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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우 Jun 01. 2021

강릉 통일공원 함정전시관

25년 전 강릉지역 무장공비 침투사건을 회고하며

1996년 9월 강원도 강릉시 부근에 북한군 무장공비 26명이 침투한 사건이 있었다. 무장공비들은 상어급 잠수함으로 강릉 해안 일대에 침투한 후 본거지로 복귀하려고 하다가 잠수함이 좌초되어 불가했다. 그래서 이들은 육로로 다시 돌아가려고 했는데, 9월 18일 택시기사 이진규 씨가 좌초한 잠수함을 발견하고 신고하면서 우리 군은 이들을 소탕하기로 했다.


작전은 무려 49일이나 소요되었다. 당시 강원도 강릉 일대는 사실상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강릉 일대는 군용 트럭이 가득했으며 군용 헬기콥터가 끊임없이 병력을 보냈다. 강릉 칠성산 주변 태백산맥 일대는 공비를 소탕하려는 총소리로 가득했다. 침투한 북한군 24명이 사망했고, 1명이 생포되었으며, 1명은 행방불명되었다. 아군 피해도 만만치 않아서 전사 11명, 오발사고 사망 1명, 부상 27명의 인명피해를 입었고, 민간인 4명, 경찰 1명, 예비군 1명이 사망했다. 이 사건으로 우리 군은 해안경비체계와 대잠수함 식별능력을 개선하기 위해 첨단 군함을 확보하게 된다. 


사건이 일어난 지 이제 25년이 지났다. 조금씩 잊혀가고 있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북한 무장공비들이 몰고 왔던 잠수함은 오늘날 강릉 통일공원 함정전시관에 그대로 있다. 이들이 몰고 왔던 상어급 잠수함은 어떤 모습일까? 그리고 북한 당국은 무슨 이유로 이들을 강릉으로 보냈을까?


당시 사건을 다시 한번 복기하기 위해, 강릉 통일공원 함정전시관으로 향했다.

     

DD-916 전북함과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정동진에서 다시 112번을 타고 10분 정도 가면 오른쪽 편으로 916이라는 큰 글씨가 있는 전함과 녹색과 붉은색으로 된 잠수함이 보인다. 2001년 9월에 개관한 통일공원 함정전시관이다. 함정전시관 건너편 언덕에는 강릉 무장공비 침투 희생자 위령탑, 학도 6.25 참전 기념비와 옛 대통령 전용기 등이 전시되어 있는데, 나는 이곳에 전시된 함정에 더 집중하기로 했다. 통일공원 입장료는 성인 1명 기준으로 3,000원이다.


우선 내 앞에 위엄을 보이는 DD-916 전북함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전북함은 원래 미군이 운용했던 기어링급 구축함으로 1945년에 진수되고 취역했다. 원래 이름은 DD-830 USS 에버릿 F. 라슨(Everett F. Larson)호인데, 1942년 과달카날 전투에서 부상당한 동료를 구하려고 강을 헤엄치다가 일본군에 총탄에 맞아 전사한 일병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상당히 성능이 뛰어난 대형 구축함이어서 그런지 태평양과 대서양을 오갔다가 1972년 우리나라 해군으로 인도되어 해군 제2함대 소속으로 운용했다. 당시 기어링급 구축함을 수입한 이유는 한국 해군에서 유일하게 헬기 운용이 가능한 까닭이었다. 우리나라에 인도된 후에도 27년 동안 활동했는데, 1998년부터 취역을 시작한 한국형 구축함에 역할을 넘겨주고 이듬해 12월 퇴역한다.


구축함 안으로 들어가 봤다. 2층에 있는 기관장실과 승조원실을 보니 제2차 세계대전 때 왜 미군이 이 구축함을 두 번째로 많이 건조했는지 이해가 갔다. 당시 기준으로 봤을 때 침실과 편의시설이 상당히 잘 갖춰진 편이었다. 이발실과 취사실, 회의시설도 당대 최고급 구축함답게 잘 정비되어 있고 선박 공간도 효율성 있게 잘 분배되었다. 가장 인상 깊은 게 컴퓨터와 프린터였는데, 90년대 본체를 상징하는 플로피디스크 드라이브의 흔적이 잘 남아 있다. 함장실에는 LG전자의 전신인 옛 금성사 TV도 보이는데, 리모컨 없이 VHF와 UHF를 손으로 돌려야 하는 구조다. 돌돌 마는 형태의 종이를 사용했던 옛 프린터들도 보인다.


DD916 전북함 외부
전북함 침실(좌)과 이발실(우)
취사실(좌)과 함장실의 회의시설(우)
함장실의 옛 컴퓨터와 TV


침실과 편의시설이 있는 2층에서 1층 아래로 내려가면, 1996년 9월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에 대한 자료가 나온다. 중학생이었던 나도 이를 뉴스에서 생생히 본 적이 있다. 먼저 기억나는 일은 택시기사 이진규 씨가 새벽에 잠수함을 발견했다고 파출소에 신고했다는 뉴스였다(9월 18일 새벽 1시 30분경). 그런데 택시기사가 신고하기 전에 68사단 초소의 초병이 잠수함을 최초로 보고했는데, 군 수뇌부에서 이를 믿을 수 없어서 확인 작업만 거듭하다가 초동대응이 상당히 늦어진 것이다.


해가 뜨고 나서 오후 4시 반 경에 경찰 두 명이 무장간첩을 체포했다는 뉴스도 기억난다. 이름은 이광수. 농부 홍성은 씨 부부의 신고로 최우영 경장과 전호구 경장이 무장하고 출동했다고 한다. 이광수는 남편인 농장 주인과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는데, 경찰이 “손 들어”라고 외치자 총을 꺼냈다고. 다행히 최우영 경장이 손을 내리쳐 권총을 떨어뜨려 체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농부 부부의 기지와 두 경찰의 신속한 대응으로 검거할 수 있었는데, 생포당한 이광수의 진술로 무장공비의 인원을 파악하게 되어 무장공비 소탕작전에 돌입하게 된다. 참고로 이광수는 오늘날에도 해군 군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다고 한다. 자신을 체포한 최 경장과 전 경장을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며 오늘날에도 자주 안부를 묻는다고. 비슷한 시각에 68사단 수색대대가 정찰조에 의해 처형당한 공비 시신 11구를 발견한다. 무장공비들이 전투력이 없는 아군들을 죽인 것이나 다름없는데, 식량만 축내고 적에게 잡힐 경우 정보가 노출되어 생존 무장공비들이 위험해지기 때문이었다.


이광수는 침투한 인원이 26명이라고 진술했다. 그렇다면 당시 남아있는 공비들은 14명. 강릉 칠성산 일대는 9월 19일부터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우리 군이 일부 공비들에게 자수할 것을 권유했는데 이들이 권총을 뽑아서 총격을 가해 사살할 수밖에 없었다고. 민간인이 송이버섯을 따러 작전구역에 들어가다가 오인 사살당하는 안타까운 사례도 있었다. 강릉 일대에서의 소탕 작전은 9월 30일까지 계속되었는데, 11명을 사살하고, 3명이 오대산 일대로 도주했다. 이들은 11월 5일까지 끈질기게 버텼는데, 교전에서 희생당한 아군과 민간인의 규모도 어마어마했다. 결국 11월 5일 10시에 특전사 3여단의 장선용 상사가 배후에서 무장공비 정찰조원 2명을 사살해서 상황이 종료된다. 


강릉 무장공비가 침투 장비와 물품들
전북함 기관실


3명이 도주했는데 2명이 사살되었다? 그럼 1명의 무장공비는 어디로 갔을까? 당시 이광수는 전체 인원을 25명이냐 26명인지 혼동하고 있었다. 게다가 행방불명된 자의 유류품과 도주 흔적이 발견되지 않아서, 군에서 25명으로 결론 낸 것이다. 하지만 이후 북한에서 ‘강릉의 자폭 영웅들’이라는 선전 기념물을 공개했는데 우리가 생사여부를 확인하지 못했던 김영일이 사망자로 포함되었다. 사망자면 북한으로 도주하는 데는 실패한 것 같다. 오히려 도주 중 사고로 사망하여 시체를 발견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초동 대응이 늦게 이뤄진 대가는 처참했다. 우리 군은 전사 11명, 오발사고 사망 1명, 부상 27명의 인명피해를 입었고, 민간인 4명, 경찰 1명, 예비군 1명이 사망했다. 강릉은 작전 기간 동안 야간통금조치가 이뤄졌다. 게다가 작전이 이뤄진 때가 추석명절, 송이버섯 제철이자 고기잡이 때라서 강원도 경제가 큰 타격을 입었다. 결국 경계의 실패한 죄로 68동원보병사단 지휘관들이 모조리 징계를 당하고 군복을 벗게 되었으며, 경계를 강화하기 위해 23사단으로 재창설된다.   


살아남은 이광수 씨는 이후 이렇게 회고했다. 그는 9월 21일 군 당국에 협조하기 시작하면서 동료들에게 전향하라고 권고했는데, 동료들이 남한 사회를 모르고 끝까지 저항하는 길을 택하여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또한 당시 우리 군 작전에 참여한 장병들이 세월이 흘러 인터넷으로 체험 수기를 올렸는데, 처음에는 작전이 성공해서 안도감을 느꼈지만 점점 나이가 들면서 우리 군 희생자뿐만 아니라 남한 사정을 잘 몰라 끝까지 죽음을 선택한 북한 공작원들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가장 근본이 되는 문제인 분단의 비극에 있기 때문이다. 권력을 유지하겠다는 이유로 군사도발을 정치목적으로 사용하는 행위는 이제는 더 이상 해서는 안 된다.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전시실을 본 후 갑판으로 올라갔다. 갑판으로 가면 주요 기계실과 조타실을 관찰할 수 있다. 반대편으로 넘어가서 다시 1층으로 내려가면 우리나라 해군의 역사와 해군 정복의 변천과정 그리고 식기류 및 각종 해군용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80~90년대 한국 해군사에 관심 있으시다면 유심히 보시는 걸 추천한다. 모두 다 구경한 후 건너편에 전시되어 있는 무장공비들이 타고 내려온 상어급 잠수함을 보러 갔다.

  

함수부 갑판 함포
조타실


북한 상어급 잠수함


전북함을 나와 잠수함으로 가는 사이에 목선이 하나 있는데, 처음에는 그냥 눈요기로 전시한 조형물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목선도 상당한 의미가 있다. 2009년 9월 27일 밤 함경북도 김책시를 출발한 북한 주민 11명이 동해상 공해를 나흘간 항해한 끝에 10월 1일 강릉 주문진으로 상륙하여 귀순한 사건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북한 경제의 어려운 상황을 여실히 드러내는 목선이라고 할 수 있다.


목선 귀순 사건은 이 외에도 다른 사례들이 많이 있다. 2003년 일가족이 3명이 소형 고기잡이배를 타고 오다가 유자망 그물에 걸려서 우리나라 어선들의 신고로 해경이 구조했던 사건이다. 하지만 해군과 경찰이 어민들이 신고하기 전까지 포착하지 못해서 해안경계의 허점을 드러냈다는 문제도 있었다. 2년 전에도 삼척항에 북한 소형어선이 군에게 제지를 받지 않고 입항해서 정치권에서 국방부에 책임을 묻기도 했다. 철제선과는 달리 군에서 사용하는 레이더는 상당히 작은 규모의 목선을 탐지하기 힘들다고 한다. 아직 어려운 과제지만 이를 보완할 방법은 없을까? 귀순 목선도 식별이 가능하다면 탈북민들의 안전도 보장할 수 있다.  


2009년 북한 주민 11명이 타고 귀순한 목선


목선을 뒤로하고 잠수함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잠수함으로 들어가기 전 안전모는 꼭 착용하자. 성류굴보다도 훨씬 비좁기 때문이다. 함수부 입구를 테이프로 막아놓아 함미부로 들어갔는데, 함미수평타 부분에 큰 충돌 흔적이 있다. 원래 무장공비들이 강릉에 처음 상륙한 때는 9월 15일 오후 8시 경이다. 즉 택시 운전사가 신고하기 3일 전부터 이미 정찰조가 침투했다. 정찰조는 정탐 후 다음날 잠수함으로 복귀하려고 했는데 파도가 세서 해안에 가까이 접근하라고 잠수함 측에 요청했다. 하지만 해안에 접근하는 중 파도에 휩쓸리면서 좌초되어서 육상으로 본국에 귀환하려고 하다가 택시운전사의 신고로 소탕작전에 돌입한 것이다. 좌초된 잠수함은 60도로 기운채로 있었는데, 해군에서 처음으로 에어백을 이용해서 인양하여 48마일이나 끌어 동해안 앞에 가지고 왔다고 한다. 그리고 군에서 조사 후 오늘날 통일공원에 전시되어 공개된 것. 


인양을 통해 북한 상어급 잠수함을 구체적으로 조사하여 해군이 잠수함을 대응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데 큰 성과가 있었다. 하지만 대잠 레이더를 갖춘 오늘날 이렇게 경계를 허술히 하다가는 국방부와 군 수뇌부가 군복을 반납해야 될 뿐만 아니라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요인들이 언론과 청문회에서 전전긍긍해야 하는 위기를 맞이할 수도 있다.


무장공비들이 타고 온 상어급 잠수함
잠수함 함미부. 뒤에 좌초된 흔적이 보인다. 이로 인해 무장공비들이 육로 귀환을 선택했는데 강릉 주민들에게는 악몽 그 자체였다.

잠수함 안으로 들어갔는데, 공간이 상당히 좁았다. 어떻게 26명의 공비들이 이 작은 함대에서 버텼을까는 생각이 들 정도다. 게다가 천정이 상당히 낮아 제자리에 제대로 서있지도 못할 지경이다. 이광수 씨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26명의 공비들은 상륙하기 전까지 음식을 먹지 않고 굶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밥을 먹게 되면 소화를 하게 되어 결국 화장실에 가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는데, 함수부 승조원이 화장실이 있는 함미로 이동하는 경우 잠수함이 1도 기울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수평을 맞추기 위해 전동기가 막 돌아가는데, 전력 소모를 줄이기 위해 그렇게 했다고. 


함미에 있는 기계들도 매우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전부 한글로 적혀 있는데, ‘려자자화’, ‘정격 련속’, 계기판 아래 ‘평양’이라는 글자 등이 북에서 건조한 잠수함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강릉으로 침투하기 전 무장공비들은 배의 성능을 알기 위해 이 잠수함을 타고 일본까지 갔다 오는 훈련을 시행했다고 한다. 속도 시험과 잠수함 내 산소 측정까지 하면서 꼼꼼히 준비했다고 한다. 


잠수함 기계실. 사람이 들어가기 힘들 정도로 기계들이 빽빽하다.
'려자자화'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보인다. 
압력계. 평양이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상륙에 실패했을 때를 대비한 훈련도 한 것 같은데, 선수 가까이 있는 그을린 침실이 이를 잘 말해준다. 정보유출을 막기 위해 불을 지른 다음 육로로 탈출을 시도했던 것. 그리고 이에 덧붙여 비전투원 11명을 사살하여, 탑승 승조원을 11명으로 위장하는 치밀한 계획도 있었다고 한다. 이광수 씨는 침투하기 전 북에서 훈련을 받던 곳과 실제 강릉의 상륙했을 때의 차이가 별로 없었다고 언급했다. 도로에 차가 많이 다닌 것과 밤에 환한 것을 빼고 말이다. 게다가 육로에 상륙해서도 낮밤을 가리지 않고 다니고, 사기가 충천하고 식량도 넉넉했었다는 공비들의 수첩을 보고 우리 군에서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고. 고난의 행군 가운데서도 군사도발 계획은 90년대 중후반까지 치밀했음을 잘 말해주는 내용이다.


잠수함 침투사건은 이걸로 끝나지 않았다. 이후 두 번 있었는데, 하나는 1998년 6월 22일 속초 남동쪽 해상에서 꽁치잡이 어선 선장이 북한 잠수정을 발견해 신고한 사건이다. 이후 제1함대 사령부가 경계태세 1급을 발령하여 대잠헬기와 고속정을 출동시켰다고. 잠수함 내에서 아무 반응이 없어 다음날 잠수정을 동해항으로 예인하고 조사했는데, 이미 승조원 9명이 자폭해 사망했다고 한다. 침투 임무를 수행한 후 북에 복귀하다가 승조원들의 의식이 몽롱해졌는데, 이를 해소하려고 급히 수면으로 올라가다가 어망에 걸렸다고. 일부 승조원 시신에는 구타의 흔적과 총상이 있었는데, 우리 군은 자폭하려는 침투조와 항복하려는 승무원조가 대립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운이 다했다고 생각했던 침투조가 승무원조를 쏴서 죽인 후 자신들의 턱 아래를 쏘아 자결한 것. 당시 노획한 잠수함은 오늘날 창원 잠수함사령부에 전시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1998년 12월 여수시 돌산읍 임포리 앞 초소에서 육군 김 모 이병이 반잠수정을 발견해서 우리 군에 함포사격에 의해 격침된 사건이 있었다. 반잠수정 내에는 북한군 시신 6구를 발견했고, 북한 공작원의 노트에서 종북 조직인 “민족민주혁명당”을 발견해서 조직원들을 적발해 기소했다. 여기에서 노획한 잠수정은 오늘날 여수시 평화테마촌에 전시되어 있다.   


잠수함 침실. 침실 위에는 불에 그을린 흔적이 가득한다. 정보 유출을 막기 위함이다.
함교탑 하부 헷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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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학교를 다녔을 때만 해도 북한 도발과 관련된 뉴스를 수없이 들었다. 물론 오늘날에는 그보다 더 줄었긴 했지만 21세기에 들어서도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사건이라는 비극이 있었다. 물론 이러한 대립을 해소하기 위해 김대중 정부 때부터 남북정상회담을 여러 번 열었지만 오늘날까지도 남북관계는 여전히 불안정하다. 북한에서 유엔 제재를 위반해 미사일을 발사하거나 지난번처럼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하는 사건이 발생하면 정치권과 우리 국민들은 이에 대해 상당히 예민해진다. 


하지만 남북관계가 요동치더라도 화해, 협력, 평화를 시행하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진행해야 한다. 강릉 무장공비 사건과 같은 비극을 막으려면 더더욱. 우리는 그동안 평화통일을 실현하려는 기조를 계속 유지해야 하고 북한 정권은 이제부터라도 더 이상 권력유지를 목적으로 우리와 세계를 향해 도발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강릉 무장공비 사건과 같은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또한 경색된 남북관계가 언젠가 다시 개선돼서 순항하기를 바라며 함정전시관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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