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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우 Jun 04. 2021

양양 오산리 유적

식량과 물을 확보하기 쉬운 터에 자리잡은 양양 신석기 조상들

신석기 유적하면 생각나는 곳이 서울 암사동, 부산 동삼동, 양양 오산리, 제주 고산리 유적이다. 이중 양양 오산리 유적이 가장 오래되었는데, 무려 8,000년 전의 역사를 말해주는 곳이라고 한다. 왜 신석기 시대 우리 조상들은 양양 오산리를 선택했을까? 그리고 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아무래도 직접 가봐야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현장으로 직접 가보자.


움집과 쌍호 산책로

     

양양 오산리 유적은 대명리조트가 운영하는 쏠비치 양양에 가까이 있다. 양양 시내에서 국제공항 방향으로 양양대교를 타고 남대천을 건너자. 건너가자마자 사거리가 나오는데 좌회전해서 수산리로 향하자. 동명로의 굴곡이 심하니까 천천히 운전하면서 가면, 바다캠핑장이 나오는데 거기서 바로 우회전 하면 오산리 유적지를 볼 수 있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는 수산리로 가는 3번 버스를 타고 가면 되는데, 시내처럼 자주 운행하지 않기 때문에 출발시간을 꼭 확인하고 가도록 하자. 물론 시내로 돌아갈 때 시간표도 확인해야 한다.


오산리 유적에 처음 도착할 때 가장 눈에 띈 건 움집이었다. 오산리 유적의 움집터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시대 마을 집터라고 한다. 앞에 관광객에게 공개된 복원 움집은 2007년 확인된 3호 주거지 움집터를 원래 크기대로 복원한 것이라고. 면적이 약 48.3㎡(약 16평)으로 4~5명 정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관광객을 위해 준비한 움집으로 들어가 봤다. 움집에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따뜻한 곳에는 약 50cm 추운 곳에는 약 1m의 정도의 사각형 모양의 땅을 파야했다. 그리고 움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중앙에 돌로 설치한 화덕이다. 그래야 음식을 익혀먹고 추위를 피할 수 있으니까. 화덕을 만든 후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기둥을 박아 고정한 다음 서까래를 깔고 짚으로 지붕을 덮는다. 움집의 입구는 햇빛이 잘 들어오는 남향으로 만든 것이 대다수다. 움집이 진화하면서 남자와 여자의 공간을 나누기 시작했는데, 삼국시대가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사랑방과 안채의 개념이 있었다. 


관광객을 위해 복원한 움집


움집 지붕 서까래. 오늘날 전통가옥 건축의 원형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움집 중앙에 있는 화덕. 화덕으로 음식을 익혀먹었을 뿐만 아니라 추위를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신석기 때는 인간이 익힌 음식을 먹을 수가 있어서 질병이 예방되었기에 20~30세까지 살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평균수명과 비교해서는 터무니 없이 낮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는데 신석기에 태어난 대다수 아이들은 어린나이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보내야 했던 것일까? 그러면 대다수 아이들은 부모를 어릴 때 여의고 형제자매들과 사냥도구를 만들고 물고기잡이와 같은 험난한 일을 했다는 말인데. 오늘날에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렇게 낭만이 있던 시절은 아니었던 것 같다.  


움집 주변을 보면 작은 호수와 습지가 있다. 양양 쌍호 습지인데, 원래 옛날에는 두 개의 넓은 호수가 나란히 있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경포호와 비슷한 석호였던 것 같다. 움집 주변으로 북쪽에는 양양 남대천, 동쪽으로는 동해바다, 서쪽으로는 산지, 바로 앞에는 습지가 있는데, 이곳에 터를 잡던 신석기 사람들이 감이 뛰어났나보다. 물과 고기를 확보하기 쉬운데다가 호수 주변 땅을 농경지로 활용하기 쉬웠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서쪽 산으로 사냥도 갈 수 있다.  


양양 쌍호 습지
현재 남아있는 쌍호. 연못 하나 크기지만 80년대부터 면적이 서서히 넓어지고 있다.


습지를 산책로를 따라 살펴봤는데 폭설로 눈이 뒤덮여 있었다. 경포호 습지처럼 봄이나 여름에 와야 본래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산책로에서 건물로 돌아오는 길에 조그만한 호수처럼 보이는 것이 있는데, 바로 현재 남아있는 쌍호다. 쌍호는 일제강점기부터 수량이 줄어들어 1977년에 아예 호수를 메워 농토로 만들려고 했는데, 모래언덕에서 흙을 캐내는 과정에서 다량의 석기와 토기편이 출토되었다. 그래서 1981년부터 4년 간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면서 8,000년의 역사를 담은 신석기 유물들과 유적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하마터면 옛 선조들의 자취를 날려먹을 뻔한 일을 발굴조사가 막아낸 셈이다. 문화재가 발굴된 덕분에 쌍호는 오늘날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80년대부터 면적이 서서히 넓어지고 있다고 한다. 보존을 잘 한다면 옛 신석기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글자를 쓰지 않았던 우리 선조들이 남긴 것도 중요한 문화유산이기에 쌍호습지를 자연 모습 그대로 관리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양양 오산리 선사유적박물관 


쌍호 습지 산책로를 한바퀴 돌아 박물관으로 들어갔다. 입장료가 있는데 성인 1명 기준으로 1,000원이다. 전시실 입구에 들어가면 강원도 선사시대 유적지를 시대별로 나열해 놓았는데, 양양 오산리는 기원전 약 6,000년부터 신석기인들이 와서 거주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오산리 유적 지표면에서 가장 가까운 점토층에서 청동기 시대 유물도 발견되었는데 기원전 약 2,070년 ~ 1,510년 정도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옛 선사시대 조상들은 적어도 4,000년 동안 이곳을 중심으로 생활했다는 추측을 할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이 글로 남긴 삼국시대부터 오늘날까지의 기간보다 무려 2배나 더 길다.


전시실로 들어가보니 선사시대 옛 조상의 모습을 잘 담았다. 구석기 시대는 수렵채집생활로 생활을 유지했기 때문에 식량을 저장할 도구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석기 시대에 농경과 어로생활을 시작하면서 식량을 담을 도구가 필요했는데 바로 토기였다. 즉 토기는 구석기와 신석기를 나누는 중요한 요소다. 신석기 토기는 먼저 흙을 이긴다음, 테를 쌓아서 성형하고, 다 쌓은 후에는 표면을 두들긴다. 그런 다음 무늬를 새기고 화덕에 불을 때서 토기를 완성시킨다. 내가 울산 외고산에서 봤던 옹기제작의 시조격인 셈이다. 내가 세계 관광지들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옛 건축양식들과 도자기들을 수없이 봤지만, 이에 대한 최초의 토대는 사실 신석기 조상들이 움집과 옛 토기들로 쌓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오산리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는 신석기를 상징하는 빗살무늬토기와 민무늬, 덧무늬토기 그리고 두 귀달린 항아리 등이 있다. 


옛 조상들이 토기를 제작하는 모습을 담은 디오라마. 토기는 구석기와 신석기를 나누는 중요한 요소다.
민무늬토기(좌)와 덧무늬토기(우)
누른무늬토기(좌)와 빗살무늬토기 파편(우)


오산리 사람들은 식량을 다양한 곳에서 확보했다. 쌍호에서 민물고기잡이를 하던 집단, 동해바닷가로 가서 바닷고기잡이를 하던 집단 그리고 옛 구석기 때부터 이어진 나무나 식물의 열매를 채집하는 집단과 서쪽 산에 가서 사냥하는 집단의 생활상을 전시실에서 잘 보여준다. 특히 고기잡이와 관련된 작살, 낚시도구, 그물은 구석기와 구분 짓는 두 번째 요소라고 말할 수 있다. 오산리 유적지에서는 돌그물추, 이음낚시 도구, 동물의 뼈로된 낚시바늘이 발견되었다. 아무래도 오산리는 농경보다는 고기잡이에 더 특화된 것으로 보인다. 오산리형 이음낚시 도구의 크기가 다양해서 인데, 작은 고기와 큰 고기를 잡는 방법의 차이를 옛 조상들이 잘 알지 않았을까?


또한 신석기에는 오늘날과 같은 과학기술이 부족했다. 그래서 물고기를 잡아 생존해야 했던 오산리 선사 조상들은 하늘에 정성을 다한다면 원하는 것을 이뤄줄 것이라고 생각했나보다. 그래서 정령을 섬기는 애니미즘, 특정한 동식물을 신성하게 여기는 토테미즘과 신을 불러들이고 제사를 지내는 무당을 중심으로 한 신앙체계인 샤머니즘이 이때부터 생긴다. 양양 오산리 유적에서 이를 대표하는 것은 흙으로 만든 사람 얼굴상과 곰모양 토우다. 얼굴상은 내 집에서 가까운 부산 동삼동 패총에 조개껍데기 가면과 비슷한 것처럼 보이는데, 학자들은 동삼동패총의 가면처럼 씨족수호신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것도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되었다고. 이미 오산리에서는 집단의 풍요를 기원하는 원시종교의 형태가 시작하고 있었음을 잘 말해준다. 또한 이는 구석기와 구분되는 세 번째 요소이기도 하다.


사냥도구(좌)와 고기잡이 도구(우)
바다고기잡이(좌), 쌍호에서의 고기잡이(중), 수렵생활(우)
토제 인면상 전시장. 신석기부터 주술문화가 시작했음을 알려준다.


오산리 신석기 유적에서 발견된 가장 독특한 유물은 흑요석(黑曜石)이다. 원래는 화산폭발 때 분출하는 용암에 의해서 생성된 암석인데, 가공이 자유롭고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날을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석기의 중요한 재료로 쓰여서 당시에는 전략물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양양 오산리에서 발견된 흑요석은 백두산에서 기원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신석기 시대에도 오산리 조상들은 약 600km 거리의 동해안 길을 따라 함경도에 있는 사람들과 무역을 했다는 이야기다. 600km면 오늘날 경부선보다도 150km나 더 가야 하는 험난한 여정이다.


흑요석 전시관을 지나 옛 청동기 유물들을 관람하고 나오면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곳이 있는데, 바로 조각난 토기를 복원하는 전시관이다. 특히 귀엽게 만든 곰모양토우 조각을 맞추는 게 인상이 깊다. 깨진 토기는 바닥조각을 먼저 찾아 붙인 다음, 몸통조각, 토기 입구조각의 순서로 짜 맞춘다. 만약 자녀들과 쏠비치 양양에 놀러온다면 박물관과 쌍호습지를 구경한 다음 <토기복원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도 교육상 좋다고 본다.


오산리에서 발견된 흑요석. 신석기 조상들은 무려 600km나 떨어진 백두산에서 교역을 했다. 
어린이들을 위한 토기복원 체험 프로그램


동남쪽으로는 호수와 바다가 있고 서쪽으로는 산이 있는 양양 오산리. 8,000년 전 신석기 조상들은 이곳의 식량이 풍부함을 알고 집터를 잡았다. 호수에서는 민물고기잡이, 바다에서는 바닷고기잡이, 산에 가서는 동물들을 사냥하고 열매들을 채집하며 살아왔다. 뿐만 아니라 고기가 많이 잡히도록 그리고 집단의 풍요를 위해 하늘에도 정성을 다해 기도를 올리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들은 식생활에 중요한 토기와 집의 기본 도면을 만든 사람들이기도 했다. 이는 움집과 토기들을 보면 알 수 있는데, 후손들은 이들의 만든 설계도를 다양한 방법으로 응용하고 진화하여 주거형태와 문화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가락바퀴로 옷도 만들어 입었다. 내가 신석기 조상들과 달리 글자를 알고 이들보다 4배나 넘는 수명을 살 수 있다고 짐짓 교만해질 수도 있겠지만, 어찌 보면 이들이 만든 ‘의식주 기초도면’에 내가 빚진 셈이다. 이것이 바로 오산리 유적이 나에게 말한 교훈이다. 신석기 유적지를 국가에서 중요하게 보존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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