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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우 May 11. 2021

묵호항 논골담길

묵호항 명태를 덕장 꼭대기까지 나른 옛 지게꾼 이야기

묵호항.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동해안의 작은 어촌이었다. 1931년에 항구를 구축하고 나서는 삼척에서 나오는 무연탄을 실어 날랐는데, 1964년 국제항으로 승격하면서 삼척 시멘트, 양양 철광석을 수출하는 산업항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또한 수산업도 상당히 흥했었는데 명태와 오징어잡이로 1970년대까지 전성기를 구가했다


하지만 80년대 명태의 어획량이 급격히 줄고, 강원도 삼척과 태백의 지하자원 산출량이 감소하자 묵호항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높은 언덕에 있는 명태를 말리는 덕장으로 올라가는 지게꾼들도 오늘날에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논골담길에 그들의 행적이 담긴 그림들만이 내가 태어나기 전 묵호항의 풍경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호황과 쇠퇴의 양극단을 오간 묵호항의 역사를 알기 위해 나는 논골담길로 향했다.

     

묵호항 논골담길


묵호항으로 가려면 동해시 해안로를 이용하자. 해안로를 가다보면 묵호역이 보이는데, 철도다리 밑으로 들어가자. 그리고 묵호항 활어판매장이 있는데 거기서 좌회전 하면 논골담길 입구로 갈 수 있다. 만약 차량을 가지고 왔다면 묵호항 수변공원에 주차해서 오는 것을 추천한다.


묵호라는 이름은 강릉 대도호부사 이유응이 하사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당시 묵호는 강릉 대도호부에 속해 있었는데, 1980년 옛 삼척군 북평읍과 함께 동해시에 편입되어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나온 옛 이름은 오진(梧津)인데 여기에 척후를 두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아무래도 옛날에 정찰부대가 있었나 보다. 이유응이 이곳을 시찰할 때 검은 새와 바위가 많은 것을 보고 포구가 상당히 검다고 했는데 촌장은 이런 이유로 여기를 오진이나 오이진(烏耳津)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까마귀 오(烏)라는 한자가 있는 것을 보니 옛 오진에는 까마귀가 가득했나보다. 


그리고 부사가 이웃마을의 이름을 물어보니 촌장은 청주 한씨들이 많이 산다고 발한(發韓)이라고 했다. 묵호역이 있는 동네다. 이 때 부사는 ‘문한(文翰)과 필묵(筆墨)’ 즉 붓과 먹으로 글을 짓고 쓴다는 말을 떠올려, 발한(發韓)을 선비들이 많이 나기를 기원한다는 의미인 발한(發翰)으로, 오진에는 산과 물이 어우러진 곳에서 좋은 글씨를 쓰는데 부족함이 없다는 의미인 ‘묵호(墨湖)’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묵호는 원래 소규모의 어항이었다. 그러다가 1936년 일제가 삼척 도계지역에 탄광을 적극 개발하고 이후 도계~묵호 구간의 철도를 개통하면서, 1941년에 묵호항을 무연탄 적출항으로 지정하고 개항했다. 해방 이후에도 이 기능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1960년대 쌍용양회 시멘트 공장을 영월과 동해에 설립하면서 묵호항은 석탄과 시멘트의 반출항으로서 시설을 확장하게 된다.


논골담길에서 본 묵호항 풍경


묵호항은 어항(漁港)으로서도 명성이 자자했다. 옛날 동해안에 중요했던 어종은 명태와 오징어였다. 해방 이후의 묵호항은 그야말로 명태어업 전진기지였다. 해안길로 벽화를 따라가보면 ‘오징어와 명태는 넘실거리던 ’묵호의 희망‘이었다는 문구가 보인다. 지하자원이 모이는데다가 어업도 잘 나가던 곳이어서 옛날 묵호는 그야말로 사람이 북적였던 동네였다고. 특히 묵호항에 가득했던 명태를 세찬바람이 이는 언덕꼭대기까지 논골담길을 오르고 내리던 지게꾼들이 있었다. 언덕 꼭대기는 명태들을 말리는 덕장들이 많았는데, 지게꾼들이 항구에서 덕장까지 명태들을 한가득 운반했던 것. 그리고 명태를 나르다가 지게에서 흘러내린 바닷물로 길이 질척여서 맑은 날에도 장화를 신어야 했다. 실제 마을 그림과 조형물에도 장화들로 가득하다.


바람의 언덕길로 가면서 여러 타일로 붙여 놓은 아기자기한 그림이 있다. 전문작가가 그린 작품으로 알았는데 아니었다. 12명의 작가 지도 아래 마을 주민들과 등대경로당 어르신 분들이 그린 작품들이다. 명태를 말리는 모습, 오징어와 문어, 묵호등대와 어선들. 옛 묵호항의 추억이 타일에 다 담겨 있다. 타일그림을 지나면 묵호항 전경을 볼 수 있다. 어선들 몇 척과 울릉도로 가는 여객선이 보인다. 아 3년 전에는 평창올림픽 때 방문한 북한 예술단을 실은 만경봉 92호가 묵호항에 정박하기도 했었다. 전망대에는 내가 찾아간 관동팔경과 다르게 현대인들이 쓴 시들로 가득하다. 어머니와 두 아이가 고기를 잡으러 떠나는 아버지를 보고 안전을 기원하는 동상도 인상 깊고.


그 많던 동해의 명태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지게에 명태를 지고 가면 마을 바닥에 바닷물이 흥건하다. 그래서 지게꾼들은 반드시 장화를 신고 일해야 했다. 
옛 묵호항의 추억을 담은 타일들. 12명의 작가 지도 아래 등대경로당 어르신들이 그렸다.


고기 잡으러간 아버지를 기다리는 옛 논골담길 가족들을 담은 동상
논골담길의 아낙네들을 표현한 그림. 그 뒤로 수많은 배 모형이 있다.

묵호항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서 더 올라가면 등대가 하나 보이는데, 1963년에 세워진 묵호등대다. 2003년에는 프리즘렌즈 회전식 대형등명기를 설치했는데 42km 떨어진 곳에서도 등대를 식별할 수 있다고 한다. 1968년도에 인기리에 상영된 정소영 감독의 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의 촬영지이기도 했다. 당시 영화가 대박을 쳐서 4편까지 제작했는데, 3편까지 매년 최대관객을 모았다고. 아무래도 해방 이후에 태어나신 어르신들이 좋아할만한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근처에는 스카이 워크가 하나 보이는데 들어갈 수 없다. ‘동해 도째비골 스카이밸리’라는 이름으로 올해 4월에 개장한다고 하는데 논골담길과 등대와 잘 어울리는 관광지가 될 것 같다.


다시 등대를 뒤로하고 논골담길을 내려가 봤다. 여전히 당대 어민들과 지게꾼들로 그려진 벽화가 가득하다. 그런데 몇몇 벽화는 옛날 묵호항과 발한동의 명소들을 그려놓은 곳도 있다. 나포리 다방과 묵호극장을 그려놓은 벽화를 볼 수 있었다. 나포리 다방은 오늘날 119묵호센터에 자리에 실제로 있었던 음악다방이다. 아무래도 이탈리아의 항구도시 나폴리에서 따온게 아닐까 싶다. 상당히 유명한 찻집이었는데 묵호항이 몰락하면서 사라졌다가 바람의 언덕길에 감성 까페로 다시 나타났다. 


묵호 등대. 옛 영화 '미워도 다시 한번'의 촬영장소이기도 하다.
방문할 당시 개장 준비 중이었던 동해 도째비골 스카이밸리(좌), 묵호등대에서 바라본 바다(우)
나포리 다방을 그린 벽화. 오늘날 119묵호센터에 실제로 있었던 옛 다방이다.

묵호극장도 발한 삼거리에 실제로 있었다. 원래 묵호읍에는 4개의 단관극장이 있었다고 한다. 동호극장, 문화극장(현 태평양수산), 보영극장과 묵호극장. 1960년대 고려목재소 이상출 사장은 문화극장에 건축자재를 납품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게 되는데, 건축주의 자금사정으로 극장을 인수하라는 제안을 받아서 영화업에도 뛰어들게 된다. 동호극장을 제외하고 모두 인수했는데 묵호극장은 안타깝게도 난방용으로 사용하는 톱밥으로 인해 1978년 화재로 전소했다고 한다. 나머지 문화극장과 보영극장은 80년대 후반까지 운영했다고. 극장 뿐만 아니라 묵호항 시내에는 백화점도 있었다고 한다. 이는 80년대까지만 해도 묵호항이 꿈이 가득한 사람들로 북적였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어부, 철도노동자와 지게꾼들의 고된 하루를 달래줄 수 있는 중요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묵호항의 영화(榮華)는 오래가지 못했다. 먼저 계속 된 남획과 기후변화로 인해 명태 어획량이 줄어든 것. 1980년 초 어획량은 15만 톤이었는데, 2008년에는 하나도 잡히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가 먹는 명태는 북태평양에서 잡아 냉동한 것이 대다수다. 그리고 명태는 오늘날에도 국가에서 관리하고 있는 어종이라 우리나라 외교부가 러시아와 협상하여 명태쿼터를 더 많이 따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나마 동해수산연구소에서 2016년 명태완전양식기술을 개발하여 명태 국산화라는 희망을 이어갈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지만, 수지타산이 맞지 않고 해수부가 소극적으로 지원해서 양식을 포기했다고 한다. 생태, 동태, 황태, 북어, 코다리,황태,노가리로 형태에 따라 다양하게 이름을 가진 명태는 동해바다에 언제쯤 돌아올 수 있을까?  


논골담길 언덕에서 바라본 묵호등대마을
옛 묵호극장을 그린 벽화
삼척 도계가 부를 꿈꾸는 광부들로 가득했다면, 묵호항은 명태를 나르는 지게꾼들로 가득했다.

두 번째로는 1980년대 중반 이후 삼척과 태백 탄광 규모가 축소된 것에 있다. 여기도 묵호항에 명태를 나르는 지게꾼이 있었다면, 삼척 도계에는 광부들로 가득했다. 60년대에는 인구가 5만 명에 달했다고. 삼척 도계탄광소는 강원도 석탄 생산량의 32%를 차지했었는데, 70년대 파독광부들의 훈련소역할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얄궂게 삼척 도계 일대도 석탄 수요가 급감하고 채산성이 악화되면서 광부들이 떠나가기 시작했다. 명태잡이와 삼척 탄광의 몰락은 묵호동의 문화시설들이 사라지는 원인이 된 것이다.


몰락했던 묵호 논골담길을 다시 살리는 일은 2010년부터 5년 동안 지속되었다. 묵호의 옛 이야기를 담은 벽화마을을 조성했는데 이게 성공하여 동해시의 관광명소로 자리 잡았다. 묵호등대마을에 성공에 힘입어 동해시에서 2025년까지 345억 원을 투입해 발한지구에 도시재생 뉴딜사업을 시행한다고 한다. 개항문화 발전소, 마도로스의 거리 등을 조성한다고 한다. 코로나19가 종료되고 북한과 관계가 개선된다면 한반도-연해주-훗가이도를 운행하는 동해안 크루즈 순환노선을 만들 수도 있다. 


해방부터 1980년대까지 묵호항은 동해시 산업의 중심이었다. 명태잡이와 삼척 탄광의 몰락으로 급격하게 쇠퇴하다가 논골담길 조성으로 다시금 마을이 살아난 것처럼 보인다. 묵호에 명태들은 다시 찾아올 수 있을까? 그리고 앞으로 발한 재생마을 조성은 옛 묵호항의 명성을 다시금 되찾는 길이 될지? 묵호항이 다시금 부흥되길 기대하며 나는 길을 나섰다.


묵호항의 추억을 담은 옛 사진들
묵호등대마을 옛집 풍경
명태를 잡는 어민을 그린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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