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의선사의선종 전래가오늘날까지 남긴 것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 산자락으로 향하는 길로 들어가면 석탑 하나가 외로이 서 있다. 바로 국보 제122호 양양 진전사지 3층 석탑이다. 석가탑이나 감은사지 석탑과 같이 2층으로 된 받침돌에 3층으로 된 몸돌과 지붕돌로 이뤄져 있지만, 받침돌 두 층과 1층 몸돌에 불교 이야기가 담긴 부조들이 밋밋한 두 탑과 달리 화려하게 새겨졌다.
그런데 이곳은 경주의 폐사지와 비교하면 뭔가 다르다. 경주는 옛 수도라 옛 궁궐이었던 월성에서 접근하기 쉬웠을 뿐만 아니라 평지에 지어졌다. 오늘날로 보면 서울 도심에서 쉽게 갈 수 있는 종교시설들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진전사지는 오늘날까지도 하루에 단 세 번 밖에 버스가 다니지 않아 대중교통을 이용하기가 매우 불편하다. 오늘날로 보면 깊은 산속에 있는 수도원, 기도원 혹은 산 중턱에 있는 사찰과 비슷하다고 봐야 할라나.
홀로 있는 석탑을 뒤로하고 설악저수지를 지나면 진전사 대웅전이 보인다. 대웅전 오른쪽 산자락 원뿔로 생긴 조형물을 위로 올라가면 진전사지 삼층석탑을 복사한 것 같은 받침돌 두 층 위로 8각 몸돌과 옥개석이 보인다. 안내판을 보니 보물 제439호 양양 진전사지 도의선사탑이라고 쓰여 있다. 아무래도 고승을 기념한 부도인 걸로 보인다. 보통 부도라 하면 연꽃 받침돌 위에 구체나 타원구를 올린 다음 독특한 양식의 지붕돌로 마무리한 것을 떠올리는데, 이곳의 받침돌은 다른 부도와 달리 매우 독특하다. 아무래도 도의선사가 남긴 업적이 어마어마해서 그런 게 아닐까?
삼층석탑과 도의선사탑은 서로 붙어있지 않다. 즉 절의 구역이 둘로 나눠져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게다가 산자락을 보면 신라 월성 근처에 있는 규칙 있는 정사각형 가람 양식으로 짓기 어렵다. 그럼 진전사는 통일신라시대 어느 시기부터 불교가 변화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게 아닐까? 삼층석탑, 도의선사탑과 폐사지를 살피면서 이곳의 비밀을 알아보자.
진전사지 삼층석탑의 부조
진전사지를 가려면 양양군내에서 20분 정도 산으로 들어가야 한다. 거마천로를 따라 가톨릭관동대학교 양양캠퍼스를 지나 계속 가다 보면 물지천을 건나가는 석교교가 보인다. 석교교를 건너자마자 좌회전하여 물치천을 계속 따라가다 보면 펜션들을 지나는데 거기서 좀 더 가면 오른쪽 편으로 삼층석탑을 볼 수 있다. 양양터미널에서는 둔전리 종점으로 바로 가는 버스가 하루에 겨우 세 대 있어서, 사실상 차량이 있어야 접근이 가능하다.
대중교통으로 찾아가기 어려운 산자락에 삼층석탑이 홀로 있다. 삼층석탑을 자세히 살펴보면 아무런 무늬가 없는 석가탑과 감은사지 석탑과 달리 2층 받침돌과 1층 몸돌에 부조가 화려하게 새겨져 있다. 1층 받침돌에는 각 면별로 부조상이 둘 새겨져 있는데, 8가지의 연화좌 위에 앉아 있는 비천상이 새겨져 있다. 원래 인도 신화에서는 신에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천계에 사는 생명을 지닌 존재(사트바 카르만 - 보통 유정(有精)으로 번역함)다. 불교에서는 이들이 불상의 광배(光背, 불상에 나오는 성스러운 빛)에서 부처님을 찬탄하는 존재로 변형된다.
2층 받침돌에는 한 면당 우락부락하게 생긴 둘이 구름 위에서 무기를 들고 서 있다. 비천상처럼 다 합치면 역시 여덟. 바로 불법을 수호하는 여덟 수호신인 팔부신장(八部神將)이다. 팔부신장이라, 아! 석굴암에서 좌우에 넷 씩 새겨진 기억이 난다. 용, 야차, 긴나라, 아수라, 마후라가, 인드라, 건달바, 가루다로 이뤄져 있다. 원래 인도 각지에 있었던 다양한 토착신들이었는데, 불교에서 부처의 법과 불국토를 수호하는 이들로 탈바꿈했다.
그 위에 있는 1층 몸돌에는 한 면당 하나의 불상 부조가 새겨져 있다. 동면에는 모든 중생의 질병을 고쳐주는 약사여래(藥師如來), 서면에는 불국사에서 봤던 서방정토 극락세계의 주인인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 남면, 북면에도 불상이 보이는데, 아무래도 신라만의 독특한 사방불을 표현한 것 같다. 보통 남면에는 미륵불, 북면에는 석가모니불로 표현하는데 시대와 작품에 따라 사방불을 표현하는 법이 달라 단언하기는 힘들다. 이 석탑을 요약하여 말하면 사방불을 아래에 있는 팔부신장들이 수호하고 팔부신장 아래에는 비천상들이 석가를 찬탄하는 것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 석탑은 1965년 3월 단국대학교 정영호 교수팀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처음 학계에 보고되었을 때는 훼손이 심해서 거의 무너질 위기에 처했었다고. 게다가 3층 석탑은 신흥사에 있다고 자칭하는 한학수 등 2명의 승려가 낙산사로 이전하려고 했지만, 교수가 이를 막았다고 한다. 교수의 노력과 조사로 인해 12월 20일에 문화재위원회 제1분과위원회 제18차 회의에서 진전사지를 국보로 지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1968년 5월 석탑을 완전히 해체하고 주변 조각을 수습하여 복원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정 교수의 노력으로 인해 버려질 뻔한 국보를 다시금 되살린 셈이다. 게다가 유적지 조사를 위해 40년 동안 석탑 주변 3,155평의 부지를 매입했다가 21세기 들어서 설악산에 있는 신흥사에 기증했다고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석탑 안에 있던 사리장치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아랫면에 녹색의 구슬 하나만 발견되었다고.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일제 말기 어느 해 가을 일본인 2명이 와서 지렛대로 석탑의 옥개석을 들어 돌을 받혀놓고 사리공 안에서 다량의 보물을 도굴했다고 한다. 이 석탑도 결국 일제의 만행으로 훼손된 채로 정영호 교수팀 눈에 띄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석탑이 있는 곳 오른쪽 아래에는 발굴작업이 진행되는 듯하다. 아무래도 석탑 주변 진전사의 원형이 어땠는지를 연구하고 복원하기 위한 작업이 아닐까? 다만 정사각형의 감은사지와는 조금 다른 형태로 보인다. 진전사가 신증동국여지승람 양양도호부에서 사찰로 언급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고려 말기 내지 조선 초기에 소리 없이 사라졌을 가능성이 크다. 이후 60년대까지 이곳은 오늘날 지명처럼 둔전사지라고 불렸다고 한다. 하지만 60년대 발굴팀이 진전(陳田)이라고 새겨진 기와를 발견하여 오늘날에 다시 진전사지로 고쳐 부르고 있다.
또한 4년 전 석탑 북쪽에서 삼국시대(6세기경) 금동보살삼존불입상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석탑의 북쪽이라면 감은사지처럼 금당에 있었던 불상이 아니었나 싶다. 정영호 교수도 유적 조사 보고서에서 불상에 대한 전설을 언급하며 석탑 주변에서 불상 유물들을 발견할 것을 기대했는데, 그가 석탑 복원을 하고 보고서 쓴 이후 50여 년이 지나 현실이 되었다.
그런데 진전사지는 석탑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석탑을 지나 설악저수지를 거쳐서 600m정도 올라가면 최근 복원된 진전사 대웅전이 보이는데, 오른쪽 편에 있는 원뿔로 된 탑을 지나 언덕으로 가면 또 중요한 보물이 있다. 보물로 지정된 것을 보면 아무래도 진전사에 대한 사연이 있지 않을까?
도의선사의 이루지 못한 꿈 그러나...
안내판에는 이렇게 써져 있다. ‘보물 제439호 양양 진전사지 도의선사탑’ 즉 도의선사를 기념한 부도라고 볼 수 있다. 보통 내가 생각하는 부도는 낙산사에서 봤던 것처럼 육각 혹은 팔각 양식 받침돌 위로 구체가 있고 상륜부를 화려하게 장식한 것이 떠오르는데, 여기에 있는 부도는 뭔가 특이하다. 사각형 2층으로 이뤄진 받침돌이 통일신라시대 삼층석탑들의 것들과 같다는 것이다. 다만 부도의 몸돌과 지붕돌은 통일신라 후기의 일반 양식인 팔각 원당형으로 볼 수 있다.
부도가 이렇게 특이하게 만들어졌다면 도의선사는 뭔가 특별한 사람인 것 같다. 그는 통일신라시대 북한군(北韓郡: 오늘날 서울로 추정) 출신이다. 선덕왕 5년(784)에 당나라로 건너가서 오대산으로 갔는데 문수보살의 감응을 얻어 비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고. 이후 강서성 홍주에서 서당지장의 선법을 이어받았는데 그가 익힌 불법은 선종 중에서 육조 혜능의 가르침을 계승한 남종선(南宗禪)이었다. 아마 역사시간에 돈오점수(頓悟漸修)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을 것이다. 남종선에서 가장 강조하는 부분이 수행을 거치지 않고 단번에 진리를 깨닫는 돈오를 강조한다. 즉 “문자에 입각하지 않고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라는 열린 교리를 펼친 것.
35년 간의 긴 유학생활을 마치고 헌덕왕 13년(821)에 신라에 귀국하여 자신의 사상을 전파한다. 하지만 당시 통일신라의 불교 주류는 문자로 된 경전을 중요시하고 이를 통해 교리를 체계화한 교종이었다. 당시 문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오늘날과 달리 몇몇 엘리트에 국한되었다. 그래서 전통과 권위를 중시하는 신라 진골귀족층이 적극 후원하였다. 그런데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신라 진골귀족층들에게 “문자에 입각하지 않고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라고 말한다면? 진골귀족들에게 도의선사는 자신들의 특권에 도전하는 눈엣가시로 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당시 그가 전파한 남종선 사상은 이로 인해 거의 이단 취급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진골귀족과 기존 불교 세력의 견제에 지친 그는 내가 서 있는 진전사에 죽을 때까지 수행하며 은거했다.
도의선사의 꿈은 생전에 이루지 못했지만 그의 제자인 염거와 염거의 제자인 보조체징을 통해 법도를 전파하게 된다. 보조체징 때에 이르면 도의선사 시절 막강했던 진골귀족층의 권위가 계속된 왕권 다툼으로 인해 약해지기 시작한다. 반면 지방호족들과 권력에 소외되었던 6두품들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선종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 프로파간다로 당시 문자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지지를 쉽게 얻을 수 있어서 호족들에게는 이목을 끌 수밖에 없었던 것. 즉 진전사지는 신라 말 교종에서 선종 중심으로 불교가 전환되는 시작점이 된 중요한 역사 장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고려 때 지눌이 선종 중심의 불교 통합을 시도하여 오늘날 한국불교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조계종으로 계승된다.
한마디로 도의선사는 시대를 잘못 타고나 생전에 꿈을 이루지 못하고 좌절하여 설악산 아래서 은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의 가르침은 100년 후 지방호족이 득세하는 시대로 바뀌면서 귀족이 후원했던 교종이 몰락하고 민중의 지지를 받은 선종과 조계종이 유행하는 한반도 불교의 운명을 좌우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공으로 인해 그는 1994년 조계종이 종단개혁을 하면서 종조로 확정되었다. 한마디로 그의 정신이 오늘날 한반도 불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도 버스가 많이 다니지 않아 대중교통으로 오기에 불편한 진전사지. 자신의 남불선 사상을 배척한 신라 귀족들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던 도의선사는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은거의 길을 택했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100년 후 신라 왕권에 도전하는 호족들로 인해 결실을 맺게 되고, 오늘날 조계종으로 이어오고 있다.
폐사지로 남은 진전사와 도의선사의 일생을 보면서 사람을 첫인상이 아닌 끝인상으로 평가해야 함을 다시금 느낀다. 그래야 일생의 진면목을 볼 수 있으니까. 그리고 민중에게 좋은 정책과 사상들이 기득권층으로 인해 좌절될 때 낙담하면 안 된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세월은 고정되지 않고 언제나 바뀌니까.