 오후와 저녁를 선택하고 싶다. 추암해수욕장 주변에 솔비치 삼척이 있어서 휴양하기 좋기 때문이다. 정오와 해가 질 때까지는 쏠비치와 추암에서 해수욕을 즐기다가 저녁에 시원해지면 야경으로 가득한 촛대바위와 출렁다리를 감상하고 싶다. 물론 해수욕과 야경감상을 하기 전 러시아산 킹크랩을 먹는 것도 생각해봐야겠다.


추암에는 앞으로 또 다른 호재가 있는데 바로 2022년 12월에 삼척역부터 영덕역까지 동해선이 개통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내가 사는 부산에서 추암역을 거쳐 강릉역까지 KTX이음열차가 지나가게 된다. 동대구역에서도 포항을 거쳐 동해선으로 운행이 가능해서 영남 대도시권 사람들이 추암으로 가기가 더 편해진다. KTX이음의 정식 정착역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휴가철만이라도 관광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해줬으면 좋겠다.

동해 러시아 대게마을
추암해수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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