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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우 May 15. 2021

강릉 오죽헌은 이율곡이 소유하지 않았다

조선후기 남녀균분상속에서 장자 우대상속제로 바뀌는 과정

♬십만양병 이율곡 주리 이퇴계 신사임당 오죽헌♬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에 나오는 가사다. 십만양병 이율곡과 신사임당 오죽헌. 신사임당은 1536년 율곡 이이를 강릉 오죽헌에서 낳았다. 그래서 오죽헌을 가면 주로 신사임당-이이 모자에 대한 내용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이 둘은 우리나라 지폐 5,000원과 50,000원의 인물인데, 모자가 국가 화폐에 등장하는 건 세계적으로도 드물다고 한다.


흔히 오죽헌하면 신사임당과 그 뒤를 이은 이이가 소유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오히려 신사임당의 어머니 용인 이 씨가 오죽헌을 이이가 아닌 권처균에게 묘지를 관리하는 조건으로 물려준다. 이후 장자상속제가 정착되면서 오죽헌 고택의 소유권은 줄곧 안동 권 씨였다. 권처균은 신사임당 여동생의 아들이다. 그렇다면 그는 이율곡의 이종사촌이자 신사임당의 조카다. 즉 신사임당은 이율곡을 시어머니 집이 아닌 강릉 친정에서 낳았다. 우리가 조선시대 후기하면 장자상속이 시작되는 시기라고 생각하는데, 사임당이 살던 시절은 아직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사임당과 이율곡의 이야기가 가득한 오죽헌의 또 다른 비밀은 어떤 것이 있을까? 보물 제165호 오죽헌으로 가보자.  


오죽헌과 문성사

     

오죽헌은 강릉의 유명한 석호인 경포대를 들어가기 전 좌측에 있다. 강릉시내에서 주문진 방향으로 율곡로를 따라가다 보면 오른편에 경포 생태저류지가 보인다. 그 반대편 오죽헌이라는 표지판이 크게 보이는데 그곳으로 들어가면 된다. 오죽헌은 관광 동선 상 경포대와 경포해수욕장을 가기 전에 들르면 좋은데, 이는 이이 사후 강릉을 방문하는 조선시대 사대부들에게도 유효했다.


오죽헌에 입장료는 어른 1명 기준 3,000원이다. 입구에는 2009년 세계 최초 모자 화폐 인물이 탄생한 것을 기념한 조형물이 있다. 신사임당이 최초의 화폐 여성 모델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최초로 여성이 나온 모델은 얼마 안 가서 폐기된 한국은행 백환 화폐였는데, 어머니와 아들이 저금통장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화폐를 최초로 발행하기 전 독립운동가 대신 왜 신사임당을 50,000원권 인물로 선정하는지에 대한 엄청난 논란이 있었지만 바뀌지 않은 채로 10년 동안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내가 강릉에 도착하기 하루 전날에 폭설이 엄청나게 왔다. 뉴스에는 폭설로 영동고속도로와 서울양양고속도로에서 갇힌 관광객들이 안절부절못했다는 보도가 쏟아졌다. 오죽헌도 예외는 아니었다. 내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이이 동상이었는데, 주변이 맑은 날의 설국 그 자체다. 이이 동상 뒤에는 신사임당이 그린 조충도를 바탕으로 해 만든 화단이 있는데, 아예 하얗게 뒤덮여 있는 데다가 눈이 많이 쌓여서 들어갈 수도 없다. 가을에 매우 아름답다고 하는데, 10월 무릉계곡 국행수륙재를 본 다음 바로 여기로 다시 와야겠다.


5,000원권의 이율곡과 50,000원권의 신사임당. 모자 모두가 화폐모델이 된 건 세계에서도 드물다.
율곡 이이 동상. 그 뒤에 흰 눈으로 덮인 조충도 화단이 있다.


조충도 화단을 뒤로 오죽헌에 들어가기 전 문이 하나 있다. 현판에 자경문(自警門)이라고 써져 있는데, ‘스스로 경계한다’는 의미이다. 율곡이 20세에 학문의 길에 나서며 쓴 글인 자경문(自警文)에서 유래하며, 1976년 4월에 강릉 임영관 삼문과 같은 모양으로 설립했다고 한다. 자경문이 무엇인지 말하자면 율곡이 어떻게 학문에 임하고 올바른 삶을 살 지에 대한 자신만의 행동강령이 아닐까? 겨우 20세 때 자기의 철학을 드러내서 대단한 인물인건지?


하지만 이이는 겨우 16살에 어머니 사임당을 여의었다. 오늘날 청소년이 자기 부모님을 잃어버리면 어떤 심정일까? 그도 마찬가지여서 삼년상을 어린 나이에 치르는 동안 마음이 너무나 힘들었던 것 같다. 오죽하면 심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삼년상을 치르고 불교에 심취했을까? 하지만 유학을 중심으로 살아왔기에 방황을 끝내고 다시 돌아와 자경문을 쓰고 마음을 가지런히 했다. 오늘날에는 방황을 끝내기 위해 불교에 심취하는 건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숭유억불(崇儒抑佛)의 조선사회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이의 젊은 시절 불교 심취는 인생 내내 정적(政敵)들의 공격소재였다. 하지만 내가 볼 때는 유학과 불교 모두 통달했기에 학자로 대성하지 않았을까는 생각을 해본다.


'스스로 경계한다'는 의미의 자경문. 성리학자 이전 이율곡은 불교에 심취하기도 했다.


자경문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오죽헌을 볼 수 있다. 폭설로 인해 지붕에 눈이 가득 차서 머리를 조심해야 했다. 그럼 오죽헌은 무슨 의미인가? 까마귀(烏), 대나무(竹), 추녀(軒)로 이뤄져 있다. 까마귀처럼 검은 대나무가 집 주변을 둘러싸고 있어서 집을 물려받은 권처균이 자신의 호로 삼았다고 한다. 잠깐 권처균? 오죽헌은 신사임당의 아들 이율곡이 소유한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다. 다만 오죽헌 오른쪽에 신사임당이 이율곡을 낳았다는 몽룡실(夢龍室)이 있고, 그 안에 신사임당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그럼 권처균, 신사임당과 이율곡은 어떤 관계일까? 그리고 왜 집의 소유가 권처균으로 넘어갔을까?


오죽헌은 최치운의 둘째 아들인 최응현이 건립했다. 최응현과 영양 남 씨 사이에는 5명의 아들과 6명의 딸이 있었는데, 용인 이 씨 이사온과 결혼한 둘째 딸이 오죽헌을 상속했다. 이사온과 그의 부인 강릉 최 씨의 자녀는 무남독녀인 용인 이 씨 하나뿐이었다. 용인 이 씨는 평산 신 씨 신명화와 혼인하였는데, 신명화와 용인 이 씨는 신사임당의 부모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용인 이 씨가 어머니 강릉 최 씨의 오죽헌을 상속받는다.


강릉 오죽헌. 오른쪽 방 위 현판에는 '몽룡실'이라고 적혀 있는데, 바로 이율곡이 태어난 곳이다.


신명화와 용인 이 씨 사이에는 딸 5명만 있었다. 신사임당은 둘째 딸이고 이원수와 결혼하게 되는데, 이 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바로 율곡 이이다. 그럼 오죽헌은 누가 이율곡이 상속했을까? 아니다. 바로 안동 권 씨 가문인 권화와 결혼한 넷째 딸 평산 신 씨다. 권화와 평산 신 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바로 권처균이다. 즉 권처균은 이이의 이종사촌인 셈. 권처균 이후에는 장자상속제가 정착되어서 안동 권 씨가 계속 상속받게 된다. 뭔가 좀 복잡한가? 아래 도표를 보자.

오죽헌 상속가계도. 붉은 화살표가 상속이 어떻게 되었는지 잘 말해준다.


더 놀라운 것은 신사임당이 시댁이 아니라 친정집에 와서 율곡 이이를 낳은 것. 게다가 이율곡을 낳고 바로 시댁인 파주로 가지 않고 6년 동안 강릉에 머물렀다. 이는 오늘날에도 상당히 보기 드문 일인데, 조선시대에도 데릴사위제가 여전히 남아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조선시대 하면 흔히 장자상속제가 강화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신사임당과 이율곡의 시대까지도 자녀들에게 남녀를 차별하지 않고 균등하게 상속하는 풍습이 아직 남아 있었다. 역사 선생님들은 오늘날 잔존한 가부장제가 여말선초 때보다도 더 강력하다고 말씀하실 정도다. 그리고 남녀균분상속으로 다시 회귀한 것도 겨우 30여 년 전이다. 오죽헌은 데릴사위제가 서서히 사라져 가는 과정과 장자 우대상속제로 바뀌는 과정을 잘 말해준다. 그리고 조선시대 중기만 해도 여성에게 그렇게 꽉 막혀 있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하지 않나 싶다.


오죽헌은 당시 사회상의 변화뿐만 아니라 건축양식의 변화도 보여준다. 실제로 공포를 죽서루와 비교해서 보면 죽서루 공포 양 끝에 있는 새처럼 생긴 양식과 가깝다. 오죽헌은 경포호에 있는 해운정(1530)과 더불어 익공양식의 시작을 말해주는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여말선초 주심포 양식에서 익공 양식으로 변천하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 건물이다. 또한 괴시리에서 본 ㅁ자형 고택과 달리 한 일(一)자 형으로 되어 있는데, 본살림채가 아니고 별당 건물로 추정하고 있다. 오죽헌 왼쪽 방에서 어린 이율곡이 공부했었다고 한다. 집 주변에는 600년 가까이 된 배롱나무, 율곡송과 율곡매가 있다. 600년이 넘었으면 사임당과 율곡이 이 나무들과 함께했다고도 할 수 있다. 특히 율곡매는 천연기념물 제484호로도 등록되어 있다.


오죽헌 옆에는 문성사가 있다. 원래 여기에는 어제각이 있었는데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 때 서쪽으로 옮기고 율곡 이이의 영정을 모신 문성사를 지었다고. 문성사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이 썼다고 한다. 문성은 율곡 사후 인조가 내린 시호인데, ‘도덕과 학문을 널리 들어 막힘이 없이 통했으며, 백성의 안정된 삶을 위하여 정사의 근본을 세웠다’는 의미라고 한다. 문성사 이이의 영정과 몽룡실 신사임당의 영정은 이당 김은호가 그렸는데, 고종과 순종의 어진을 그린 마지막 어진화사(御眞畵師)다.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국방헌금 조달과 황군 원호’를 위해 친일부역귀족과 친일여성계가 주축을 이룬 애국금차회의 일화를 다룬 금차봉납도를 그렸다. 태평양전쟁 때도 조선미술과협회 일본화부에 참여하여 친일 미술작품을 심사했다고. 이로 인해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자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작년 12월 김은호가 그린 남원 춘향 사당의 영정이 논란 끝에 철거되었는데, 오죽헌에 있는 두 영정도 마찬가지로 철거된 후 새로운 것으로 바뀌지 않을까 싶다.


신사임당이 이율곡을 낳은 몽룡실. 영정을 그린 이당 김은호는 친일파였다. 아무래도 새로운 영정이 설치되지 않을까?
율곡 이이의 영정을 모신 문성사
따뜻한 날을 기다리는 배롱나무. 무려 600년의 세월을 견뎠다.
역시 봄을 기다리고 있는 강릉 오죽헌 율곡매. 천연기념물 제484호다.


안채, 바깥채와 어제각

     

오죽헌과 문성사를 뒤로 하고 옆에 있는 큰 집으로 갔다. 바로 오죽헌의 안채와 바깥채다. 안내판 내용을 보면 박정희 정권이 1975년에 정화사업을 하면서 바깥채와 별당을 빼고 다 철거했다고 한다. 그리고 안채를 1996년 복원사업 때 ㄱ자형으로 겨우 복구했다고. 뭔가 꺼림칙하다. 여기도 석굴암처럼 대통령 마음대로 복원되었던 것이 아닌지? 그렇다. 안채 뿐만 아니라 200년 동안 안동 권 씨의 작은 종잣집이었던 청풍각도 헐렸다(당시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0호). 게다가 내가 봤던 문성사와 자경문도 콘크리트로 새롭게 만들었다고. 왠지 이런 생각도 들었다. 유신정권 때 자신의 독재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오죽헌 정화사업이랍시고 옛 건물들을 유린한 것이 아닐까? 오죽헌도 석굴암과 마찬가지로 전문가 조언을 무시하고 정치권력 마음대로 문화재 관리를 하면 어떻게 되는지 말해주는 또 하나의 예시다.


오죽헌 안채. 1996년에 ㄱ자로 복구하였다.
오죽헌 바깥채


안채와 바깥채를 지나면 운한문을 지나게 되는데 정조 12년(1788) 어제각과 함께 지금의 문성사 자리에 건립되었다가 1987년에 옮겨와 복원되었다고 한다. 1970년대 지은 자경문과 달리 세월의 흔적을 빛이 어느 정도 바래 있는 나무기둥에서 볼 수 있다. 어제각을 지은 이유는 다음과 같다. 율곡 사후 약 200여 년 후 정조 임금이 오죽헌에서 보관했던 이율곡의 벼루와 격몽요결을 가지고 오게 하여 친히 본 후, 벼루 뒷면에 율곡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글을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격몽요결에는 머리글을 지어 붙여 벼루와 격몽요결을 잘 보관하라고 하여 다시 오죽헌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후 강원도 관찰사 김재찬이 이를 보관하기 위해서 지은 건물이 어제각이다. 벼루 뒷면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


涵婺池 象孔石 普厥施 龍歸洞 雲潑墨 文在玆


“무원 주자의 못에 적셔 내어 공자의 도를 본받아 널리 베풂이여. 율곡은 동천으로 돌아갔건만 구름은 먹에 뿌려 학문은 여기 남아있구려.”


일단 무원은 성리학을 창시한 남송 유학자 주희의 고향이다. 그렇다면 첫 세 구절은 주희가 고향 무원의 연못물로 먹을 갈고 성리학을 세상에 펼쳤다는 내용임을 알 수 있다. 마지막 세 구절이 이율곡에게 경이를 표한 시구인데, 동천으로 돌아갔다? 한자를 보면 용이 굴로 들어갔다고 직역할 수 있는데, 이는 율곡이 이미 세상을 떠났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가 남긴 학문 업적은 오늘날까지 남아있다고. 나도 고등학교 도덕 시간에 이황의 주리론과 이이의 주기론에 대해 반복해서 들은 적이 있다. 두 이론 모두 조선시대 성리학 이론을 이해할 때 매우 중요한 내용이라 오늘날 수능에도 이 두 가지를 비교하는 문제가 단골로 출제된다. 이젠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주기론(主氣論)은 정신적 요소인 이(理)보다 물질적 요소인 기(氣)를 중요시했다는 내용만 기억한다. 즉 도덕을 가르치기보다는 현실 문제를 개혁하는 것을 더 우선시한 것이다. 서양철학에서 마르크스가 말했던 유물론과 비슷한 느낌이 들어서 나중에 기회되면 이율곡의 저서를 한 번 읽어봐야겠다.


어제각 들어가기 전의 문인 운한문. 새로 지은 자경문과 달리 기둥이 색이 바래있다.
어제각
정조의 어제시가 적힌 벼루(좌)와 격몽요결(우)


어제각을 나서고 오죽헌을 나와 아랫 건물로 내려가면 율곡기념관을 볼 수 있다. 입구를 보면 신사임당의 어머니인 용인 이 씨가 사위들에게 어떻게 재산을 분배했는지 잘 나와 있다. 조선 중기에도 딸들에게 재산이 공평하게 분배되었음을 잘 알 수 있다. 반대편에는 신사임당의 작품으로 추정하는 조충도가 있는데, 실제 신사임당이 그렸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이율곡의 누나인 이매창이 그렸다는 묵매도와 남동생 이우가 그렸다는 국화도를 보는 것도 잊지 말자. 강릉의 옛 풍속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옆에 있는 건물인 강릉민속전시관에도 가보자.


이번 오죽헌 방문은 두 번째다. 지난번에 이곳을 찾아왔을 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관광객의 모습으로 왔다. 이번에 오죽헌의 역사를 좀 더 깊이 살펴보고 왔는데, 신사임당이 살던 당시 다수 여성의 이름들은 족보에 전해지지 않지만 적어도 재산을 균등하게 상속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친정에 가서 아이를 낳은 일도 매우 흔했다. 장자상속과 가부장제가 강화되기 전 조선사회를 알 수 있는 곳이 바로 오죽헌임을 알 수 있다. 전통건축의 공포를 공부할 때도 주심포 양식에서 익공 양식으로 변화하는 것을 잘 보여주는 건물로도 인정받는다. 이러한 가치가 있기에 오죽헌은 보물 제165호다. 다만 1975년 정화사업을 실시할 때 오죽헌 본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다는 것과 친일 화가의 영정은 아쉬운 부분으로 남는다.


예전에는 신사임당을 현모양처로 배웠지만, 조선 사회사 연구가 발전하면서 어찌 보면 오늘날보다도 더 파격적인 요소도 많았음을 볼 수 있다. 친정에 가서 율곡을 낳고 6년 동안 있었다. 조충도와 같은 그림들을 실제로 신사임당이 그렸는지에 대한 논란도 있지만 다수 학자들은 사임당의 예술 재능이 상당히 높았음을 인정한다. 율곡 이이도 외가에 대한 좋은 추억이 있어서 외할머니인 용인 이 씨와 어머니에 대한 기록을 직접 남겼다. 어찌 보면 이후의 꽉 막힌 가부장제보다는 좀 더 자유로운 환경에서 성장해서 이율곡이 후대에 칭송받는 철학자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중에 자녀를 얻게 되면 성별을 떠나 신사임당처럼 유연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게 한 번 더 다가온 오죽헌이 말하고 싶은 게 이것이 아닐까 싶다.


오죽헌 그림과 이씨 분재기. 오죽헌이 어떻게 권처균에게 분배되었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조충도. 신사임당이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진위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이이가 직접 쓴 격몽요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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