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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우 Jun 08. 2021

양양 낙산사

과거부터 오늘날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새겨진 관세음보살의 성지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전진리에는 관동8경이자 신라시대에 창건한 유서 깊은 사찰인 낙산사가 있다. 보통 관동8경하면 정자나 누각이 대다수인데 여기만 유일하게 불교 사찰이다. 조선시대의 강한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에도 낙산사는 당시 유생들과 사대부들의 단골 소재였다. 심지어 이성계의 할아버지인 도조는 증조할아버지 익조 이행리가 낙산사 관음굴에서 기도하며 얻은 아들인지라 조선왕실에서도 왕실 원당으로 지위를 유지하며 적극 후원했다.


물론 위기도 있었다. 고려 시대에는 몽골제국의 침입으로 불탔고,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유린당했다. 정조 때도 화재로 전소된 기록이 있어 다시 재건했으나 6.25전쟁의 참화를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15년 전에는 양양 산불로 거의 대다수 건물이 불탔을 뿐만 아니라 보물 제479호로 지정된 낙산사 동종이 녹아서 소실된 아픔도 있다.  


그럼에도 낙산사는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났다. 양양 산불의 비극을 극복했는지 사찰 주변 소나무들은 다시 자라기 시작했다. 2019년에는 무려 124만 명이나 다녀가서 양양 관광명소임을 다시금 증명했고. 어떻게 해서 1,500년 동안 신라·고려 불자들, 조선왕실과 사대부 그리고 오늘날 관광객들이 끊임없이 방문하는 사찰이 되었을까? 


양양시내에서 7번 국도를 타고 낙산사로 향했다.


낙산사 원통보전


양양시내에서 속초 방향으로 5~10분 정도 가면 바로 오른쪽에 낙산사 주차장이 보인다. 낙산사 주차장은 정문과 후문 두 군데가 있는데, 두 군데 주차장 가격 모두 4,000원이다. 나는 정문에 주차하여 홍예문을 먼저 보기로 했다. 홍예문에 들어가기 전에 낙산사 산불재난안전 체험장이 있는데 오늘은 눈이 많이 쌓여서 들어갈 수 없다. 체험장에는 당시 2005년 양양 산불 당시 낙산사 화재상황과 소실된 문화재의 흔적을 전시했다. 3년 전 이곳을 본 적이 있는데 화재 후 너무나 처참한 사진을 보고 눈물이 났다.


주차장에서 약 15분 정도 걸어가니 홍예문이 나왔다. 홍예문 안으로 들어가려면 입장료를 지불해야 하는데 성인 1명 기준으로 4,000원이다. 홍예문은 세조가 직접 낙산사에 행차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사찰의 입구에 세운 무지개식 돌문이다. 무지개형 문의 돌은 13개 돌을 2열로 쌓아 총 26개로 이뤄져 있는데 당시 강원도의 고을 26개소에서 석재를 하나씩 낸 것이다. 


홍예문 왼쪽으로 시장과 군수들이 심은 식수(植樹) 골목을 지나 왼쪽으로 가면 원통보전으로 들어가는 사천왕문이 나온다. 말 그대로 불법을 수호하는 4명의 왕을 모신 곳인데, 무려 조선 말기에 조성했다고 한다. 게다가 사천왕의 법력이 통해서 그런지 여기는 한국전쟁과 포화와 2005년의 산불의 악귀를 쫓아낼 수 있었다. 즉 사천왕문은 낙산사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셈이다.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이라면 상당히 근엄한 표정을 지을 것 같은데, 낙산사의 사천왕은 상당히 온화하고 장난기가 심한 얼굴이다. 두 번의 참화를 막아냈다는 안도감 때문에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낙산사 홍예문. 세조가 직접 낙산사를 행차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문이다.
한국전쟁과 2005년 양양 산불의 화마에서 벗어난 사천왕문
사천왕문 안 사천왕.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다.


사천왕문을 지나 왼쪽을 보면 동종이 보이는데 2005년 양양과 낙산사 산불의 비극을 담은 현장이기도 하다. 원래 동종은 1469년 조선 세조가 낙산사에 행차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예종의 명으로 만들어졌다. 이 종을 주물 제작한 사람은 정길산인데 서울 보신각 동종 제작에도 참여했던 인물이다. 오늘날에도 미술 전문가들이 높이 평가하는 것을 보면 당대 최고의 주물 장인이 아니었을까? 산불 전에는 무려 500년이 넘은 역사를 간직한 종이자, 보물 제479호였는데 화마로 녹아내렸다. 약 15년 전 뉴스에 비친 동종의 마지막 운명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봤던 기억이 난다.


동종에서 다시 정면으로 보면 빈일루(賓日樓)라는 누각이 보인다. 뜻은 동쪽의 해를 맞이하는 누각이라는 뜻인데, 누각에 올라가 밖을 보면 푸른 바다가 한눈에 보일 뿐만 아니라 일출과 월출을 감상하는데 최고의 장소였던 것 같다. 빈일루는 2005년 화재 이전에도 존재하지 않던 건물인데, 김홍도 <금강사군첩>에 수록된 <낙산사도>를 토대로 2009년에 양양 산불을 견딘 느티나무와 소나무를 손질해서 복원했다고 한다. 그런데 빈일루는 원통보전 앞 요사체 영역에서 유일하게 유구(遺構: 옛 토목 건축물의 구조와 양식을 추측할 수 있는 잔존물)와 김홍도의 그림이 일치하지 않아서 건물을 배치하고 복원할 때 상당히 애를 먹었다고 한다. 격론 끝에 김홍도의 그림에 맞게 복원하자고 결정했는데, 나중에 다른 조선시대 화가들의 <낙산사도>를 비교한 결과 오히려 김홍도의 그림이 잘못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건물 유구대로 복원했으면 빈일루는 횡으로 배치되어야 하고, 현 빈일루 위치에는 경전을 보관하는 누각형 두 칸 장전(藏殿)이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범종각. 보물 제479호 낙산사 동종이 있었던 곳이다. 2005년 화마로 녹아내렸다.
빈일루. 동쪽의 해를 맞이하는 누각이라고 나온다. 원래는 종이 아닌 횡으로 지어져야 했다고.


빈일루를 지나면 응향각이 있다. 그리고 응향각 양쪽으로 있는 정취전과 설선당을 지나 대성문으로 들어가면, 낙산사의 핵심인 보물 제499호 양양 낙산사 칠층석탑과 원통보전을 볼 수 있다. 신라시대의 삼층석탑과는 상당히 다른 양식인데 조선 세조 13년(1467)년에 완성한 석탑이고 고려시대의 양식과 수법이 남아있어서 그렇다. 이 석탑도 사천왕문과 마찬가지로 한국전쟁과 2005년 낙산사 화재 때 살아남았지만 탑 오른쪽을 보면 지붕돌이 심하게 풍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필요하다면 불국사 석가탑처럼 복원과 수리과정을 거쳐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석탑 뒤 원통보전은 모든 중생의 괴로움을 구제하고 극락왕생의 길로 인도하는 관세음보살을 모신 건물이다. 보통 사찰을 가면 부처를 모신 대웅전이 모셔 있는데 낙산사는 상당히 이채롭다. 관음보살을 모신 원통보전이 있는 이유는 <삼국유사>에 나오는데 다음과 같다.


齋戒七日浮座具晨水上, 龍天八部侍從引入崛内. 叅禮空中出水精念珠一貫給之湘領受而退. 東海龍亦献如意寳珠一顆師捧出. 更齋七日乃見真容. 謂曰, “於座上山頂雙竹湧生, 當其地作殿冝矣.” 師聞之出崛, 果有竹從地湧出. 乃作金堂塑像而安之, 圎容䴡質儼若天生. 其竹還没. 方知正是真身住也. 因名其寺曰洛山, 師以所受二珠鎮安于聖殿而去.


“[그가] 재계(齋戒)한지 7일째에 좌구(座具)를 새벽 물 위에 띄웠더니 용천(龍天)의 8부(八部) 시종이 굴속으로 [그를] 인도하였다. 공중을 향하여 예배를 드리니 수정염주 한 꾸러미를 내어주므로 의상이 받아 물러났다. 동해(東海)의 용 역시 여의보주 한 알을 바치므로 법사가 받들고 나왔다. 다시 7일을 재계하고 나서 곧 [관음의] 진용을 보았다. [관음이] 말하기를, “자리 위의 산정에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날 것이니, 그 땅에 불전을 지음이 마땅하리라”고 하였다. 법사가 그 말을 듣고 굴 밖으로 나오니 과연 대나무가 땅에서 솟아 나왔다.

이에 금당을 짓고 [관음] 상을 빚어 모시니 [그] 원만한 모습과 고운 자질은 엄연히 하늘이 낸 듯하였다. 그 대나무는 다시 없어졌다. 그제야 그 땅이 [관음] 진신의 주처임을 알았다. 이로 인해 그 절 이름을 낙산이라고 하고, 법사는 받은 두 구슬을 성전에 모셔두고 떠났다.”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삼국유사 제4 탑상, 낙산이대성 관음 정취 조신(洛山二大聖 觀音 正趣 調信)> 발췌


즉 의상이 관음굴에서 7일간 기도해 수정염주와 여의보주를 받았고, 다시 7일을 기도해 관세음보살을 만나 대나무가 솟아난 땅에 불전을 지으라고 해서 의상은 이를 따랐다. 여기서 말한 불전이 바로 지금의 원통보전이다. 즉 의상이 관세음보살을 직접 본 것을 기념해서 지었다고 보면 된다. 오랜 역사가 있지만 원통보전도 2005년 양양 산불의 화마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조선 초기 양식으로 2007년 11월에 복원했다. 다만 낙산사 원통보전에 봉안되어 있는 건칠관음보살좌상은 화마 속에서 무사히 살아남았다고 한다. 불상을 만들 때 흙으로 대략적인 형태를 만든 다음 그 위에 종이나 삼배를 입히고 침을 바르고 말리는 과정을 반복했다고. 강원도 내에서 찾기 힘든 기법이라고 한다. 원통보전 지붕을 보면 죽서루, 오죽헌과 달리 공포가 건물 기둥뿐만 아니라 사이에도 있다. 이를 다포양식이라고 한다. 


보물 제499호 양양 낙산사 칠층 석탑


낙산사 원통보전. 관세음보살상을 모셨고 다포양식의 건물이다.


해수관음상, 보타전, 의상대와 홍련암


원통보전을 나와 해수관음상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해수관음상은 1972년부터 5년 동안 제작을 했는데, 높이가 무려 16m나 된다고 한다.  2005년 화재 이후에는 불법이 더욱 번창하여 중생의 번뇌를 깨달음으로 성화시킨다는 의미에서 관음상 둘레에 108 법륜석을 제작했다. 원통보전이 낙산사의 과거를 말한다면, 해수관세음보살은 낙산사의 현재를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불자들은 관세음보살님께 자비를 구하고, 관광객들은 관음상과 탁 트인 동해바다의 정취와 해돋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의상이 바라봤던 관세음보살도 불자들이 무릎을 조아릴 정도로 이렇게 거대했을까? 관음상 남서에도 원통보전과 마찬가지로 동종이 있다.   


해수관음상을 뒤로하고 길을 내려오기 전 보물 제1723호인 해수관음공중사리탑으로 가봤다. 동해바다를 옆에 두고 홀로 서 있다. 이 사리탑도 산불 이후 복원수리 작업을 거쳤는데, 작업 도중 진신사리 1과를 담은 유리제 사리호, 금제합, 은제합, 청동합과 각 합을 싼 비단 보자기가 담긴 사리장엄구를 발견했다. 그리고 부처께 소원을 비는 내용을 적은 발원문(發願文)도 발견했는데, 진신사리가 1692년에 봉안되었다는 기록이 있었다고 한다.


동해바다가 보인 곳에 서 있는 해수관음상


해수관음상 동쪽으로는 동해바다가 훤히 보인다.


보물 제1723호인 해수관음공중사리탑


공중사리탑을 지나면 아래에 또 다른 건물들이 보인다. 그중 커다란 건물을 보니 보타전(寶陀壂)이라는 현판이 있다. 여기도 관세음보살을 모시는 건물이라고. 1993년에 완공했다고 한다. 이곳에는 관세음보살이 7가지 모습으로 변신한 칠관음상, 32가지 모습으로 변신한 삼십이응신 그 외 1,500분의 관음상 등을 봉안해 놓았다고 한다. 이는 중생의 고통과 고난을 구제하기 위해 중생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변하는 관세음보살을 표현했다고 한다. 불상을 보니 마치 인도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개의 손발로 이뤄진 신상과 비슷한 느낌이다. 보타전 앞 정면으로는 누각 형식의 보타락이 있고, 보타락 앞에는 연못으로 조성된 관음지가 있다. 보타전도 다행히 원통보전의 사천왕문과 함께 2005년 산불에서 무사했다고 하는데, 화재에서 오랫동안 무사해서 몇 백 년 후 후손들이 조선시대 양식인 원통보전과 90년대 대한민국 양식인 보타전을 비교 연구할 수 있는 문화재가 되기를 기원한다.   


보타전. 90년대에 지은 건물이다.


관음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따라 서른두 가지 모습으로 변하는 불상으로 표현한 삼십이응상(보타전)
보타락 앞에 펼쳐진 관음지


보타전을 나서고 다시 동해바다를 향해 왼쪽 길로 향하면, 낙산사의 또 다른 절경인 의상대와 홍련암을 볼 수 있다. 의상대는 이름 그대로 낙산사를 창건한 의상대사를 기념하기 위해 지은 정자다. 만해 한용운의 <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에 의하면 1925년 일제강점기 때 지었다고 하는데,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에 아래와 같은 구절이 있어 이전에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나 지금이나 낙산사 의상대에 해돋이 보려고 오는 건 여전했나 보다. 오늘날에도 새해 새벽이 되면 낙산사는 첫 해돋이를 보러 오는 사람으로 장사진을 이루니까. 그래서인지 건너편 홍련암과 함께 빼어난 절경을 자랑하여 명승 제27호로 지정되었다. 


건너편 홍련암으로 가는 도중에 큰 비석들이 하나 있다. 그중 눈에 띄는 것이 낙산사 해수관음공중사리탑비다. 강원도 관찰사 이현석이 1683년 관음상의 색이 바래서 금칠을 했더니 하늘에서 사리1과가 떨어져 이를 봉인해 탑을 만들어 세웠다는 내용이다. 아까 봤던 해수관음공중사리탑과 내용이 거의 일치해서 낙산사 역사를 추적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료다. 또한 낙산사가 숭유억불의 조선 시대 풍조에서는 예외적인 곳임을 다시금 알려주는 비석이기도 하다.


드디어 홍련암에 도착했다. 여기서는 저 멀리 있는 의상대, 이를 받드는 기암괴석과 동해바다가 절경을 이루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오늘날 남은 홍련암은 6·25전쟁 때 타버린 것을 1976년에 중건한 것이다. 즉 여기도 2005년 양양 산불의 참화를 면했던 것이다. 홍련암도 역시 의상과 관련된 구전이 내려오는데, 해안 석굴 속으로 들어간 후 자취를 감춘 파랑새를 보고 석굴 앞 바위에서 7일 밤낮으로 기도하다가 붉은 연꽃 속에서 나타난 관세음보살을 보고 세운 암자라고 한다. 암자 법당 마루 밑으로는 출렁이는 바닷물을 볼 수 있도록 지었다고 하는데 의상에게 여의주를 바친 용이 불법을 들을 수 있도록 배려한 구조라고 한다. 감은사지 법당 밑에 용이 된 문무왕이 출입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 것과 매우 비슷하다.


낙산사 해수관음공중사리탑비. 해수관음공중사리탑과 쌍을 이룬다.
의상대(좌)와 홍련암(우)
의상대에서 바라본 홍련암(좌), 홍련암에서 바라본 의상대(우)


동해 절경과 어우러진 의상대와 홍련암을 뒤로하고 출구로 내려가는 길에 의상기념관을 들렀다. 화엄종을 창시한 의상의 일대기를 그린 그림들과 화엄사상의 요지를 간결한 시로 축약한 문서인 화엄일승법계도를 볼 수 있다. 그리고 해수관음공중사리탑에서 사리장엄구와 함께 출토된 보자기들을 볼 수 있다. 이 뿐만 아니라 의상기념관에는 2005년 산불로 녹아버린 동종을 볼 수가 있는데, 당시 산불이 얼마나 처참했었는지를 몸소 말해주고 있어서 너무나 서글펐다. 오른쪽에는 당시 다 타서 남은 원통보전의 대들보로 만든 첼로와 바이올린이 있다. 당시 화재를 교훈 삼아 낙산사 경내 곳곳에 폐쇄회로(CCTV)를, 연기, 온도와 열 변화를 감지해 종무실에 설치된 통제센터에 실시간으로 전송하는 시스템을 그리고 원통보전 뒤편 오봉산 방향에 25대의 적외선 감지기를 설치했다고 한다. 또한 소방차 1대를 경내에 상시 배치하여 속초소방서와 합동으로 소방훈련을 매번 실시한다고 한다. 


낙산사를 요약하자면 관세음보살 신앙의 성지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옛 원통보전에 모신 건칠관음보살좌상, 오늘날 보타전에 모신 칠관음상과 삼십이응신 그리고 동해바다에 면해 있는 해수관세음보살상과 홍련암이 이를 대표한다. 관세음보살이 중생을 어떻게든 구제하고자 하는 정신과 신라시대 고승인 의상을 만났던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 여러 번 일어난 화재와 2005년 산불을 반면교사 삼아 낙산사 경내와 주변에는 화재를 감시하는 시설들을 상당수 갖추었다. 관세음보살의 안녕을 위해 법력뿐만 아니라 과학기술도 겸비했다. 이 두 가지가 모두 결합되어 오랫동안 건물을 유지할 수 있다면 몇 백 년 후에도 관동팔경의 명성을 그대로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사천왕상이 낙산사를 침투하려는 화마를 계속 물리쳐줘서, 몇 백 년 후 역사학도와 건축학도들이 조선시대와 대한민국 초기 낙산사 문화재와 관음보살상을 비교, 연구하여 좋은 논문을 남길 수 있기를 기원하며 낙산사를 나섰다. 


2005년 산불로 처참하게 녹아버린 낙산사 동종


2005년에 다 타버린 원통보전의 대들보로 만든 첼로와 바이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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