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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우 May 25. 2021

강릉 선교장

염전, 모내기 사업으로 부를 쌓아 강릉 명문 가문이 된 이내번과 후손들

강릉 경포대에서 가장 거대한 옛 상류 저택을 꼽으라면 국가민속문화재 제5호 선교장(船橋莊)이다. 전주 이 씨 이내번과 그 후손들이 대대로 거주한 고택인데, 선교장이라고 이름 지은 이유는 집터가 뱃머리를 연상하게 해서 그렇다. 규모가 무려 9동 102칸이나 되는 저택이라고 하는데 이는 전국에서도 상당히 드물다고 한다.


오죽헌과 비교해도 건물 기능이 상당히 다르다. 오죽헌의 경우 가족의 주거를 위한 공간이어서 규모가 생각보다 작지만, 선교장은 전국에서 오는 손님들과 친족을 받는 접객 기능을 한 건물들이 많았다. 게다가 집안일을 돌보는 하인들이 거주하는 초가집과 부속 공간들이 있었기에 장원이라는 의미의 한자인 莊을 붙였다. 선교장을 방문하는 손님은 무전취식의 혜택도 누렸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이내번 일가의 경제력이 어마어마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내번의 후손들은 어떻게 선교장 규모를 늘려나갈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규모를 늘려나갈 수 있었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옛 고택을 보면서 이내번 일가의 역사를 더듬어보자.


이내번과 선교장

     

원래 나는 경포호를 유람하면서 선교장을 관람하려고 했다. 하지만 폭설로 인해 일시적으로 운영이 중단되어 그다음 날로 미뤘어야 했다. 양양을 답사하고 오후에 돌아오니 다행히 눈이 어느 정도 녹아서 저택에 들어갈 수 있었다. 선교장 입장료는 성인 기준으로 5,000원이다. 코로나19가 진정되면 단체관광객도 받는데 만약 당신의 외국 친구들이(4인 이상) 경포호 전통가옥에서 머물고 싶다고 하면 선교장을 소개해줘도 좋을 것 같다.


표를 끊고 들어가면 바로 오른쪽에 연못과 정자가 있다. 1816년 건립한 활래정이다. 활래정 앞 연못에는 원래 연꽃이 가득한데 아무래도 겨울인지라 누런 갈대들로 가득하다. 연못 중간에는 소나무가 우뚝 서 있는데, 연꽃의 절정기인 7월 하순에 오면 활래정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활래정이라는 이름은 주자의 ‘관서유감’에 나오는 구절인 ‘근원으로부터 끊임없이 내려오는 물(위유원두활수래: 爲有源頭活水來)’에서 따왔다. 말 그대로 서쪽 태장봉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이 연못을 거쳐서 경포호수로 빠져나가는 구조로 되어 있다. 건물은 ㄱ자형 두 개의 팔작지붕으로 이뤄졌는데, 풍수지리에서 볼 때는 지세가 약한 청룡을 보완하기 위해 그렇다고 한다. 이 관점에서 지붕을 보면 연지로 수그러드는 청룡이 다시 고개를 바짝 쳐드는 것처럼 보인다고. 실제로 활래정 뒤에는 야트막한 언덕이 있는데, 언덕이 가라앉다가 지붕으로 다시 솟아오르는 느낌이 든다.


활래정을 지나 좀 더 걸어가면 선교장 본채로 들어가는 솟을대문이 보인다. 대문이 좌우 행랑보다 높은데 그 이유가 가마를 타고 들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솟을대문 현판에는 선교유거(仙橋幽居)라고 쓰여 있는데, '신선이 머무는 그윽한 집'이라는 뜻이다. 좌우로 길게 있는 행랑채는 관동팔경과 경포대를 유랑하는 선비들의 숙소로 사용했다고 하는데, 행랑채 규모를 보면 선교장을 찾아오는 손님들이 어마어마했음을 알 수 있다. 워낙 손님들이 많으니 이 씨 가문은 신선으로 분한 선비들을 대접하느라 여념이 없었을 터.


선교장 입구에서 나를 맞이한 활래정


선교유거 현판으로 나를 맞이하는 솟을 대문. 대문이 좌우행랑보다 높다.


선교장 행랑채 방 내부


이내번과 그의 후손들은 어떻게 큰 저택을 짓고 살 수 있었을까? 이들은 조선 후기 강릉 경제의 중심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내번은 처음에 강릉 견소동 주변(오늘날 강릉 남대천 하구와 안목해변일대)의 염전을 운영하였다. 소금은 국가에서 관리하는 중요한 자원이었기 때문이다. 염전 운영과 소금 판매가 성공했는지 여기서 나온 자금으로 농지를 구입하고 개간을 했는데 모내기법을 도입해서 쌀 생산량을 늘려 큰 부를 쌓는다. 이후 이내번의 증손(정확히는 조카의 손자다. 아들이 없어서 조카 이시춘을 양자로 들였기 때문이다) 이용구와 이의구가 과거에 합격한다. 이용구의 아들들은 서울 중앙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유력한 가문들과 결혼한다. 이를 보면 선조 대에 사업을 일으켜 성공한 다음 그의 후손들이 5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거나 외국 명문대학에서 유학한 후 유력 가문과 결혼하면서 권력을 유지하는 오늘날의 재벌, 대기업과 비슷한 느낌이 든다.


재미있는 건 이내번은 원래 충주출신이다. 이내번의 아버지는 전주 이 씨 효령대군의 10세손인 이주화고, 어머니는 안동 권 씨인데 권시흥의 딸이자 세 번째 부인이다. 안동 권 씨라면 오죽헌의 권처균이 생각나는데 이들과도 관련이 있는 걸까? 그렇다. 권시흥은 바로 권처균의 아버지 권화의 고손자이다. 즉 이율곡의 후손들과 상당히 먼 친척이라 할 수 있다. 이주화는 관직에 나아가지 못해서 재산이 넉넉하지 못했는데, 그가 죽은 후 대부분의 재산이 맏아들에게 상속되었다. 이내번이 다섯 번째 아들이어서 권 씨 부인이 충분한 재산을 상속받지 못하여 자기 고향인 강릉으로 돌아온 것이다. 가족 중에 관직으로 나아간 사람이 없는 데다 이주민 신세인지라 이내번은 이미 옛날부터 텃새 높은 강릉 양반과 유학을 함께 공유할 형편이 못 되었다. 그래서 염전 운영이라는 실리를 선택했고, 양반들이 소유했던 토지들을 사들여서 부를 갖추는 기반을 마련했다.      


솟을대문 바로 앞에 건물 두 채가 보인다. 입구 정면에서 왼쪽으로 보이는 ㄴ자 구조의 가옥은 연지당이다. 연지당 앞마당은 안채로 들이는 곡식이나 금전을 받을 때 사용하였고, 방은 집안 살림을 돕던 여인들의 거처라고. 그 앞에는 한 일(一)자 구조로 되어 있는 서별당이 보이는데, 이 씨 가문의 서고와 공부방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맏며느리에게 이미 살림을 물려준 시어머니의 거처이기도 했고. 연지당은 맞배지붕으로 서별당은 팔작지붕으로 이뤄진 것도 흥미로운데, 누가 사용하는 건물이냐에 따라 지붕으로 등급을 매긴 것 같다. 선교장의 전성시대 때는 시어머니의 지휘 아래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여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집안 살림을 돕던 여인의 거처인 연지당


서별당. 이 씨 가문의 서고이자 공부방이었다. 또한 며느리에게 살림을 물려준 시어머니의 거처이기도 하다.


서별당 오른쪽 편 중문을 지나면 상당히 으리으리한 ㄱ자형 고택이 하나 보인다. 바로 6대손 경농 이근우가 1920년에 건립한 동별당이다. 현재까지도 선교장 장주의 거처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집안의 잔치나 손님맞이에도 사용했다고 하는데, 주인을 중심으로 친척들의 화합을 도모했던 사랑채라고 보면 된다. 괴시리 전통고택들처럼 사랑채 뒤에는 선교장 집안 선조들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 있다. 현판에는 오은고택(鰲隱古宅)이라고 적혀있는데, 이내번의 손자인 오은처사 이후(李厚)를 말한다.  


동별당 왼쪽으로는 ㄷ자형 건물이 하나 있는데, 바로 1748년 이내번이 부를 쌓아 자립한 후 거처를 잡은 안채가옥이다. 즉 선교장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셈. 원래는 괴시리 전통가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ㅁ자형 구조였는데, 이근우가 동남편을 헐고 동별당을 새로 만들어서 ㄷ자형으로 남은 것이다. 안채라는 말대로 이씨가에서 큰 살림을 맡았던 여인들의 거처였다. 그리고 정실부인의 거처인 안방 뒤편으로 ‘고방’이 딸려 있어서 무더운 여름철에 평상을 놓고 고방 위에서 시원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강릉 지방의 특이한 고택 양식 중 하나라고 한다.


동별당. 6대손 경농 이근우가 안채가옥의 일부를 헐고 1920년에 지었다. 선교장 장주의 거처이기도 하다.
동별당 뒤 사당
동별당 옆 안채가옥. 선교장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안채가옥에서 볼 수 있는 방. 방 뒤로 조그만 마루가 보이는데, 바로 더위를 피할 수 있던 고방이다.


다시 서별당으로 돌아와 왼쪽을 보면 ㄱ자형으로 된 조선 후기 화려한 정자와 같이 생긴 건물이 하나 보이는데, 순조 15년(1815)에 이후가 건립한 열화당(悅話堂)이다. 여기도 동별당과 마찬가지로 선교장 주인 남자의 거처였다고 설명되어 있다. 즉 동별당을 설립하기 전 이후와 그의 종손들이 살았던 바깥채로 볼 수 있다. 건물 이름은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나오는 “친척들과 따뜻한 정담에 기뻐한다(悅親戚之情話)”는 구절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원래 열화당에서 일가친척들이 모여 화목을 도모했었는데, 1920년 이후 동별당에 기능을 넘긴 것이다. 오늘날 열화당은 작은 도서관으로 공개되고 있는데, 실제 선교장에 소장된 고문헌은 무려 3,900여 점이라고 한다. 건물 앞에는 동판을 너와처럼 이은 차양(遮陽) 시설이 있는데 러시아 공사관에서 선물로 지어줬다고 한다.


열화당 왼쪽에는 一자형 건물인 중사랑(中舍廊)이 있는데 전국의 학자, 풍류객과 교분을 나눈 곳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행랑채보다는 더 높은 격의 손님이 머물지 않았을까? 열화당 뒤에는 1820년에 후원으로 지어진 초가집 정자인 녹야원이 있다. 자연 속에서 시문을 짓고 책을 읽었을 뿐만 아니라 초가에 살고 있는 소작인들의 애환을 들어줬던 공간이었다고 한다. 신분에 따라 이용하는 건물이 다르긴 하지만, 순조 시절 선교장은 신분과 배경이 다양한 사람으로 시끌벅적 했겠다는 생각이 든다.


열화당. 동판으로 된 차양만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선물로 지어줬다.
전국의 학자와 풍류객과 교분을 나눈 중사랑
열화당 뒤 녹야원


선교장 본채 밖에는 선교장 집사와 하인들이 기거했던 초가들과 창고들이 있다. 중사랑 북쪽으로 평행한 一자 건물은 원래 창고였다가 1908년 동진학교로 설립해서 운영했다고 한다. 구한말 개화파로 영향을 받아 민족주의 교육 사조에 부응하여 선교장 주인인 동별당을 설립했던 이근우와 지역 유지들이 설립하였다. 김구, 이시형 선생이 학교 설립을 돕고, 몽양 여운형이 영어교사로 재직했다고. 안타깝게도 재정난과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1911년 폐교하고 만다. 방문객으로 북적북적했던 선교장의 전성시대는 이로서 막을 내리게 된다.


당시 동진학교에는 2개의 태극기가 있었는데, 광복 후 하나는 임시정부에 기증했고 남은 하나는 선교장에서 보관하고 있다(등록문화재 제648호). 8월 15일 광복절에 선교장에 가면 1897년에 제작된 태극기를 볼 수 있다. 이내번 때부터 쌓아왔던 선교장의 부는 결국 독립자금으로 활용되었다. 옛 동진학교의 왼쪽 건물도 원래 곡식창고로 쓰다가 오늘날 선교장의 생활유물전시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하인들이 기거했던 초가(좌)와 그 옆의 창고(우)
왼쪽 선교장 태극기 홍보 현수막이 걸린 건물이 곳간채다. 구한말에는 일제의 침략에 맞선 민족주의 교육기관인 동진학교로 운영했다. 몽양 여운형이 영어교사로 근무했었다.


선교장도 역시 괴시리 전통마을과 우리나라 명문 양반 고택처럼 유서 깊은 역사가 있다. 먼저 이내번이 염전 사업을 시작하여 부를 쌓은 다음 강릉 주요 토지를 구입하기 시작했다. 농지를 구입한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남부지역에만 한정되어 있던 모내기법을 강릉에도 도입시켜서 스스로 만석꾼이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후손들이 중앙 정계로 진출할 수 있었고, 서울의 유력 가문과 혼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경포호를 구경하기 위해 고택을 방문하는 문인들과 손님들을 융숭하게 대접했다.


그리고 나라가 어려울 때 선교장 주인들은 이를 외면하지 않았다. 선교장 안에 학교를 세워서 민족운동을 고취시켰는데, 여기서 교육받은 사람들이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오늘날 유산 싸움과 마약 복용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재벌 2,3세와는 달리 후손들은 가문의 체통을 잘 유지했다. 오늘날 선교장을 지키는 이강백 관장은 방문하는 관광객들을 위해 정원과 나무를 가꾸고 있다. 선대에 쌓은 부를 후손들이 다시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다시 돌려주고 있는 것이다.      


선교장이 나에게 말해주고 있는 교훈은 재산이 있는 것을 남에게 자랑하지 말고 이내번의 후손들이 행랑채에 머무는 사람들을 대접했던 것처럼 베풀고 살라는 것이다. 요즘 재산이 있는 사람들이 땅 투기를 하고 비싼 집들을 사들여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천민자본주의 풍조와도 대조를 이룬다. 내가 번 돈을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가치 있게 쓸 수 있을지를 고민해봐야 하는 오늘날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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