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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우 May 18. 2021

경포호 유람기

해운정, 초당동 저택, 홍장암과 경포대

경포호(鏡浦湖)는 강릉시를 상징하는 석호인데 호숫물이 거울과 같이 맑아서 이름 지었다고 한다. 예전 한국지리 시간에 석호의 예시로도 자주 문제로 출제되었다. 원래 경포호는 하천 하구부와 만(灣)이었던 곳이었는데, 파랑과 연안류에 의해 해안을 따라 이동하는 모래가 만의 입구를 가려서 호수로 분리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청초호, 영랑호, 경포호의 형성과정에 대한 수능 문제들을 수도 없이 봤던 기억이 난다.


한반도에 얼마 없는 석호답게 오늘날 경포호는 강릉시민들에게 좋은 휴식공간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옛 조상들도 경포호를 즐기기 위해 정자들과 그 주변에 저택을 지어서 오늘날 강릉의 유명한 관광지로 만들었다. 이내번이 부를 쌓아서 만든 으리으리한 저택인 선교장, 최초로 추정되는 익공 양식 건물 해암정, 허균과 허난설헌의 생가, 강원도 안렴사 박신과 강릉기생 홍장의 사랑이야기를 담은 홍장암도 있다. 


오죽헌 답사를 마치고 수많은 사연이 담긴 경포호를 한 바퀴 돌기로 했다. 


수리골 고택과 초당동 고택


오죽헌에서 나와 율곡로에서 좌회전하자. 바로 다음 오른쪽으로 들어가는 도로가 나오는데, 바로 경포호와 경포해수욕장으로 가는 길이다. 10분 정도 걸어가면 가장 먼저 선교장이 보이는데 폭설로 인해 오늘은 들어갈 수 없다. 바로 다음에 있는 매월당 김시습 기념관에 들어갔다. 매월당 김시습하면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의 작가로 또한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강릉이 매월당과 왜 연관이 있는가를 찾아보니까 어머니께서 돌아가실 때 강릉서 시묘살이를 했었다고. 그리고 세종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계유정난이 일어난 후 이에 반발하여 관동지역을 유람한 이유도 있다. 영상관에서는 금오신화가 어떤 내용의 소설인지를 알 수 있고  영상관 밖에 있는 TV에서 매월당집을 읽어볼 수 있다.


매월당 김시습 기념관을 나서면 옛 정자와 고택이 나오는데, 바로 해운정과 수리골 고택이다. 해운정은 중종 25년(1530)에 강원도 관찰사 심언광이 건립한 별당 건축물이라고 한다. 심언광이라. 그렇다. 추암 촛대바위에서 이름을 본 적이 있다. 자신의 시조인 심동로가 창건한 해암정을 중건한 사람이었지. 게다가 해운정, 해암정 글씨를 편액한 사람도 송시열이다. 무엇보다 해운정이 전통건축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이유는 조선 중기 목조건축이 오죽헌과 함께 주심포 양식에서 익공 양식으로 변화하는 형태를 잘 보여준다고 한다. 사방에 벽과 문을 붙이고 바닥에 온돌을 놓은 것을 보면 난방에 상당히 신경을 쓴 것 같다. 그래서 이후 정자나 별당 건축물의 모델이 되었다고 한다.


김시습 기념관 입구에 있는 저포놀이(좌)와 매월당집(우)


해운정. 동해 해암정을 건립한 심동로의 후손인 심언광이 건립했다.


수리골 고택은 해운정 담 너머에 있다. 언제 건립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문이 없는 ㅁ자 가옥형태다. 전문가들은 안채는 약 350~360년, 바깥채는 250~260년 전에 집터를 정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안채는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ㄱ자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바깥채는 전면 사랑방 2칸과 대청이 있고 수직으로 2칸의 온돌방이 붙어있다. 구조는 ㄴ자 구조로 이뤄졌는데 안채의 ㄱ자와 바깥채의 ㄴ자와 합쳐져 밖에서 집 전체를 볼 때는 ㅁ자다. 이전에 내가 갔던 영덕 괴시리 고택의 대다수가 ㅁ자형 구조로 되어 있었는데, 여기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안채의 ㄱ자 구조는 1996년 복원한 오죽헌의 것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나.


해운정과 수리골 고택을 지나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삼거리 정면으로는 경포 가시연습지가 있다. 가시연은 수련과에 속하는 식물로 식물 전체에 가시가 난 것으로 유명한데, 어제 폭설로 인해 생태공원이 겨울왕국이 되어버렸다. 습지의 자연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늦봄과 초여름에 오는 것을 추천하다. 또한 따뜻함이 완연할 때 습지를 걷다 보면 나룻배를 체험할 수 있는 장소도 볼 수 있다.


강릉 수리골 고택


가시연습지를 지나면 이제 경포호가 광활하게 펼쳐진다. 반대편 저 멀리에는 경포대가 있다. 호수가 시작하는 곳에서 홍길동처럼 비슷한 동상이 오른쪽으로 길을 가리키고 있는데, 허균·허난설헌 공원으로 가는 길이다. 공원에는 역시 ㅁ자 형의 수리골 고택과 대응하는 초당동 고택이 있다. 초당동 저택은 조선 초기 문신 허엽이 살고 허난설헌이 태어난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정확하지는 않다고 한다. 오늘날 가옥의 형태는 1912년 초계 정 씨의 후손인 정호경이 가옥을 늘리고 고쳐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래도 후대 사람들은 허엽, 허난설헌, 허균이 살았다고 믿었는지, 바깥채에는 허균의 영정이 안채에는 허난설헌의 영정이 놓여 있다. 


다만 허엽의 가족이 오늘날 강릉 초당동 일대에 산 건 확실해 보인다. 허엽은 바로 허난설헌과 허균의 아버지인데, 오죽헌에서 태어난 이율곡과 정치 대립이 매우 심했다고 한다. 하긴 초기 붕당정치 시절 허엽은 동인이었고 이율곡은 서인이었으니. 허엽이 동인이었던 이유는 이황의 서경덕과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한 영향이 있어서 그렇다. 이황은 이이와 반대로 만물의 근원 법칙인 이(理)가 우주 만물을 구성하는 요소인 기(氣)를 우선한다는 주리론을 주장한 학자여서, 이를 받든 허엽이 이율곡과 학문과 정치에서 대립할 수밖에 없었던 것. 서쪽의 오죽헌과 동쪽의 초당동 고택도 초기 붕당인 서인과 동인에 대응하니 뭔가 묘하다. 허엽의 호는 초당인데, 바닷물을 사용해 두부를 엉기게 만든 초당두부를 고안했다고도 알려져 있다. 초당두부는 오늘날에도 강릉을 대표하는 토속음식이다.


고택 앞에는 허균·허난설헌 기념관이 있다. 율곡 이이와 정치에서 대립했어도 허엽의 집안도 신사임당-이이와 마찬가지로 자유로운 가풍이었다. 딸인 허난설헌이 글을 배우고 시를 남겼을 정도니까.  하지만 결혼 후 엄격한 가풍의 시가와의 갈등과 자식들의 이른 사망으로 인해 시름시름 앓다가 27살에 죽고 말았다. 허난설헌뿐만 아니라 남동생 허균과 형제들도 문장에 모두 뛰어나 사람들은 아버지 허엽을 포함해서 ‘허 씨 5 문장’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워낙 문장이 뛰어나 허균이 <홍길동전>의 저자로 알려지기도 있는데 여기에 대한 이론(異論)도 제기되어서 정확하지는 않다. 허균이 유교, 불교, 도교에 모두 통달했고 문집도 많이 남겼으나 정치에서는 많이 휘둘려서 그런지 역적모의를 했다는 이유로 능지처참을 당하는 형을 받게 된다. 허엽의 집안의 결말은 이렇게 좋지 못했다. 기념관 밖에는 허 씨 남매들이 쓴 기념비와 허난설헌의 동상이 전시되어 있다.


강릉 초당동 고택 바깥채(좌)와 안채(우)
허균(좌)과 허난설헌(우)의 영정


월파정, 경포해수욕장과 홍장암


초당동 저택과 기념관에서 다시 경포호로 돌아갔다. 산책하는 강릉시민들로 가득하다. 호수를 둘러싼 동상들이 상당히 이채로운데 홍길동전의 이야기 조각을 나타낸 것이다. 카리스마 있는 모습의 홍길동으로 시작해서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하는 등장인물들을 재미있게 선보였는데, 2003년 김문기 작가의 작품이라고 한다. 나는 활빈당에게 곤장 맞는 사또와 푸대 속에 갇힌 포도대장이 눈에 띄었다. 백성들을 괴롭히는 포졸들도 상당히 악랄하게 그렸다.


홍길동의 등장인물로 가득한 동상들을 뒤로하고 경포호를 다시 보면 호수 중간에 팔각 정자가 하나 보인다. 월파정이다. 경포호수에 비친 달빛이 물결에 흔들리는 것을 비유하여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1958년 기해년 생 동갑계원 28명이 건립했다고 한다. 그래서 전통 목조 건물이 아닌 콘크리트 건물이라고. 월파정에 있는 바위에는 우암 송시열 선생이 쓰신 조암(鳥巖)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송시열이 지은 이름답게 오늘날 월파정 주위에 새들로 가득하다. 철새인지 텃새인지는 나로서는 모르겠지만 월파정과 조암은 새들에게 너무나 좋은 안식처인 것 같다.


경포호 홍길동전 이야기조각 : 백성을 괴롭히는 포졸(좌), 활빈당에게 곤장 맞는 사또(우)
호수 중앙에 있는 월파정. 1958년에 건립되었다.


월파정을 지나면 경포해수욕장으로 건너가는 길이 보인다. 한국지리에서 말하는 석호의 사주(沙洲)에 해당하는 곳이다. 피서철에 50만 명이나 몰리는 동해안 최대의 해수욕장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도 망양정처럼 성난 고래가 놀란 듯한 겨울 파도 소리가 들린다. 해수욕장을 가다 보면 바위가 둘 보이는데 가까이 있는 작은 것은 오리바위 멀리 있는 큰 것은 십리바위라고 부른다. 파도가 잔잔한 여름철에는 카약과 같은 해양스포츠를 바위 주변에서 즐길 수 있다고 한다. 


경포해수욕장을 구경하고 다시 경포호 산책길을 따라 내려오면 또 다른 동상들이 나온다. 여기도 홍길동전의 조각 작품들처럼 매우 재미있게 잘 꾸며 놓았다. 고려 말 강원도 안렴사 박신과 명기 홍장(紅糚)의 전설을 나타냈다. 그리고 동상 건너편 호수를 보면 조그만 바위들이 있는데 홍장암이라고 부른다. 박신은 강릉기생 홍장을 매우 사랑하였는데, 강릉부사 조운흘이 이를 알고 안렴사를 놀려먹기로 했다고. 오늘날로 치면 강릉시장이 강원도지사를 거하게 놀려주는 행위인데, 조부사가 정신줄을 놓은 걸까? 아니면 조부사는 박신과 직위와 상관없이 상당히 친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일 수도 있고.


어떻게 골려주었냐면 홍장이 조부사와 짜고 어디론가 숨어 버린 다음 조부사가 박신에게 홍장이 갑자기 죽었다고 거짓으로 알렸다. 충격을 받은 박신은 며칠을 몸져누웠다고. 조부사는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박신을 뱃놀이에 초대했는데 그림 배에서 아름다운 여인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조부사는 놀라는 체하면서 선녀의 놀음이라고 하며, 박신에게 같이 그림배로 가보자고 했다. 그림배의 여인은 홍장의 모습과 비슷해 조부사는 홍장의 죽은 넋이 오늘 경포호에 나타난 것 같다고 해서 가까이 가자고 했다. 그림배에 가까이 가보니 미인은 분명 살아있는 홍장이었고 박신이 그제야 조부사에 속았음을 깨달은 것. 고려 말판 ‘몰래카메라’와 다를 바 없는 전설이다. 자기 상관을 거하게 놀렸다는 이야기여서 후대에 누군가가 장난으로 만든 전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정철은 관동별곡 경포대 구절에서 ‘紅홍粧장 古고事사를 헌사타 하리로다’라는 문구를 남겼다. 조선시대 시구에서도 다룰 정도로 상당히 오래된 이야기이다.  


경포해수욕장의 오리바위(아래쪽)와 십리바위(위쪽)
박신과 홍장의 이야기를 그려낸 동상들
박신과 홍장의 재회를 그려낸 동상


방해정과 경포대


홍장암 건너편으로 또 다른 전통건물이 있는데 강릉 방해정이다. 원래 삼국시대의 고찰인 인월사가 있던 터였는데, 철종 10년(1859) 청안 현감과 통천 군수를 지낸 이봉구가 은퇴한 이후 강릉 객사를 헐어버린 뒤 남은 자재를 가져다가 고택 별당의 형태로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부엌, 온돌방과 마루까지 같은 화려한 구조인데, 예전에 봤던 울산 반구대 집청정보다 140여 년 늦게 지어져서 그런지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구조도 진화한 느낌이 든다.


방해정을 거쳐 에디슨과학박물관과 참소리축음기 박물관을 지나면 관동 8경 중 하나인 경포대가 나온다. 오늘날 경포도립공원의 핵심은 성난 파도가 일었던 경포해수욕장이지만, 옛날에는 여기였다. 원래 경포대는 고려 충숙왕 13년(1326) 강원도 안렴사 박숙이 방해정 뒷산 인월사 터에 창건했다고 한다. 인월사 터에 있던 경포대를 본 고려인 중 유명한 사람은 동해안을 방문하면서 수없이 접했던 안축, 김극기, 이곡 등이다.  


방해정. 철종 때 이봉구가 건립했다. 

그러다가 중종 3년(1508)에 강릉부사 한급에 의해 오늘날 자리로 옮겨 왔다고 한다. 옮겨온 이유는 운이 강한 인물의 묘 기운을 눌러서(명묘압기라고 함) 강릉에서 인재가 배출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가톨릭관동대 임호민 교수가 2011년에 쓴 논문에 흥미로운 내용이 있는데, 한급은 상당히 부패한 관리였다고 한다. 뇌물을 수수한 데다가 관청의 물품을 사적으로 취해 부정한 방법으로 물품을 구입했다는 기록이 실제 남아 있는데, 이런 처사로 지역에서 그를 나쁘게 인식해서 경포대 이전 사유를 명묘압기로 설정해서 오늘날까지 구전으로 온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에 경포대가 중종 19년(1524)에 불탔다는 기록을 근거로 오히려 이때 이전한 것으로 보고 있다.


관동별곡을 쓴 송강 정철이 바로 중종 때 새로 옮긴 경포대를 본 것이다. 그는 관동별곡에서 경포대와 경포호수의 뛰어난 경치를 관동팔경 중에서 제일로 꼽았는데 아쉽게도 그가 봤던 경포대 건물은 순조 14년(1814)에 화재로 소실되고 만다. 그리고 부수 윤명렬이 자비로 새로 지어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규모를 보니 정면과 측면 모두 5칸이고 팔작지붕이다. 


그리고 한 때 외부 인사를 접대하기 위해 온방과 양실을 설치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방문인사들이 박신처럼 뱃놀이를 즐기고 싶은 것에 대응하여 설치한 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인조 6년(1628) 이를 철거했다고 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온방까지 갖춘 경포대 시설이 너무 좋은 나머지 방문객들이 오랫동안 눌러앉아 뱃놀이로 경관을 즐기면서 강릉 주민들에게 상당히 부담을 줬다고 한다. 옛날에도 관광객들이 원주민들의 사생활과 생업을 침해했던 문제가 있었을 줄이야. 오늘날 북촌한옥마을의 원주민들이 관광객 증가로 나타나는 사생활 침해로 어쩔 수 없이 다른 곳으로 이사하는 것과 비슷하다. 또 다른 이유는 당시 강릉 대도호부 객관인 임영관이 화재로 다 타버려 이에 대한 반면교사로 철거했다고 한다. 


강릉경포대 후면(좌)과 전면(우). 기둥이 모두 익공양식이다.
경포대에서 바라본 경포호


경포대 안으로 들어가 호수를 바라봤다. 언덕에 위치해서 그런지 석양의 경포호가 한눈에 잘 들어온다. 안에는 영춘 현감(오늘날 충청북도 단양군)을 역임한 문신인 유한지가 쓴 현판인 제일강산(第一江山)이 있는데, 경포호를 유람하며 상당히 감탄해서 쓴 것 느낌이 들었다. 현판 글씨도 상당히 이채로운데 제일은 흘림체로, 강산은 또박또박하게 써서 대조를 이뤘다.


날이 어두워져 경포대를 나섰다. 나서는 길에 한시로 된 비석들이 가득하다. 그만큼 경포호가 상당히 오랫동안 관광지였음을 잘 나타낸다. 경포호의 역사는 어찌 보면 삼국시대 인월사 시절까지 올라갈 수 있다. 인월사가 있던 시절에는 화랑들이 수련했던 곳이었다. 그리고 경포대가 세워진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는 다른 관동팔경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문인과 화가들이 시들과 그림을 남겼다. 오늘날에는 경포해수욕장에 있는 호텔들과 레저시설이 여름 더위를 식히기 위한 관광객들을 유인하고 있다. 경포호의 관광 역사는 1,000년은 거뜬히 넘어간다. 


무더운 여름철 더위를 날리기 위해 50만 명의 사람들이 경포해수욕장을 방문한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선선하고 한적한 날에 강릉의 옛 자취에 관심이 있다면 오죽헌부터 시작해서 경포호 일대의 옛 고택들과 전통건물들을 감상하는 것도 좋다고 본다. 이율곡, 신사임당, 허균, 허난설헌과 같은 문장가들이 강릉에서 무수히 많이 나왔는데 아무래도 경포호의 자연환경이 이들의 감수성을 높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꽃피는 봄이나 가을에 다시 한번 이곳에 다시 오기를 기대하며 거울처럼 맑은 호수를 나섰다. 


경포대 내 제일강산 현판
경포대 아래를 지나가는 차량들
호수 건너편에서 바라본 경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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