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모래시계의 명성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정동진(正東津). 조선시대 당시, 광화문 기준으로 정동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물론 오늘날 다시 측량한 정동진은 동해시 묵호역에서 조금 북쪽에 있다. 이곳에는 해변에서 가장 가까운 철도역으로 명성이 자자한데, 1994년 S방송국 인기드라마 모래시계에서 윤혜린(고현정 역)이 정동진역에서 기차를 타고 은거지를 옮기려다 경찰에게 체포당한 장면이 나온 후에, 정동진은 그야말로 해돋이와 모래시계 관광지가 되었다. 반짝 유행이라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지만, 오늘날에도 동해선 KTX가 반드시 정차할 정도로 여전히 건재하다.
어떻게 모래시계의 명성을 정동진은 유지할 수 있었을까? 고등학교 시절 방문했던 정동진을 다시 한 번 가봤다.
정동진과 모래시계공원
강릉시내에서 정동진으로 가는 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강릉역에서 열차시간에 맞춰서 누리로를 타는 것이다. 소요시간은 15분이다. 다른 하나는 남대천, 강릉교 버스정류장에서 112번 버스를 타고 가면 되는데, 소요시간은 약 40~50분이다. 나는 강릉역에서 09:36 열차를 타고 정동진으로 향했다.
정동진역은 여전히 해변 바로 옆에 있다. 옛 부산진역에서 정동진역으로 굽이굽이 돌아가는 기차를 타며 교회 고등부 수련회를 오고 22년 만이다. 정동진역이 해변 옆에 있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게다가 작년 동해선 개통 후 KTX까지 들어와서 플랫폼이 1994년 모래시계 드라마가 유행한 때와 달리 상당히 많이 정비되었다. 2022년 12월에는 부산과 대구에서 출발하는 KTX도 정차한다고 하니 더 분주해질 듯하다. 또한 승강장 왼쪽에는 2014년부터 관광객을 대상으로 정동진 레일바이크도 운영하고 있다.
원래 정동진역은 황융산업주식회사가 무연탄 저탄장으로 운영하기 위해 만든 화물취급 중심역이었다. 이후 80년대에 강원도 탄광산업이 쇠퇴하자 정동진역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1994년에 서울의 남자들을 일찍 귀가시켰던 드라마인 모래시계가 인기를 끌면서 정동진역의 운명이 바뀌기 시작했다. 드라마 제8회 후반부에 윤혜린(고현정 역)이 정동진역에서 기차를 타고 은거지를 옮기려다 경찰에게 체포당한 장면이 나온다. 체포당하기 전 기차를 기다리는 윤혜린과 성난파도가 치는 배경이 상당히 대조를 이뤄 시청자들의 이목을 끌었는데, 겨우 1분 남짓한 장면이 오늘날의 정동진을 만들지 누가 알았으랴?
이후 안인리에서 발생한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으로 정동진이 작전지역 반경 안에 들어가 위기를 맞는 듯 했지만, 오히려 뉴스에서 정동진을 많이 언급하는 바람에 관광지의 입지를 굳히게 된다. 어떤 이는 드라마 유행이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여전히 정동진은 오늘날까지 해돋이명소로 사랑받고 있다. 이전에 내가 갔던 강구항처럼 TV드라마로 명성을 오래 이어간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아.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은 다음 이야기에서 언급하겠다.
기차역에서 내리고 정동진 해변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해변으로 따라가는 길 왼쪽으로 레일바이크가 하나하나씩 지나갔는데 코로나19에도 사람들이 많이 타는 것을 보면 인기가 여전한가보다. 해수욕장을 지나면 하천과 바다가 만나는 하구에 공원이 조성된 것을 볼 수 있는데, 2000년 1월에 완공한 정동진 모래시계공원이다. 이전에 내가 왔을 때는 공원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공원에서 가장 먼저 마주친 것은 청동으로 만든 대형 해시계였다. 화살 그림자로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데, 내가 도착했을 때는 그림자가 9와 10 사이 가운데에서 약간 오른쪽에 있었다. 그러면 09:35인데, 여기서 오늘 3월 5일 기준으로 35분을 더하라고 하니까 10:10분이 된다. 내가 사진을 찍은 시각과 일치한다. 해시계 아래는 ‘팔천칠백육십시간후’, ‘시호시호부재래(時乎時乎不再來)’, 'Time and Tide‘라고 적혀 있는데, 첫 번째는 365일, 즉 1년을 뜻하고, 두 번째는 사마천 사기 <회음후 열전>에 나오는 말이다. 뜻은 ’때는 다시 오지 않습니다.’ 라는 뜻인데, 괴통이 회음후 한신에게 한나라를 배신하고 제왕이 되어 천하 셋으로 나눌 것을 종용하면서 나온 말이다. 하지만 한신은 이를 거절하였는데, 한고조가 천하를 통일한 후 자신의 공과 야망을 대놓고 드러내다 오히려 반란분자로 몰려 한고조의 정실부인인 여후에게 죽임당하는 비극을 맞는다. 통일 후 버려진 말 취급받아 대중들로부터 토사구팽의 대명사로 알려졌지만 사실 겸손하지 못한 것이 더 문제였다. 세 번째는 영어 속담인 ‘Time and tide wait for no man.’을 말하는 것 같은데, 번역하자면, '시간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의미다.
해시계 옆에는 원형으로 된 대형 모래시계가 보인다. 강릉시와 삼성전자가 공동으로 세웠는데, 모래가 다 내려오는 데 걸리는 시간이 딱 1년. 매년 1월 1일 0시에 반바퀴를 돌려 다시 1년 동안 모래를 흘려보낸다. 작년에는 코로나19로 조용히 진행했다고 하는데, 올해 다시 시끌벅적한 연말연시를 회복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래시계회전식과 불꽃놀이를 지켜볼 수 있을라나? 해변에서 밤을 새고 해돋이를 보는 것은 덤이다. 모래시계에 12마리의 동물들이 그려졌는데, 바로 원성왕릉에서 본 십이지지상이다. 옛날 아라비아 숫자를 쓰기 전에는 십이지지를 활용해 두 시간 단위별로 측정했다. 가장 먼저 시작하는 자시(子時)는 밤 11시부터 새벽 1시다.
정동진 시간 박물관
모래시계를 뒤로하면 검은색 증기기관차와 알록달록한 색깔로 된 객차가 보인다. 증기기관차 앞에는 느린우체통이 세 개 있는데, 우체통에 정동진시간박물관 엽서를 넣으면 1,2,3년(왼쪽부터) 후에 발송된다고 한다. 정동진 시간 박물관인데 YTN사이언스가 추천한 박물관이라고 해서 들어가 봤다. 박물관은 유료로 성인 1명 기준 7,000원이다.
이 박물관은 어떻게 옛날 조상들이 시간을 측정했고, 어떻게 측정방법을 발전시켰는가를 소개하고 있다. 인류가 가장 오랫동안 사용한 시간측정도구는 해시계다. 인류 최초로 해시계를 사용한 곳은 이집트라고 하는데, 오늘날로부터 무려 6,000년 전부터 사용했다고 한다. 한반도에서는 신라시대 해시계 파편이 발견되어 삼국시대부터 사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 흐린 날에 시간을 측정하지 못한다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물시계를 고안했고, 연소시계, 모래시계, 오늘날 시계와 가까운 분동시계, 진자시계, 크로노미터, 수정시계, 원자시계 순으로 단점을 보완하며 진화해가는 역사를 설명해주고 있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과 특수상대성 이론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초 단위는 고도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시간의 역사를 설명한 다음에는 유럽과 미국에서 사용했던 화려한 금장시계들이 전시되어 있다. 금장시계 전시관에서 음성으로 안내한 내용이 나에게 좀 거슬렸는데, “……유럽 중세와 프랑스 혁명기의 시계를 경험해보세요.”라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시계를 보니 죄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것이다. 중세시대의 마지막자락이 지난 지는 이미 400년이 다 되었고,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지 무려 한 세기가 지난 때이다. 오히려 프랑스어로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의미의 단어인 벨 에포크(Belle Époque)시대에 더 부합한다. 그렇다면 “전쟁이 없이 평화로웠던 19세기의 유럽에서 민주주의와 산업혁명의 열매의 산실로 태어난 시계를 경험해보세요”로 내용을 바꾸는 것이 훨씬 낫지 않나 싶다.
한가지 더 아쉬운 것은 너무 유럽시계 중심으로 전시했다는 것이다. 대한제국, 중국, 오스만제국, 동남아시아도 제국 열강의 위협을 받은 건 사실이지만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서양 문물을 도입하려고 노력했다. 예전에 터키에 갔을 때 아랍어 숫자로 쓴 19세기 시계들을 본 적이 있는데, 동아시아, 남아메리카, 아프리카에도 이런 비슷한 사례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박물관 측에서 좀 더 지역을 다양화하여 금장시계를 전시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동아시아 시계로 유일하게 전시한 북극항성절기시천종처럼.
19세기 유럽 금장시계를 뒤로 하면, 예술작가들이 다양한 재료로 만든 시계들을 볼 수 있다. 자전거 바퀴로 만든 것도 있고, 모든 부품을 나무로 사용한 것도 있고, 공장에서 힘들게 일하는 노동자들을 표현한 작품도 있다. 예술작가들의 시계를 보고 밖으로 나오면 선박조타장치와 벤치들이 보인다. 그리고 뒤에는 2층 전망대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올라갔는데, 모래시계공원의 광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시계공원 왼쪽으로는 해수욕장, 오른쪽으로는 정동진천이 바다로 흐르는 광경을 볼 수 있다.
박물관을 나서고 공원을 빠져나와 정동진 시가지 광경을 봤다. 90년대만 하더라도 해수욕장 주변 가게이름들이 죄다 모래시계였는데, 이제는 오히려 원래 지명인 정동진을 붙여 장사하는 곳이 많아졌다. 게다가 가게들이 이전보다 더 늘어난 것을 보니 주민들과 지자체가 관광지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많이 노력했다는 흔적이 느껴졌다.
다만 정면으로 산에 걸쳐 있는 유람선들이 보이는데, 2002년에 지은 썬 크루즈 호텔이다. 정동진으로 휴양오시는 분들이 상당히 좋아하는 숙소인 건 사실인 것 같다. 하지만 해안단구 절경을 파괴하여 인공미만 남았다는 게 내 눈에 거슬렸다. 이로 인해 정동진은 한국지리 선생님들이 단골로 말하는 난개발의 대표사례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져서 다시 자연으로 돌리는 건 상당히 어려운 게 현실이다. 하지만 관광지 개발에 눈이 멀어 오래전부터 내려온 절경을 파괴하는 행위는 이제는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
조선시대 서울 광화문 정동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정동진. 60년대에 무연탄을 보관하기 위해 화물기차역을 만들었다. 하지만 강원도 탄광업이 서서히 몰락하면서 폐역의 위기까지 몰렸는데, 드라마 모래시계 정동진 촬영장면이 운명을 바꿨다. 누군가는 한 때 반짝하는 유행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지만, 정동진의 관광지 역사도 이제 30년이 다 되어 간다. 내가 봤을 때 모래시계공원과 이를 활용한 해돋이 행사를 지자체와 지역주민들이 잘 유지했기에 오늘날까지 명성을 이어온 이유가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오늘부터 팔천칠백육십시간이 수백 번 지나간 후 정동진은 어떨까? 정동진 관광사(觀光史)를 연구하기 위해 20세기 말 모래시계 드라마 비디오 자료를 미래 저장매체에서 찾아서 연구하여 논문 쓰는 석박사 대학원생이 나올 수 있을라나? 아니면 한 때 조선시대 명승지가 오늘날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는 것과 비슷한 운명을 맞을 것인가? 공원에 있는 대형모래시계가 수천 번 돌아가기를 기원하며 정동진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